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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빛 바랜 자리에 나뭇결 속살이 고와라

기자명 남수연

완주 화암사

“예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계곡을 타고 산자락을 휘감으며 뻗어있는 계단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길 없는 바위투성이 계곡을 위태위태 올라왔는데, 또 다시 나타난 계단을 보니 기가 턱 막힌다. 산등성이 사이 좁은 계곡에 놓여진 쇠기둥에 의지하여 허공에 매달리듯 놓인 철제 계단. 올려다 보고있자니 그야말로 아득해지더니 그 아찔한 모습에 기가 눌려 선뜻 발을 올릴 용기가 나질 않는다. 계단 아래로 굽이치는 계곡에서는 제법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리며 곳곳에서 폭포와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높이도 만만치 않으려니와 산등성이를 타고 증폭되는 물소리에 계단 난간을 부여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노약자나 임산부,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게 나을 듯 싶다는 생각도 뇌리를 스친다.

<사진설명>까마득한 계단을 한참 오르다보면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 듯 화암사 우화루와 마주하게 된다. 비바람에 흐릿해진 '불명산 화암사'라는 현판이 고찰의 위엄을 더해 준다.

다행히 계단은 그리 길지 않다. 가파르긴 하지만 두, 세 번 산자락을 돌아서면 계곡이 잦아든 곳에 화암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이 들이닥치듯 갑자기 마주하는 절.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방문객이다. 활짝 열려 있어야할 문 대신 아름드리 나무기둥위로 어깨를 떡 벌리고 솟아있는 누각 우화루가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비바람에 흐릿해진 현판의 글씨와 단청 하나 없어 차라리 세월의 위풍이 느껴지는 우화루는 이곳이 세간의 치장과는 거리가 먼 곳임을 말하는 듯 하다.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불명산 화암사는 속살이 고운 절이다. 전각들은 화려한 단청을 세월로 씻어냈다. 그 대신 벌레 먹고 풍상에 시달린 나무 결이 속 깊은 빛을 낸다. 자세히 살펴보면 화려했을 옛 단청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희미한 흔적을 보려고 까치발을 세우고 바싹 다가가게 만드는 절. 화암사는 그렇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화암사는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극락전, 적묵당, 우화루와 스님이 사용하는 요사채가 ㅁ자로 서로 처마를 맞대고 있다. 사방이 막힌 형상이지만 느낌은 답답하기보다 오히려 아늑한 쪽에 가깝다. 이 중 본전인 극락전과 마주보고 있는 우화루는 밖에서 보면 기둥 위에 세워져 있는 2층 누각이지만 안으로 들어와 극락전 앞에서 바라보면 단층이 된다. 극락전에서 법회라도 열리면 우화루 안에 앉아 극락전 부처님을 우러러 뵐 수도 있다. 100여 명은 족히 들어가 앉을 수 있을 만한 규모다. 이 산 속 작은 사찰에 이렇게 큰 누각이라니! 한때 꽤나 규모 있는 법석이 열렸을 법 하다. 때 마침 문 종이를 들고 나오는 공양주 보살께 물으니 자랑이 늘어진다.



길 없는 계곡 끝에 둥지를 튼 절

“옛날엔 궐에서 나온 상궁마마님들이 하인들을 시켜 시주물을 이고 지고 올라왔데요. 저 누각도 상궁마마님들이 비바람을 맞지 않고 법회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꽤나 이름 있는 절이었던 게 분명하죠.”

공양주 보살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극락전과 우화루 양쪽에 처마를 맞대고 있는 적묵당의 문창호를 새로 바르는 중이다. 적묵당은 기도하러 오는 불자들이 묵어 가는 방사로 주로 쓰이는데, 겨울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어 텅 비어 있었다. 웬만한 절이면 자동차가 사찰 안까지 들어가는 요즘 세상에 길도 없는 계곡을 지나 계단을 기어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절을 찾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래서인지 토요일 오후인데도 사찰 안에는 그 흔한 관광객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사진설명>세월의 깊이가 묻어나는 적묵당.

공양주 보살이 심심했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중 흥미로운 이야기는 화암사라는 이름의 유래다. 적묵당 뒤에 산신각이 있는데, 그 놓인 자리가 범상치 않다. 주변의 평평한 자리를 다 마다하고 굳이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공양주 보살 말에 따르면 산신각이 세워진 그 바위 가운데에 작은 웅덩이가 있는데 그 곳에서 연꽃이 피어나 이 절을 ‘바위에서 핀 꽃’이라는 뜻의 화암사라 하고 그 자리에 산신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산신각보다는 꽃이 피었다는 바위 웅덩이가 더 궁금해졌다. 산신각 아래를 비집고 들여다보니 바위 가운데 약간 패인 웅덩이가 있지만 아쉽게도 물은 없다.


바위에서 꽃이 피어 ‘花岩’이라

화암사는 무척 작은 절이다.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을 세울 자리도 없고 종각도 석탑도 없다. 굳이 둘러볼 것도 없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서는 화암사를 보았다 할 수 없다.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름드리 기둥을 만져 보아야 한다. 극락전 처마 밑에 서서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단청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화루에 매달린 빛깔 없는 목어의 커다란 눈과 이름 없는 어느 옛 스님의 소박한 부도 앞에 서서 이 절에 머무르며 수도했다는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를 떠올려 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잠시 전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 올라오며 그리고 까마득한 계단을 올려다보며 불평했던 일이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그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화암사는 이처럼 고운 옛 숨결을 간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마 손대기도 아까워 꼭꼭 숨겨 놓고 가끔씩 살짝 꺼내보고 싶은 곳. 화암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마음 한 자락은 여전히 우화루 기둥에 묶여 실자락처럼 나풀거리고 있다.

<사진설명>연꽃이 피었다는 바위 위에 세워진 산신각.


완주=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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