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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말과 의도

기자명 이제열

언어만 받아들이면 진실을 놓친다

선어 묘미는 언어 이전 소식
언어 이전 의도 파악이 핵심
말귀보다 뜻귀 열려야 깨달아
마조와 백장 대화도 그 사례

선가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선어(禪語)라 한다. 선어의 묘미 가운데 하나는 언어 이전의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이다. 언어 이전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를 가리킨다. 때문에 선어를 사용하는 수행자들은 상대방의 언어를 따라가지 않고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 그 의도를 뜻이라 한다. 일찍이 부처님이 대열반에 드시면서 사의법(四依法)을 설했다. 그중 하나가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依義不依語)’이다. 참고로 나머지 세 가지는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에 의지하고 불요의에 의지하지 말라’이다.

대승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경구는 언어를 좇지 말고 뜻을 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만 보면 안 되듯이 말을 통해 뜻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 못 차리고 사는 아들을 향해 어머니가 “이놈아, 도대체 왜 이리 못된 짓을 하냐. 그러려면 차라리 나가서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라고 했을 때 아들이 어머니가 날 위해서 저런 말씀을 한다고 받아들이면 그나마 지혜롭다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들이 어머니의 말만 좇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선어도 이와 같다. 수행자는 스승이 사용하는 언어 이전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말귀를 아무리 잘 알아들어도 뜻귀가 열리지 않는다면 깨달을 수 없다.

당나라 때의 고승 백장 스님이 스승 마조선사와 함께 생활할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날 백장 스님이 새벽에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이에 마조선사가 질문과 백장 스님의 답변이 이어졌다.

“이른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가?”
“재 넘어 산책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혹 한 젊은이도 만났겠군?”
“아닙니다.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왜 그 젊은이가 먼저 와 있었을 텐데?”
“제게는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만두자. 묻는 내가 글렀다.”
“아닙니다. 제가 몹쓸 놈입니다.”

‘마조록’에 나오는 일화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기껏 묻고 답하다가 서로 자신이 틀렸다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두 선사의 대화치고는 싱겁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문답 속에는 두 선사의 깊은 법리가 숨겨져 있다. 스승 마조선사는 제자 백장 스님의 수행 경지를 일상 대화를 가장한 선어로써 은근히 떠보는 중이었다. 마조선사의 물음은 백장 스님의 산책에 있지 않고 마음 살림살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장 스님은 이런 마조 선사의 그물에 결코 걸려들지 않는다. 이 문답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젊은이이다. 스승 마조선사가 물은 젊은이는 사람을 지칭했던 것이 아니다. 바로 제자 백장 스님 마음의 본성이다. 마조선사는 백장 스님에게 “네 마음에 본성을 보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선가에서는 마음의 본성을 부처라고 하고, 그 본성을 본 것을 견성이라 한다. 선가에서의 성불은 곧 견성이다.

하지만 마조선사에게 그런 부처는 없다. 진정한 견성은 마음 안에서건 마음 밖에서건 새삼 볼 것이 없고 본 바가 없어야한다. 젊은이로 표현된 마음의 부처를 보았다면 이는 견성이 아니라 기특상(奇特相)에 떨어진 사람이다. 기특상이란 평소의 마음을 떠나 경험되는 갖가지 현상들을 가리킨다. 새삼스럽게 드러난 특별한 체험들은 모두 기특상이다. 일찍이 스승 마조선사는 평상심이 그대로 도라고 가르쳤다. 수행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경계를 보거나 얻는 것이 도가 아니라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평소에 쓰고 있는 마음 그대로를 도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스승의 경지를 제자가 모를 리 없다. 백장 스님은 이미 스승 마조선사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마조선사가 스스로의 질문을 글렀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백장 스님 역시 스승 마조선사의 말에 걸려들지 않은 자신을 몹쓸 놈이라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언어는 언어를 사용한 사람의 의도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또한 언어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우리는 말한 사람의 의도까지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언어만 받아들여 진실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95호 / 2021년 7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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