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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병동에서 써내려간 사색과 성찰의 구도기

  • 출판
  • 입력 2021.07.16 10:48
  • 수정 2021.07.17 06:25
  • 호수 1594
  • 댓글 2

그리운 173
승한 스님 지음 / 문연 / 156쪽 / 1만5000원

유전적·환경적 영향 등으로 조울증 앓은 스님이 쓴 연작시집
상처로 얼룩진 공간에서 아픈 내면의 목소리 경청하고 수용
“극도의 상황서도 인간 정신이 형형하게 살아 있음을 목격”

승한 스님에게 조울증은 더 이상 달갑지 않은 손님이 아니다. 자신과 세상을 들여다보게 하고, 더 겸허하고 더 인간적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돌이키도록 이끄는 ‘그리운’ 도반이다.
승한 스님에게 조울증은 더 이상 달갑지 않은 손님이 아니다. 자신과 세상을 들여다보게 하고, 더 겸허하고 더 인간적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돌이키도록 이끄는 ‘그리운’ 도반이다.

‘상처도 없이 아픈 사람들이 있다/ 상처도 없이 아픈 발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상처도 없이 아픈 병동을 아프게 걷는 사람들이 있다/…상처가 무심으로 바뀌는 집/ 밤이 낮으로 바뀌는 집/ 낮이 밤으로 바뀌는 집/ 상처 없는 몸을/ 상처 있는 몸으로 치료받고 있는 집…’(‘173폐쇄병동-상처’ 부분)

폐쇄병동은 편견과 모순의 공간이다. 도저히 어찌 못할 내면의 상처에서 오는 극심한 고통,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자의적 기준 아래 강요되는 철저한 고립,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는 두려움, 외형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더 아픈 자괴감까지 얽혀있다.

승한 스님의 ‘그리운 173’은 정신병원 폐쇄병동을 소재로 쓴 62편의 연작시집이다. 표제의 ‘173’은 스님이 입원했던 서울 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 명칭이다. 자신의 체험을 시로 써내려간 이 책은 비밀스런 투병기이며, 사색과 성찰의 구도기이기도 하다.

스님에게 감정장애는 달갑지 않은 오랜 동반자였다. 7남매 맏이였던 스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 영향으로 시인을 꿈꾸었고, 도내 백일장에서 상도 여럿 받은 꼬마 시인이었다. 양극성장애(조울증)는 어머니에게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아픔'이었다. 일찍 치료했더라면 쉽게 나을 수 있었겠지만 시골이라는 특성으로 인한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병은 점차 깊어졌다. 불쑥 폭풍처럼 밀려드는 우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그저 자신의 나약함 탓으로 돌려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첫 자살시도, 며칠 만에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감정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 일쑤였다.

국문학과 입학, 운동권, 강제 군입대, 신문춘예 당선, 신문기자, ‘문학과 경계’ 발행인 등등. 몸과 마음이 괴로울수록 일에 몰두하려 애썼고, 뚜렷한 성과와 명성도 얻었다.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없을 때에 이르러 병원을 찾았다. 그때 자신이 심각한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때까지 왜 그토록 괴로웠는지가 비로소 이해됐다. 아프고 썩어가는 치아를 그대로 둔다고 낫지 않는다. 양극성장애 또한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낫는 성질의 병이 아니었다. 훗날 양극성장애가 재발했을 때는 생명을 위협하는 심한 증상에만 사용한다는 전기경련요법(ECT)까지 받아야 했다.

스님은 2010년 늦깎이로 산문에 들었다. 대학생 때 출가하겠다고 큰절에서 행자까지 지냈지만 부득이 포기해야 했었다. 젊은 시절엔 치기가 아예 없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상일을 내려놓고 진리의 길을 걷겠다는 결연한 다짐이었으며, 어쩌면 생존과 직결된다는 절박감도 있었을 듯싶다. 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은 스님은 몇 해 뒤 전법에 뜻을 세우고 도심포교를 시작했다. 불교가 좋아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왔기에 온 힘을 다해 포교에 매진했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흐른 2017년 여름이었다. 해묵은 내면의 상처가 다시 도졌다. 극심한 자살 충동이 몰려오더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땀이 흐르고 숨 한번 내쉬기 버거웠다. 출가자인 자신이 이러다 큰일 내겠다 싶었다. 급히 엠뷸런스를 불렀고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날 스님은 스스로를 폐쇄병동에 감금시켰다. 치료를 위한 막다른 선택이었다. 그렇더라도 24시간 감시와 순종을 요구하는 막힌 공간에서의 생활은 크나큰 고통이었다. 허나 그곳에서도 스님은 수행자였다. 아픈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성찰하며 받아들이려 무던히 노력했다.

‘자폐의 시간이 시작되면서 나는 나를 읽기 시작했다/ 특별한 목적과 일정한 주제는 없었다/ 폐쇄의 시간에 대한 나의 혈관을 읽고 폐쇄의 시간에 대한 나의 심장을 읽었다/…폐쇄병동에서 내 자폐의 시간은 이미 고전이다/ 출구도 없이 다섯 번째 읽는 삼국유사다/ 그 안에 내 신(身)·구(口)·의(意) 삼국이 산다’(‘173폐쇄병동-나를 읽는 시간’ 부분)

‘상처도 없이 아픈 사람’은 스님뿐이 아니었다. 세 살 때 자신을 떼어놓고 필리핀으로 가버린 엄마 생각에 젊은 여자만 보면 쫓아가는 황군, 콘크리트공사를 하다가 떨어진 이후 생긴 두려움증에 2층 월세 집에도 못 올라가는 콘크리트공 강씨, 아버지 파묘를 한 뒤 헛것이 보이고 세상이 무섭다는 이씨, 시청 직원에게 손수레를 안 빼앗기려고 버티다 뒤로 크게 넘어진 뒤 제복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린다는 유씨 등. 폐쇄병동은 여리기에 더 견디기 어려운 충격과 공포로 인해 온갖 트라우마로 얼룩진 상처 입은 사람들의 서러운 사바세계였다.

문태준 시인은 “아, 이 시편들은 한 편 한 편이 아프고 격렬하다. 고성(高聲)으로 몰아쳐가며 읽는 불경 같다. 그러나 시심의 결이 곱고 여리기도 하여 우리는 이 시편들 속에서 ‘오른쪽 뺨에 고이는 볼우물’과 같은 애틋함과 순수, 사랑을 함께 발견한다”고 찬탄했다. 황치복 문학평론가도 “시집을 읽는 내내 독자들은 가슴 아린 통증을 느끼면서도 극단의 폐쇄적 공간에서도, 그리고 극도로 고독한 상황에서도 깨달음을 향한 인간의 정신이 형형하게 살아 있음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 시집은 승한 스님이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에게 보내는 헌시이며 자기고백이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꾹꾹 누르고 살았던 긴 세월. 이제 양극성장애는 더 이상 스님에게 달갑지 않은 손님이 아니다. 자신과 세상을 들여다보게 하고, 더 겸허하고 더 인간적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돌이키도록 이끄는 ‘그리운’ 도반이다.

‘둘둘 말아 올린 저 흰 머리카락들을/ 부처님의 나발(螺髮)이라고 해도 좋겠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적멸이라고 해도 좋겠다/ 수좌 생활 3개월/ 내 머리카락에도 나발이 부쩍 늘었다’(‘173 폐쇄병동-목련’ 전문)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94호 / 2021년 7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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