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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⑬ (5)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에로 - 중

선종사찰 잇따라 개창하자, 신라왕실 중앙대찰 통해 관리

황룡사·흥륜사 등 대표 호국 사찰 중대시대 성전사찰에서 제외
신라말기 위상 다시 높아져 주통과 군통 파견…지방 사찰 관리
황룡사, 9층탑 중수기로 확인…흥륜사, 대표 10성 소조상 안치

사적 15호 경주 흥륜사지. 절터가 일부만 남아있고 나머지 터에는 새롭게 지어진 흥륜사가 자리잡고 있다.
사적 15호 경주 흥륜사지. 절터가 일부만 남아있고 나머지 터에는 새롭게 지어진 흥륜사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호에서 이른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에 세운 7개 사찰과 성전(成典)이 설치된 7개 사찰의 비교를 통해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로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 결과 삼국통일 뒤 중대불교는 중고불교의 왕실불교 성격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호국불교적인 성격이 다소 퇴색되는 대신 선대 국왕을 추모하는 제사기능이 추가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중고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흥륜사・황룡사・분황사・담엄사 등 4개 사찰이 중대불교의 성전사원에서는 제외되었고, 그 반면에 선대왕의 은덕에 감사하거나 추모하는 봉사기관(奉祀機關)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찰, 곧 중대 국왕의 원찰로서의 성격을 가졌던 감은사・봉성사・봉덕사・봉은사 등 4개 사찰이 성전사원에 새로 추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른바 전불시대의 가람터에 세운 사찰 가운데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열거한 7개의 성전사원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로서 신라말기에 위상이 다시 크게 높아져서 성전이 설치된 황룡사, 그리고 신라 최초 대왕의 사찰로서 신라 불교역사의 근원을 상징하는 흥륜사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황룡사는 48대 경문왕 12년(872)에 9층목탑을 중수하면서 조성한 ‘사리함기(舍利函記)’에 중수공사를 담당하는 성전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확인됨으로서 ‘삼국사기’ 직관지에 열거된 7개 성전사원은 주로 중대 당시 설치되어 있던 사원들에 한정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황룡사는 중고시기에 창건된 신라의 중심사찰로서 중대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중고시기에 조성된 장륙존상과 9층목탑 이외에 중대말기인 경덕왕 13년(754)에 대종을 주조하였는데, 대종의 길이가 1장3촌, 두께가 9촌, 중량이 49만7581근에 달하는 신라 범종 최대의 크기였다. 황룡사 대종보다 16년 뒤늦은 혜공왕 6년(770)에 성덕왕을 위하여 조성한 봉덕사 대종 중량이 12만근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경문왕 12년(872)에 조성된 9층목탑의 ‘사리함기’에는 9층탑 중수를 담당했던 관부로서 성전의 조직과 인원을 적기하였는데, 금하신(衿荷臣,監脩成塔事) 1인, 상당(上堂) 2인, 적위(赤位) 1인, 청위(靑位) 4인, 황위(黃位) 4인 등 합계 12인으로 여타 성전의 인원 4~11인에 비하여 큰 조직의 규모였다. 그밖에도 도감전(道監典) 소속으로 전국통 혜흥(惠興) 이하 16명의 승려, 속감전(俗監典) 소속으로 패강진도호 김견기(金堅其) 이하 5명의 관리, 기타 황룡사의 대유나(大維那)를 비롯해 조성공사에 참여한 22명의 승속 인물 이름이 열거되어 있을 정도로 국력을 기울인 불사였다. 또한 황룡사는 중대말기부터 불교계에서 위상이 다시 높아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경기도 안양사지의 ‘중초사지당간지주명문’에 의하면, 42대 흥덕왕 2년(826) 당간지주를 조성할 때 참여했던 승려의 이름을 열거하였는데, 제일 앞에 최고의 책임자로 주통(州統)인 황룡사의 항창(恒昌)화상을 들고 있었음을 보아 한주(漢州)의 불교계를 총괄하는 주통으로 황룡사의 승려가 파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27대 선덕여왕 당시 황룡사의 사주는 국통이 되어 전국의 불교계를 통솔한 바 있었는데, 하대에 해당하는 9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황룡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주통과 군통(郡統)의 파견을 통하여 전국의 불교계를 관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50대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찬술한 쌍계사의 ‘진감선사탑비문’에 의하면, 44대 민애왕 1년(838)에 선종 승려인 진감선사에게 혜소(慧昭)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가 주석한 옥천사(뒤의 쌍계사)를 ‘대황룡사’에 관적(貫籍)시키도록 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황룡사에 관적시켰다는 것은 곧 황룡사에 예속시켜 관리케 하였다는 의미이다. 9세기 중반 당에 유학해 실천불교인 선종을 전수받아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산문(山門)을 경쟁적으로 개창하고 있던 불교계 변화에 대응하여 신라 왕실은 중앙대찰을 통하여 관리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황룡사가 중심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전국 불교교단이나 사찰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과 가까운 중앙의 대찰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계 변화에 상응하여 황룡사가 신라불교의 중심사찰로서 다시 부상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흥륜사도 황룡사에 버금하는 사찰로서 중요한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51대 진성여왕 4년(890) 이후에 최치원이 찬술한 성주사지의 ‘낭혜화상탑비문’에 의하면, 46대 문성왕대(839~857)에 낭혜화상 무염이 보령 지방의 작은 사찰에 주석하여 크게 중창하자, 문성왕이 사찰 이름을 성주사(聖住寺)로 바꾸게 하고 ‘대흥륜사’에 편록(編錄)시키도록 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편록(編錄)시켰다는 것은 곧 흥륜사에 등록시켜 관리케 하였다는 의미이다. 앞서 쌍계사를 대황룡사에 관적(貫籍)시켰다는 것과 같은 취지이다. 당시의 금석문에서 흥륜사도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사찰 이름 앞에 특히 ‘대(大)’자를 붙이고 있었던 것은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그에 예속된 지방의 사찰들을 관리하고 있던 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흥륜사는 불교를 처음 공인하던 23대 법흥왕과 24대 진흥왕대에 이어 8세기말부터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데, ‘삼국유사’ 권5 김현감호조의 호원사(虎願寺)의 연기설화에 등장하는 흥륜사가 그 한 예이다. 이 설화는 신라의 풍속에 매년 2월이 되면 초여드렛날부터 보름날까지 서울의 남녀들이 서로 다투어 흥륜사의 전탑(殿塔)을 도는 것으로 복을 비는 모임(福會)이 있었는데, 38대 원성왕대(785~798) 김현(金現)이라는 귀공자가 흥륜사의 탑돌이에 참여하였다가 호랑이를 감동시켜 복을 받고, 그 보은으로 호원사라는 절을 지어줬다는 내용이다. 김현이 죽음을 앞두고 이 사실을 기록하여 논호림(論虎林)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 이 설화는 뒤에 널리 전파되어 고려시대의 ‘삼국유사’ 이외에도 최자의 ‘보한집’ 하권 변산노승전(辺山老僧傳)에서, 그리고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에는 ‘논호수(論虎藪)’라는 제목의 비슷한 유형의 설화로서 전해지고 있었다.

신라말기 흥륜사가 다시 주목을 받았던 사실을 전하는 설화로는 보현보살의 벽화조성연기를 들 수 있다. ‘삼국유사’ 권3 흥륜사벽화보현조에서는 54대 경명왕대(917~924)에 흥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廊廡)가 불에 탔으나 아직 수리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정화(靖和)와 홍계(弘繼) 두 승려가 그것을 중수하고자 모연(募緣)을 하고 있었다. 정명 7년(921) 신사 5월15일에 제석천(帝釋天)이 하강하는 이적을 보이자, 감동한 나라 사람들의 열성적인 시주로 며칠 만에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제석천의 권유로 벽 사이에 보현보살의 화상을 그려 모시게 되었다는 내용의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흥륜사의 중수 및 보현보살의 벽화조성 연기설화를 통하여 흥륜사는 신라말기까지도 호법신인 제석천이 옹호하고 보살피는 신성한 사찰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륜사는 불교의 공인과 동시에 창건되어 법흥왕의 왕권강화를 상징하는 ‘대왕사(大王寺)’, 또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로 불린 사찰로서 중고시기의 왕실불교와 미륵신앙 근본도량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삼국통일 이후에는 성전사원에서 제외됨으로서 위상이 다소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었다. 그러나 9세기 이후에는 황룡사와 함께 다시 신라불교의 중심도량으로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흥륜사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 주요한 계기는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10성(十聖)의 소조상(塑造像)을 금당에 안치한 불사였다. ‘삼국유사’ 흥법편에는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이라는 제목아래 “동쪽 벽에 앉아 서쪽으로 향한 소상은 아도(阿道)・염촉(厭髑)・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고, 서쪽 벽에 앉아 동쪽으로 향한 소상은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라고 하여 소상으로 조성해 금당의 죄우 벽에 안치한 10인의 성인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그런데 제목을 제외한 본문이 겨우 2줄에 불과하며, 그나마 한 마디의 서술적인 문자도 없이 오직 금당에 소상으로 안치된 좌향(坐向)과 10성(十聖)의 이름만을 열거해 놓았을 뿐이었기 때문에 10성의 선정 사유와 열거 순서의 의미, 그리고 흥륜사의 금당에 안치하게 된 연유나 시기 등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이(紀異)・흥법(興法)・의해(義解) 등 다른 편에서 10성 각자의 행적을 독립된 제목을 붙여 서술해 주었기 때문에 각 인물의 활약시기와 불교사적 위치, 그리고 10성으로 선정된 이유는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서 10성 각자에 해당되는 편목의 이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흥법 제3 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阿道基羅). 원종은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은 순교하다(原宗興法 厭髑滅身).
의해 제5 혜숙과 혜공은 속세를 같이 하다(二惠同塵).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慈藏定律). 원효는 얽매이지 않다(元曉不羈). 의상이 화엄교를 전하다(義湘傳敎). 사복이 말하지 않다(蛇福不言).
기이 제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

이상 10성 가운데 안함 1인만은 해당되는 편목이 결여되어 있는데, 다행히 ‘해동고승전’ 안함전으로 보충이 가능하다. 10성 각 인물의 활동시기를 보면 제일 앞선 시기의 인물은 불교를 처음 공인한 법흥왕대(514~540)의 아도와 염촉이고, 제일 늦은 시기의 인물은 중대불교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덕왕대(742~765)의 표훈이기 때문에 결국 10성은 중고와 중대 두 시기를 합한 200여 년간의 불교사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망라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10성을 생존 시기별로 구분하여 각각의 행적과 불교특징을 비교하면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로의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앞 호에서는 전불시대 가람터에 세운 중고불교의 대표적인 7개 사찰과 성전이 설치된 중대불교의 대표적인 7개 사찰의 비교를 통하여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로의 변화를 추구한 것인데 비하여 다음 호에서는 중고부터 중대에 걸쳐 활동하였던 10성의 행적과 불교특성의 분석을 통하여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난 호에서는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왕실불교의 성격이 바뀐 사실을 이해하려는 시도라면, 다음 호에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내용의 변화를 추구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95호 / 2021년 7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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