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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죽여도 죽지 않는 스님들

칼에도 맹수에도 독에도 죽지 않으니 마침내 폭군이 무릎 꿇다

고구려에 불교 전한 담시 스님, 혁련발발이 죽이려 했으나 실패
북위 태무제 폐불 때 죽었던 현고 스님은 되살아나 제자들 상견
조정·귀족들 희롱한 법상 스님은 맹독 연거푸 마시고도 멀쩡해

사람 목숨은 고래심줄처럼 질긴 듯싶지만 동시에 허망할 정도로 가볍다. 우리 피부는 날카로운 쇠붙이 앞에 잘려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고, 뱃속은 독성 강한 이물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출가자 실천규범인 율장에서 무기를 지닌 이와 함께 가거나 그에게 법을 설하는 것조차 금지한 것은 무기의 위험성과 불교의 비폭력 정신을 잘 보여준다.

옛 스님들 일대기를 다룬 역사서에는 전법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스님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에 ‘오랑캐의 것’이라는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에 무수한 시련이 있었고, 순교 또한 불가피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승들 일대기에서는 의외의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폭군의 칼과 독에 죽지 않을뿐더러 분명히 죽었지만 환생하는 신이한 현상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동진(東晉)의 담시(曇始, 혹은 惠始) 스님이 대표적이다. 담시 스님은 한반도 불교 전래와 깊이 관련된 고승이다. 흔히 ‘삼국사기’의 ‘진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파견해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는 기록에 근거해 고구려 불교는 순도 스님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양고승전’ ‘해동고승전’ ‘법원주림’ ‘삼국유사’를 비롯해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비’에서도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한 인물이 담시 스님으로 기록돼 있다. 진나라 효무제 태원 연간(376~396) 말엽에 경전과 율장 수십 부를 갖고 요동지역으로 불법을 전파하러 갔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가 처음 부처님 가르침을 듣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담시 스님은 많은 이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은 발이 얼굴보다 더 하얗고 맨발로 진흙탕을 건너더라도 흙물이 발에 달라붙지 않는다고 해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 불렸다.

스님이 고구려에서 돌아와 장안에 머물 때였다. 왕호(王胡)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삼촌이 죽은 지 몇 해 후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 왕호를 데리고 지옥을 두루 유람하며 여러 과보를 보여주었다. 삼촌은 왕호에게 “이제 인과를 알았을 것이니 반드시 백족화상을 받들어 모셔야한다”고 당부했다. 깜짝 놀란 왕호는 백족화상을 만나기 위해 여러 승단과 사찰을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담시 스님을 보게 되자 곧바로 이 분이라고 확신했고 그를 지극히 섬겼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장안 사람들은 스님을 더욱 존경했다.

당시는 전란의 시대였다. 진나라 말 북방 흉노 출신으로 하(夏)의 세조인 혁련발발(赫連勃勃, 381~425)이 장안을 점령했을 때다. 성정이 잔인했던 그는 장안의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승속을 가리지 않았으며 사람들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담시 스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병사가 스님을 향해 힘껏 칼을 내리쳤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스님이 병사의 칼날을 맞았지만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눈을 의심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그들은 스님을 혁련발발에게로 데리고 갔다. 병사들의 말을 전해들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보검을 꺼내 직접 스님을 향해 수차례 칼을 휘둘렀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보검은 스님에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했다. 스님은 혁련발발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두려움이 혁련발발을 사로잡았다. 자칫 자신이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용서를 빌었고, 갇혀 있던 스님들을 서둘러 사면했다.

포악한 하(夏)를 무너뜨린 것은 북위 태무제였다. 그는 427년 혁련발발의 아들 혁련창을 무너뜨리고 북연(北燕)과 북량(北涼)을 점령해 북방을 통일했다. 북위는 호불 황제들이 많았으나 태무제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에 정착해 성장해나가던 불교로서는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도교를 펼치려 했던 구겸지와 유교로 문벌체제의 복권을 꿈꾸었던 최호가 태무제의 측근이 되면서 불교 탄압이 본격화됐다. 태무제는 438년 승려 연령이 50세 이하면 모두 환속시켰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불교계를 옥죄더니 446년에는 “지금 이후로 호신(胡神, 부처)을 받들거나 형상을 만드는 자가 있으면 가문을 주살한다.…모든 불상을 파괴하고 불경은 태우며, 사문은 나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 파묻어라”는 잔인무도한 조칙을 내렸다. 이는 불교의 말살을 의미했다. 수많은 스님들이 목숨을 잃었고 사찰들이 폐허가 됐다.

‘양고승전’에는 이때 다시 담시 스님이 등장한다. 혁련발발이 그랬듯 태무제는 병사들을 시켜 스님의 목을 여러 차례 베게 했으나 끔쩍도 않았다. 자신이 직접 나서 베었지만 검이 닿은 곳에 실과 같은 희미한 흔적이 있었을 뿐이다. 태무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궁전 북원(北園)의 호랑이 우리에 스님을 집어넣도록 했다. 그런데 호랑이들이 스님을 보더니 모두 숨고 엎드려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상하다 싶어 일관을 우리 가까이에 보냈더니 호랑이들이 포효하고 으르렁거렸다. 태무제는 비로소 부처님의 위대함을 알고 담시 스님을 초청해 발밑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자신의 죄와 잘못을 뉘우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고승전’의 내용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위서(魏書)’의 ‘석로지(釋老志)’에도 담시 스님의 행적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혁련발발이 담시 스님을 죽이려 했으나 죽지 않았다는 것은 동일하다. 이후 얘기는 달리진다. 스님은 북위가 북방을 통일한 후 7~8년간 평성에 가서 백성들을 교화했다. 이곳에서 많은 신이를 보였으며 태연(太延) 연간(435~439)에 팔각사(八角寺)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또 445년 담시 스님의 시신을 재매장할 때 6000여명이 전송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돼 있다.

담시 스님이 입적한 태연 연간이면 태무제가 본격적인 불교탄압에 착수하기 전이다. 태무제가 직접 담시 스님을 칼로 내려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오히려 태무제는 담시 스님을 중히 여겨 예경을 다했으며, 태무제의 폐불사건 때에도 담시 스님의 묘는 파괴되지 않았다. 문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담시 스님이 신이승(神異僧)으로 유명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고승들의 신이한 죽음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진실’을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림은 김홍도의 산사귀승도(山寺歸僧圖).
고승들의 신이한 죽음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진실’을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림은 김홍도의 산사귀승도(山寺歸僧圖).

담시 스님과 동시대 인물인 현고(玄高, 402~444) 스님도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수백 명의 문도들을 이끌었던 출중한 지도자였으며, 태자의 스승이었다. 9살 때 부모를 설득해 산문에 든 그는 다음해 부태발타(浮䭾跋陀)라는 서역 스님이 선법(禪法)을 펼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갔다. 불과 열흘 만에 오묘한 이치를 체득해 부태발타로부터 찬사와 인가를 받은 스님은 맥적산에 은거했다. 이 무렵 현고 스님에게서 공부하는 수행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스님은 인연 따라 이십여 년간을 유행하며 수많은 사람을 교화했다. 그의 명성이 퍼져나가 30대에 명실상부한 서북 지역 ‘선학의 종사’로 일컬어졌다.

북위 태무제가 양(涼)을 무너뜨렸을 때 외삼촌인 양평왕은 현고 스님을 청해 평성에서 법을 펼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태무제의 태자 황(晃)도 현고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극히 섬겼다. 황은 부왕 태무제가 구겸지 등의 거짓된 말로 자신이 모반을 일으킬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얘기를 털어놨다. 이에 현고 스님이 7일간의 금광명재(金光明齋)를 열었고, 그것을 마쳤을 때 태무제 꿈에 조부와 부친이 등장해 태자를 의심하지 말라고 엄히 꾸짖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황은 태무제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폐불을 종용했던 최호와 구겸지는 좌불안석이었다.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자신들의 운명도 끝이 날 게 분명했다. 이들은 태자의 스승인 현고 스님을 지속적으로 음해했고, 그를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왕을 꾀었다. 결국 의심이 깊어진 태무제는 444년 9월초 현고 스님을 가둘 것을 명하고 그달 15일 사형을 집행했다. 스님의 나이 43세였다.

‘양고승전’에는 죽음을 전후해 일어났던 일이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사형 당일 저녁 현고 스님이 홀연히 나타나 자신이 주석하던 절의 탑 주위를 세 바퀴 돈 뒤 제자들을 향해 “나는 이미 갔다”고 말했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스승이 입적했음을 알고 통곡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운송해 목욕시킨 뒤 빈소를 마련했다. 이때 뒤늦게 도착한 현창(玄暢)이라는 제자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불법은 이제 멸했다. 불법을 부흥시키는 것보다 우리는 스승께서 일어나 앉으시기를 청해야 한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죽었던 현고 스님이 눈을 뜨고 일어나 앉더니 말했다. “불법의 나타남은 인연 성쇠를 따라간다. 인연 성쇠는 자취가 남으나 진리는 항상 담연하다. 다만 그대들 대부분 나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 안타깝구나. 허나 그대들이 죽은 후에 불법은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니 스스로 마음을 잘 닦고 후회해서는 안 될 일이다.” 현고 스님은 말을 마치고 눕자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부활한 현고 스님의 예언대로 폐불의 광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구겸지는 폐불 조칙 2년 뒤인 448년 사망했고, 최호도 450년 북위의 선조들을 비난하는 글을 사서에 남겨 태무제의 의해 죽임을 당했다. 뒤늦게 폐불을 후회하던 태무제 자신도 2년 뒤 환관에게 비참하게 살해됐다. 북위 폐불은 그렇게 6년 만에 막을 내렸다. 태무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문성제가 곧바로 폐불 정책 중단을 선언하면서 새로운 불교 중흥의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진(晋)나라 법상(法相) 스님도 신이한 인물로 꼽힌다. 스님이 태산의 깊은 산중에서 정진할 때였다. 산의 이곳저곳을 다녔고 해가 지면 간혹 신묘(神廟) 옆에서 유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검은 옷의 무인이 나타나 석함을 열게 했는데 그 안에 엄청난 보물이 있었다. 스님은 이를 꺼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고, 자신은 월성사라는 곳에 머물며 무애행의 삶을 살았다. 율에 매이지 않았으며 배우처럼 우스갯짓도 서슴지 않았다. 때로는 벌거벗은 채로 조정의 귀족들을 희롱했다고 하니 집권층으로서는 몹시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장군 사마염이 스님을 불러 짐독(鴆毒)이라는 독약을 먹였다. 한 방울이면 황소가 쓰러진다는 사나운 맹독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끄덕도 않았고 장군은 다시 몇 잔을 더 먹도록 했다. 마찬가지였다. 스님의 기운이 맑고 눈빛이 평온해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 더 이상 해칠 생각을 못했다. 스님은 진의 원흥(元興) 연간(402~404) 말기에 이르러 세상을 마쳤으며 나이는 80세였다고 전한다.

오늘날 죽이려 해도 죽지 않았다는 스님들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 기록들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허망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얘기들 속에는 전란의 시대에 훌륭한 많은 스님들이 속절없이 죽어야 했다는 것, 죽음 앞에서 끝까지 의연하고 당당했다는 것, 신이한 고승이 나약한 백성들을 대신해 포악한 군주를 응징했으면 하는 바람, 훗날 또 다른 폭군이 죽지 않는 신이승이 있음을 기억해 함부로 훼불하지 못했으면 하는 염원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는 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 자신을 죽이려는 왜왕의 온갖 술책을 법력으로 타파해 그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하고 조선 사람들을 구해왔다는 ‘임진록’ 얘기와 비슷할 수 있다. 일본에서 조선인을 송환해온 것이 ‘사실’이라면, 임진왜란을 겪으며 형성된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적 자긍심이 담겨 있다는 것은 ‘진실’일 수 있다. 고승들의 신이한 죽음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진실’을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94호 / 2021년 7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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