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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산까치

며칠째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낮에도 덥고 밤에도 덥다. 어제도 열대야로 밤잠을 설쳤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어머니가 해주시던 등목이 그립다. 갓 길어 올린 우물물 한 바가지는 얼음물처럼 시원했다. 머리 위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던 무수한 잔별들이 까만 밤하늘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은하수였다.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밤새도록 요란했다. 더위를 잊으려고 잠시 유년으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봤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후면 부엌쪽이 암반을 깎아낸 경사면 위에 서 있는 구조여서 뒤에서 보면 정면의 출입구보다 2~3층 가량 더 높아 보인다. 산비탈이 없어진 공간에는 미니공원과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여름엔 무성한 누룩나무 가지가 창가에 깃들고, 겨울엔 푸른 바람 소리가 풍경(風磬)처럼 짤그락거린다.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다. 숲이 있으니 새가 찾아든다. 터줏대감은 직박구리와 찌르레기지만 더러 멧비둘기와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린다.

이맘때쯤 경험했던 특별한 기억 하나를 떠올려 본다. 새 이야기다. 그때까지 새는 울거나 기껏해야 노래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새들도 우리처럼 웃고 떠들고, 싸우고 삐치고, 사랑하고 화해했다. 때로는 속이 터진다는 듯이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기도 했다.

어머니의 49재를 회향하고 났을 즈음의 일이었다. 산까치 한 쌍이 매일 부엌 창가에 찾아와 집보살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광경이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똑같은 행동이 계속되자 나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낮에 혼자 있을 때는 더 큰 소리로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다가 간다고 했다.

산까치는 가끔 다른 새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좁은 부엌 창문틀을 먼저 차지하려는 뭇새들의 떼창으로 시끌벅적했다. 새들은 쉴새 없이 깍깍대고 찍찍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불쾌하거나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새들은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말을 주고받는 듯한 즐거운 모습이었다. 새는 우리에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문득 이 산까치 한 쌍이 어머니의 화신(化身)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메신저가 있다면 아마도 새가 아닐까 싶었다. 저승의 어머니는 당신의 49재를 준비했던 이승의 아들 부부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새들은 먹이를 찾다가 방향을 잃었을 수도 있고, 짝짓기를 하기 전에 어색한 숨바꼭질을 반복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집은 한동안 산까치 한 쌍과 다른 산새들이 무시로 찾아와서 놀다가는 사랑방이 되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새들에게도 전생이 있을지 모른다는 영감이 솟아올랐다. 윤회와 환생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지 과학의 영역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나는 자식 집에라도 온 것처럼 유쾌하게 당당했던 산까치 한 쌍은 어머니의 환생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하루종일 숨이 턱턱 막히는 짜증 나는 날씨였다. 가뜩이나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의 일상이 더욱 불편해질 것만 같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다시 격상되는 바람에 언감생심 올 여름휴가도 물 건너가 버렸다. 집에서 랜선 스키여행이라도 즐기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백신접종의 효과가 하루라도 빨리 집단면역의 성과로 확실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열대야에는 그 옛날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해주시던 등목을 추억하면서 시원하게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속에서는 누군가 붙잡고 혹시 어머니였을지도 모를 산까치 한 쌍의 안부를 꼭 물어볼 작정이다. 불자들께서도 좋아하시는 새와 함께 훨훨 나는 맑고 향기로운 꿈을 꾸어 보시길….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96호 / 2021년 8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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