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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포교원장 범해 스님

이웃을 위한 지극한 마음이 청정한 공양입니다

부처님·이웃에 공양 올리는 것은 스스로 공덕 쌓는 일
대가 바라는 삿된 마음으로 공양 올릴 때는 공덕 없어
시주자·공양물·받는 이 마음 모두 청정할 때 참다운 공양

오늘은 지장재일입니다.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기리는 날입니다. 기도나 공양을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출가의 삶을 본받아 정진하겠다고 발원을 세우고 점검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원력을 세우고 발심을 할 때 비로소 그 원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 선비는 과거시험을 볼 때마다 거듭 낙방을 했습니다. 매번 낙방을 하자 주위 사람들이 선비에게 “마을 뒤에 있는 절에 가서 불공을 올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니 한 번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선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한 되도 안 되는 좁쌀을 들고 절에 올랐습니다. 이 무렵 불교는 사회적으로 큰 대접을 받지 못해 스님들을 업신여기고 하대하던 때였습니다. 그 선비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선비는 그 절에 있던 스님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좁쌀을 부처님 앞에 턱 올리고는 “어이 부처, 자네가 그렇게 용하다면서. 이번에 나를 꼭 과거시험에 합격시켜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온 좁쌀을 다시 받아 갈꺼야”라고 했답니다. 불손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지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시나 그 선비는 과거시험에서 또 낙방을 했습니다. 마음을 그렇게 쓰는데 될 리가 없겠지요. 만약 그 선비가 ‘내가 공양을 올렸으니 꼭 과거에 급제할 거야’라는 생각을 버리고 남을 존대하고 베푸는 마음으로 정성껏 공양을 올렸다면 과거에 급제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선비는 과거급제라는 대가만을 바라고 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좁쌀만큼의 공덕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어떤 대가를 바라고서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공양물이 많고 적음을 떠나 지극한 정성을 담아 올릴 때 공덕이 되는 것이고, 그 공덕이 쌓여 복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공양을 올릴 때는 무엇보다 시주자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공양물을 받는 마음도 중요합니다. 

‘초발심자경문’에는 “수지수식(須知受食)은 단료형고(但療形枯)하여 위성도업(爲成道業)이라. 수념반야심경(須念般若心經)하고 관삼륜청정(觀三輪淸淨)하여 불위도용(不違道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음식을 받는 것은 다만 이 몸뚱이가 말라 시드는 것을 다스려 도업을 성취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아야 하고, 모름지기 ‘반야심경’을 관하되 무주상보시의 청정함을 생각해 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의 첫째 목표는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도업을 이루는 것이지요. 불자들이 시주한 공양물을 받아서 먹을 때는 무엇을 위해 받느냐, 단순히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몸이 마르고,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은 공양물로 도업을 성취하고, 그 깨달음으로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자들이 공양물을 올리는 것은 그 자체로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자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공덕이 쌓이고 쌓일 때 비로소 복이 옵니다. 공덕을 짓는다는 것은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부처의 경지에 들어섰지만,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이타행을 실천하는 지혜로운 이를 말합니다. 보살은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합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으뜸이 바로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는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베풀어야 하느냐. 베푸는 대상물에 하나의 흠집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좁쌀 한 되를 올리더라도 거기에 어떤 의미를 두거나, 나에게 무엇을 해줘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받는 이도 무엇인가 받았으니까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관삼륜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반야심경’을 관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아침저녁 예불 때마다 봉독하는 ‘반야심경’은 260자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경전이지만 불교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모든 것은 공이라는 것이지요. 삼라만상은 물질적인, 보이는 현상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실체가 없는 그저 공한 상태입니다. 공하기에 있음도 없음도 구분할 수 없고, 공하기에 어떤 생각을 담아둘 것이 없습니다. 무주상보시도 이와 같습니다. 어떠한 대가나 바람 없이, 그런 생각조차도 담아두지 않고 그냥 베푸는 것이 바로 무주상보시인 것입니다. 

보시를 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청정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행위에 일체의 삿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내 마음이 청정해야 하고, 공양물이 청정해야 하며, 공양을 받는 이도 청정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청정할 때 비로소 참다운 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설악산에 가면 성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몹시 궁금해서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서너 번 넘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설악산을 오르는 지게꾼 아저씨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키가 160㎝ 정도에 몸무게 60㎏이 될까 말까한 조그만 체구로 매일 40㎏이 넘는 짐을 지고 매일 설악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나르는 짐은 사찰의 식구들이 먹을 물과 음식, 인근 매점에서 장사를 위해 꼭 필요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설악산에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분의 노력이 없으면 장사하는 사람도, 사찰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악산에 있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분이 성인처럼 고마울 수밖에 없었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그분은 남다른 분이었습니다. 6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열여섯 나이 때부터 지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루에 한 번 오르기도 힘든 설악산을 서너 번 지게를 지고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했는데, 장애인과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부인이 정신연령이 한 참 낮은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당신은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해 좋은 색시감이 많았을텐데 왜 그런 결혼을 했느냐고”고 물었답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은 도망도 안 가고 집을 잘 지켜줄 것 같았다”고 했지만, 자세히 물어보니 “내가 결혼해서 돌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향한 연민의 정이 사랑으로 이어졌던 거죠. 그렇게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 역시 장애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부인도 장애를 겪고 있으니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위탁기관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가지고 거기로 찾아갔답니다. 그런데 아들과 함께 있는 아이들이 얼마 안 되는 과자를 나눠 먹으면서 웃고 떠들고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행복해 보였답니다. 아이들의 맑은 모습에 감동을 받은 그분은 그때부터 ‘돈이 생기면 남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결심을 했답니다. 

그분이 당시 지게 일을 하면서 한 달에 150만원 정도를 벌었는데, 거기서 꼭 일정액을 후원했고, 다른 장애인 시설에도 보시를 해왔다고 합니다. 힘든 일을 해서 받는 돈으로 자기 살기도 어려운데 그 가운데 일부를 보시하겠다는 그 마음을 냈다니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이 분을 성인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지게꾼 아저씨의 그 마음이 바로 청정심입니다. 청정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삿됨 없이 우러나는 그 한 생각, 그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지극한 마음이 청정한 공양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얼마나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청정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고 있는지 되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먼저 생각한다면 중생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생심에 빠져 있으면 늘 집착의 고통에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정한 공양물을 청정한 마음으로 공양하면 그 공덕이 꼭 자기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오늘 지장재일을 맞아 여러분들이 청정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렸는지, 남을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늘 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기를 발원합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법문은 조계종 포교원장 범해 스님이 6월27일 지장재일을 맞아 서울 봉은사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592호 / 2021년 7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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