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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유와 언어 그리고 논리와 불교

정교한 서양 철학 파사현정할 ‘불교 현대화’ 시급

부처님 가르침과 정면 충돌하는 서양 철학의 수리논리
개인 본질을 수정란서 찾은 크립키 주장 ‘궁여지책’ 불과
연기한 존재 흐름에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기원은 없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사유(思惟)란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다. 뚜렷한 답변 없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문제로, 여러 날을 곰곰이 곱씹게 할 만한 주제다. 그런데 현대분석철학은 이 물음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를 문제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질문이 너무 두루뭉술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답변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유의 본질을 캐려면 뜬구름 잡는 느낌이 드는 사유 또는 사고(思考)를 논하기보다는 그런 사유와 사고를 가능케 하는 개념 체계를 연구해야 길이 트인다. 18세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렇게 시도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우리 언어의 속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한 철학자들이 언어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예를 들어 개인의 고유한 본질과 그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의 엄밀한 관계를 연구했다. 그러면서 언어현상 근저에 있는 철학적 기반을 논리학으로 규명해 내기 시작했다.

현대 수리논리학은 ‘모든 것은 스스로와 동일하다’는 고대로부터의 논리학 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x) (x = x) [(x): 모든 x] 모든 x에 대해, x는 x와 동일하다.

만물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스스로와 동일하게 남아있을 수 없다는 무상(無常)을 가르치는 불교가 받아들이기 꺼려지는 원리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이것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 기반 위에 수리논리학의 체계를 세웠다. 20세기 후반부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능세계에 대한 그들의 형이상학적 견해를 바탕으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x) □ (x = x) [□: 필연적으로] 모든 x에 대해, x는 필연적으로 x와 동일하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말은 ‘모든 가능세계(가능한 상황)에서 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와 동일하다면 모든 것에는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 주는 어떤 불변의 본성, 즉 본질(자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서양인들의 통찰(?)을 미국철학자 크립키가 든 예를 통해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게 배운 적이 없고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지 않은 세계를 상상해 보자. 이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까? 우리의 직관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 수 없다고 판단한다. 비록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적과 하나도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키가 더 크거나 작았을 수 있고, 몸무게가 더 또는 덜 나갔을 수 있고, 직업이 전적으로 달랐을 수 있고, 또 피부색이 더 검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 수 없다 [(x) (x = x)].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어떤 가능한 상황에서도 필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다 [(x) □ (x = x)]. 그런데 이런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필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이게끔 만드는 불변의 본성, 즉 아뜨만이나 자성(自性)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서양철학은 수학을 이용한 논리학으로 이런 형이상학적 주장을 정교하게 체계화해서 제시하고 있는데, 위의 주장이 붓다의 무아(無我)와 대승의 공(空)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 난감하다. 그래도 양상논리(modal logic)가 뒷받침하는 크립키의 견해를 불교적 관점에서 한 번 비판해 보겠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내용-플라톤의 제자이고 알렉산더의 스승이었고 등등-이 단지 그가 우연히 가졌던 속성들이라면, 그를 그이게끔 만드는 필연적인 속성, 즉 그의 본질 또는 자성은 무엇인가?

크립키는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된 그의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에서 개인의 본질을 그의 기원(origin), 즉 수정란(zygote)에서 찾았다. 이 주장은 그의 다른 주장과 달리 별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개인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속성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역사적 기원에서 찾은 것은 많이 엉뚱하다. 공(空)할 수밖에 없는 우리 존재에서 불변의 자성을 찾지 못하다가 궁여지책으로 수정란이라는 물체를 우리 존재의 기원으로 보며 본질로 간주하고 싶었나 보다. 그는 위에서 본 우리 개인의 자기동일성의 필연성[(x) □ (x = x)]을 충족시키는 존재적 근거가 수정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넘을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힌다.

수정란이 우리 존재의 기원이라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존재가 시작될까?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순간이 기원인가, 정자가 난자세포의 외벽을 뚫고 들어가 꼬리가 없어진 때인가, 정자의 핵과 난자의 핵이 융합된 순간인가(정확히 몇 퍼센트 결합되어야 융합된 수정란인가, 50%, 50.1%…99.9%?), 수정란이 세포분화한 후 자궁벽에 착상되기 전까지인가 아니면 착상된 순간인가? 연기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의 흐름에 어느 누구도 임의로 선을 긋고 그곳에 불변의 본성이나 기원을 만들 수는 없다. 수정란을 개인의 기원으로 보는 크립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서양인은 우리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 본질(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믿는다.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로 삶과 세계를 보는 불교와는 너무도 다르다. 그런데 서양인은 수학을 이용한 논리학을 확립하여 그들의 주장을 정교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듬어 나가고 있다. 수리논리학은 이미 컴퓨터로 연산 가능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불자가 서양인의 주장에 대응해야 한다는 답변이 겨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말로 하는 당신들 주장은 모두 헛되고 거짓’이라는 식이라면 서양철학과의 경쟁에서 완패할 수밖에 없다. 불교철학의 현대화가 시급하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92호 / 2021년 7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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