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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⑫ (5)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에로 - 상

중고시대 호국사찰이 중대 이후 왕실 명복 위한 원찰로 변화

통일 이전을 중고불교, 통일 이후 전반기를 중대불교로 구분
신성장소에 지어진 7곳 사찰은 재래신앙 기반 불교수용 흔적
성전이라는 관서 갖춘 중대 사찰 호국에 유교제사 전통 추가

경주 감은사지 전경.
경주 감은사지 전경.

6회에 걸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와 삼국통일 전후 불교변화의 사회적・사상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불교 문제에서 다소 벗어나 불교성립의 외적 조건인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 지배이념의 변화와 유교사상의 수용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당시의 사회적・사상적 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이해를 추구해온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의 사회적・사상적 변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에 상응하는 불교의 변화과정을 규명하려고 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먼저 불교의 가시적인 상징물인 사찰을 검토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하여 사상과 신앙의 해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삼국통일 이전 불교는 불교가 공인되는 23대 법흥왕대(514~540)부터 28대 진덕여왕대(647~654)까지 불교를 말하는데, 이 기간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사를 3기로 구분한 가운데 중간시기인 중고기에 해당된다. 반면 삼국통일 이후 불교는 삼국통일기로 들어가는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 이후의 불교를 말하는데, ‘삼국사기’에서 신라사를 3기로 구분한 가운데 중간시기인 중대(29대 태종무열왕~37대 혜공왕)와 마지막 시기인 하대(37 선덕왕~56대 경순왕)를 합한 시기에 해당된다. 본고에서는 삼국통일 이전 불교를 중고불교, 삼국통일 이후 불교 가운데, 특히 삼국통일기 전반기인 ‘중대’의 불교를 중대불교라고 이름 붙이고,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로의 변화 내용과 불교사적 의의를 살펴보겠다. 먼저 중고불교의 대표사찰로서 이른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옛 가람터 7곳에 세웠다는 7곳의 사찰과 중대불교의 대표 사찰로서 사찰의 관리와 보수를 담당하는 성전(成典)이 설치된 7곳의 사찰을 비교함으로서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로의 불교사적 의의를 추적해 보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조에는 신라의 불교 전래와 공인에 관한 사실을 종합 정리하면서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과 김용행(金用行)의 ‘아도화상비(阿道和尙碑)’ 사이의 내용 차이를 지적하고, ‘계림잡전’을 근거자료로 채택하여 서술하였다. 오늘날 역사학에서도 ‘계림잡전’의 사료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근거로 신라의 초기불교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아도화상비’에는 ‘계림잡전’에 없는 내용으로 전불시대 옛 가람터 7곳에 세워진 사찰을 열거하였다. ‘아도화상비’는 ‘삼국사기’ 이외에도 박인량(1047~1096)의 ‘수이전(殊異傳)’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등의 불교사서에 인용되어 있음을 보아, 고려 때까지 신라 초기불교사의 자료로서 중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아도화상비’가 수립된 시기는 800년대 전후로 추정되기 때문에 7처 가람설도 그 무렵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경주의 옛 가람터 7곳의 사찰은 첫째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의 흥륜사(興輪寺), 둘째 삼천기(三川岐)의 영흥사(永興寺), 셋째 용궁(龍宮) 남쪽의 황룡사(皇龍寺), 넷째 용궁 북쪽의 분황사(芬皇寺), 다섯째 사천미(沙川尾)의 영묘사(靈廟寺), 여섯째 신유림(神遊林)의 사천왕사(四天王寺), 일곱째 서청전(婿請田)의 담엄사(曇嚴寺) 등이다. 주목되는 것은 7개 사찰 자리의 명칭으로 보아 재래신앙의 신성한 장소에 새로 전래된 불교의 사찰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재래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불교가 수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에 7곳이 전불시대의 절터였다는 의미는 과거 7불의 전승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7곳의 사찰이 모두 역대 국왕이 주도하여 설립한 왕실사원이었다는 점이다. 신라 최초 사찰인 흥륜사는 23대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사찰을 건립하면서 자신의 왕호는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사찰이름은 처음에는 대왕사(大王寺), 준공 뒤에는 대왕흥륜사로 이름하면서 중앙집권국가의 제왕으로서 권위를 과시하였다. 또한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은 비구니 사찰로서 영흥사를 창건하고, 말년에 출가하였으며, 다음 진흥왕비 사도부인(思道夫人)도 출가하여 영흥사에 주석함으로서 왕실 출신 비구니 사찰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음 24대 진흥왕대의 황룡사는 왕궁을 짓던 자리에 사찰을 건립하고 장륙존상을 조성하여 위대한 정복군주로서의 전륜성왕 설화를 성립시키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다음 27대 선덕여왕대는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종교적 신성의 상징물로서 분황사와 영묘사를 창건하고 여왕의 무격적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였으며, 황룡사에 9층목탑을 조성하여 호국의 상징물로 삼았다. 그리고 황룡사의 사주는 진골귀족에서 선임하여 국통으로 삼아 불교교단을 통솔케 하였다. 그리고 7처의 가람 가운데 최후에 설립된 사천왕사는 30대 문무왕대 밀교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으로 당군의 격퇴를 기원한 사찰이었다. 사천왕사의 설립 시기는 중대인 문무왕대이었지만, 호국 사찰로서의 역할과 문두루비법을 행한 명랑이 중고불교의 완성자로 평가되는 자장의 생질이었던 점은 중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사찰이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로써 7처 가람 가운데 사찰의 창건시기와 창건자를 알 수 없는 담엄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6처 가람은 모두 왕권강화와 국가정신의 수립에 기여하는 왕실불교・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사찰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대의 혜량, 그리고 선덕여왕대의 안함과 자장이 ‘중고불교’의 대표적인 승려였다. 그러나 진평왕대 중국 유학의 선구자로서 세속5계와 같은 새로운 윤리덕목을 제시한 바 있는 원광과 같이 다른 입장을 보여준 승려도 없지는 않았다. 원광이 고구려를 쳐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써달라는 진평왕의 요청에 대하여,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의 행동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호국적인 불교에 대하여 회의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는데, ‘중고불교’의 흐름에서는 다소 벗어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승려 사이의 입장 차이는 전자가 북조불교의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을 받아들였던 데 비해 후자는 정치와 거리를 두려했던 귀족적 성격의 남조불교 영향을 받았던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한편 중대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이라 할 수 있는 성전(成典)이 설치되었던 7개의 사찰은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즉 ‘삼국사기’ 직관지에 상급의 중앙행정관서들 가운데 7개 사찰의 성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사찰은 사천왕사・봉성사(奉聖寺)・감은사(感恩寺)・봉덕사(奉德寺)・봉은사(奉恩寺)・영묘사・영흥사 등이다. 그런데 1966년 도굴꾼에 의해 알려진 황룡사 9층목탑의 사리함기(찰주본기)에 의하여 황룡사에도 성전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확인됨으로서 7개 사찰 이외에도 성전이 설치된 사찰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황룡사를 포함하여 8개 사찰은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룹은 사천왕사・영묘사・영흥사・황룡사 등 4개 사찰이고, 둘째 그룹은 봉성사・감은사・봉덕사・봉은사 등 4개 사찰이다. 첫째 그룹에 속하는 사찰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두 전불시대의 7처 가람터에 세웠던 사찰이라는 점에서 중고불교가 그대로 이어진 것을 의미한다. 반면 둘째 그룹에 속하는 사찰은 모두 중대인 30대 문무왕대부터 36대 혜공왕대 사이에 새로 창건된 사찰로서 선대 국왕의 은덕에 감사하거나 받든다는 의미의 사찰 이름으로 보아 봉사기관(奉祀機關)의 역할을 하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봉은사가 진지대왕사(眞智大王寺)라고도 불리어졌다는 사실을 보아 중대왕실의 직계 조상인 25대 진지왕의 추복지소(追福之所)로 세워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3개 사찰도 중대왕실의 원찰로서 조상숭배관념이 이례적으로 고조되었던 분위기에서 건립된 것으로 본다. 

이로써 중고불교 산물인 전불시대 7처 가람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식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세워진 호국사찰이었음에 비하여, 봉성사 등 4개 사찰은 중대왕실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대에 사찰의 관리와 보수를 위해 성전이라는 행정관서를 설치한 사찰 가운데 7처 가람터에 세운 사찰이 4개나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중고불고의 호국불교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의미한다. 중대불교는 중고불교의 호국불교적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중대왕실의 조상숭배관념이 새롭게 추가됨으로서 이중성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대불교의 새로운 조상숭배관념의 대두는 시조와 직계 4조를 제사하는 유교적인 오묘제(五廟制)가 성립되었던 사실과 궤도를 같이 한다. 

중대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에 설치된 성전이라는 관서는 관직체계가 금하신(衿荷臣)・상당(上堂)・적위(赤位)・청위(靑位)・사(史) 또는 황위(黃位) 등 5단계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집사부를 비롯한 상급 중앙행정관서의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를 기본으로 하는 5단계 조직과 같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성전사원 가운데 영묘사의 성전에는 장관직인 금하신이 설치되지 않았고, 비구니 사찰인 영흥사의 성전에는 장관직인 금하신과 차관직인 상당이 설치되지 않았던 것을 보아 사찰의 격이 다소 낮았으나, 디른 사찰의 성전은 상급의 중앙행정관서로서의 위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7년(771)에 조성된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명’에는 주종사업을 주관하였던 인물들 가운데 최고 책임자였던 김옹(金邕)의 직함이 “검교사(檢校使) 병부령(兵部令) 겸(兼)전중령(殿中令) 사어부령(司馭府令) 수성부령(修城府令) 감사천왕사부령(監四天王寺府令) 병(幷) 검교진지대왕사사(檢校眞智大王寺使) 상상(上相) 대각간(大角干)”이었고, 다음 책임자인 김양상(金良相)의 직함이 “검교사(檢校使) 숙정대령(肅正臺令) 겸(兼)수성부령(修城府令)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 각간(角干)” 이었음을 보아 성전의 장관은 당시 최고의 권력자로서 다른 관서의 장관직 여럿을 겸직하였고, 특히 내성(內省)의 장관인 전중령을 겸직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내성의 장관인 전중령의 원래 이름은 사신(私臣)이었는데, 내성은 원래 진평왕 44년(622) 대궁・양궁・사량궁 3궁을 통합 관리를 위하여 설치된 궁정관서로서 권력의 핵심관부의 하나였다. 더욱 장관인 사신은 또 다른 권력부서인 병부령을 겸직할 수 있어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신이 성전의 장관직도 겸직한 것은 내성의 장관, 나아가 내성을 매개로 국왕이 실제 사찰을 관리하였음을 의미한다. 중고불교는 황룡사 같은 주요 사찰의 주지가 국통이 되어 불교교단을 통솔하는 체제였다면, 중대불교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속인 관리인 내성의 사신이 성전의 장관을 겸직하고 불교사찰, 나아가 불교교단을 통제하는 체제로 변하였다. 삼국통일 뒤 중대에 들어와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 같은 불교통제기관을 강화하고, 불교사찰에 재화(財貨)와 전지(田地)의 기진을 금하는 조치를 내리고 있었던 바와 같이 국가에 의한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가 크게 강화되고 있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93호 / 2021년 7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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