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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수 팔성사 목조아미타불좌상

기자명 이숙희

아미타부처님 복장유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원효·의상 스님의 제자 8명이 세운 암자 가운데 하나가 ‘팔성사’
1974년 봉안된 아미타불…1993년 새벽 도난 돼 23년 만에 발견
협시 보살 없는 이유 알고 싶지만 복장물 사라져 확인할 수 없어

1) 팔성사 목조아미타불좌상(1970년대 사진). 팔성사 제공.
1) 팔성사 목조아미타불좌상(1970년대 사진). 팔성사 제공.
2) 회수한 팔성사 대웅전 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선 후기, 높이 99.2cm. 문화재청 제공.
2) 회수한 팔성사 대웅전 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선 후기, 높이 99.2cm. 문화재청 제공.

1993년 8월27일 새벽 1시 30분에서 3시 사이 전북 장수군 장수읍 용계리 1267번지에 위치한 ‘팔성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 도난됐다(사진1). 이 불상은 인적이 드문 새벽시간 도난되었다가 2016년 10월 서울 한 개인 사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는데 불상의 복장물(腹藏物)만 털린 채 돌아왔다(사진2).

장수 팔성사(八聖寺)는 602년 신라 해공 대사 또는 해감(解橄)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나 관련 자료가 없어 명확하지 않다. 팔성사에 대한 기록은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이 유일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장수현 서남쪽 15리에 성적산(聖迹山)이 있다. 운점사(雲岾寺)는 성적산에 있는데 신라 진평왕이 중수하였으며 원효의 도량이었다. 남북쪽에 만향점(滿香岾)이 있으니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서 불법을 전하면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 조선 세종 때 성주(省珠) 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운점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장수군청이 2010년 발간한 ‘장수군지(長水郡誌)’에 따르면 장수 군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15리, 즉 약 6~7km 떨어진 현재의 팔공산 팔성사가 성적산 운점사에 해당된다. 사찰의 창건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당시에는 성적산 운점사라 불리웠으며 유명한 고승들이 강연을 했던 곳으로 조선 전반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팔성사란 절 이름은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이곳에 머물렀을 때 그의 제자 8명과 함께 각각 암자를 세웠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내암자로는 용탑사, 문수암, 보현암, 수문암, 광명암, 벽계암, 국사암, 팔공암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절이 폐사되면서 암자 중 하나가 지금의 팔성사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8개의 산내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사찰이었다. 다행히 근래에 이르러 혜전 스님이 대웅전을 복원하였고 1991년에는 주지 법륜 스님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 있는 전각은 모두 최근에 세워진 것이며 오래된 유물도 없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을 배치한 삼존불상이 놓여 있는데 이 또한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다(사진3).

3) 현재 봉안된 팔성사 대웅전 목조아미타삼존불상. 팔성사 제공.
3) 현재 봉안된 팔성사 대웅전 목조아미타삼존불상. 팔성사 제공.

회수된 ‘팔성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높이 99.2cm로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이나 다리의 폭이 넓어 안정적이다. 머리의 나발은 뚜렷하지만 육계(肉髻)와 전혀 구분할 수 없고 정상과 중앙의 계주(髻珠) 장식은 원통형과 반원형 모양이다. 얼굴은 넓고 둥근 편으로 눈과 입이 가늘고 얇지만 코끝이 둥글게 처리되어 현세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몸에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식(通肩式) 법의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 위에서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옷주름과 배 앞에서 교차된 법의의 옷자락, 다리 사이에 넓게 펼쳐진 옷자락 등이 특징이다. 가슴을 많이 드러낸 채 수평으로 입은 내의는 간략하게 처리했다. 소매자락은 무릎과 붙어 있고 왼쪽 무릎 위에 표현된 나뭇잎 모양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두 손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는데 무릎 위에 둔 채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댄 아미타불의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다. 손가락이 유난히 가늘고 길게 표현된 것도 특징적이다. 이런 스타일의 불상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조성된 조선 후기 불상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팔성사 아미타불좌상’은 1974년 대웅전이 건립된 후에 암자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하나 법당이 아무리 좁아도 본존불 좌우에 협시보살상을 배치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원래 삼존불상으로 조성되었는데 어떤 사정으로 협시보살상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작은 암자라서 처음부터 단독상만 모셨는지는 알 수 없다. 현 주지 법륜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도난되기 전에 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 ‘강희 2년(康熙二年, 1663년)’이라는 연대가 적혀 있는 조성발원문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조성발원문의 행방이 묘연하여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머리 형태나 얼굴, 착의법과 옷주름 표현 등에서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아마도 복장물을 도난당하지 않았다면, 원봉안처와 조성시기, 조각승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선시대 목조불상은 대부분 몸 안에 복장물이 들어 있다. 부처의 심장을 의미하는 후령통(後鈴筒)을 비롯해 불상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발원 내용과 시주자들, 불상을 제작한 조각승, 각종 물목을 포장한 직물류와 복식, 그리고 경전, 다라니 등의 물건을 말한다. 불상의 복장물은 도난당했을 때 되찾아온 예가 거의 없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2001년 3월22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의 목조삼존불상 중 본존 ‘석가불좌상’과 ‘보현보살좌상’이 도난되었다. 이후 복장물만 없어진 채 불상은 사찰 주변에서 발견되었고 보살상은 택시에 실려 보문사로 돌아왔다. 불상을 훔친 문화재절도범들이 수사망이 좁혀 오고 판로가 막히자 불상만 되돌려주었지만 다행히 불상 도난과정이 CCTV에 찍혀 범인들을 추적해 붙잡고 복장물도 되찾을 수 있었다.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소조삼불상’은 오히려 도난사건으로 인하여 복장에서 나온 고려·조선시대 사경과 목판본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림사 불상의 복장유물은 1986년 9월, 1993년 12월, 1997년 3월 등 세 차례에 걸쳐 도난되었다가 되찾아온 것이다. 높이 3m가 넘는 본존 ‘소조비로자나불상’ 등 뒷면을 드릴과 같은 예리한 도구로 구멍을 뚫은 뒤 불상 내부에 들어 있던 경전과 전적을 훔쳤던 것이다. 복장에서 나온 54권71책의 경전은 대부분 조선 중종 연간(1506~1544년)에 제작된 것이나 1348년 고려 후기에 제작된 중요한 자료인 ‘상지은니대반야경’과 ‘백지금니불경’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불상과 복장 전적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림사 불상의 경전과 전적들은 문화재절도범들이 아니였으면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92호 / 2021년 7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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