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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소신공양

집착의 근원인 육체와 극한의 고통 떨쳐내는 마지막 여정

법화경·열반경·범망경 등에서 자신 몸 태우는 공양 찬탄
5세기 중국에서 근현대 베트남·한국·티베트 등서도 결행
당 의정 스님 등 “소신공양 부처님 가르침과 달라” 비판도

예나 지금이나 소신공양은 긍정과 부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적형태다. 그러나 그 지극한 신심 자체는 참으로 거룩하고 찬탄 받아 마땅하다. 사진은 베트남 틱쾅둑 스님이 1963년 불교탄압에 맞서 거리에서 소신공양하는 모습.
예나 지금이나 소신공양은 긍정과 부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적형태다. 그러나 그 지극한 신심 자체는 참으로 거룩하고 찬탄 받아 마땅하다. 사진은 베트남 틱쾅둑 스님이 1963년 불교탄압에 맞서 거리에서 소신공양하는 모습.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신통력으로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그리고는 곧 여러 가지 전단, 훈륙, 도루바의 향과 필력가, 침수, 교향들을 먹고, 1200년 동안 첨복 등의 꽃 향유를 마시며,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 앞에서 하늘 보배 옷으로 스스로 몸을 감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서원으로써 1200년에 걸쳐 스스로 몸을 태우니, 그 광명이 80억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느니라.”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법화경’에서 약왕보살 전신인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부처님께 소신공양(燒身供養)을 올리는 장면이다. 소신공양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일체제불(一切諸佛)에게 드리는 행위를 말한다. 대승계율인 ‘범망경’에서도 “불자들아, 그대들은 마땅히 좋아하는 마음으로 대승의 위의와 경과 율을 먼저 배우고 그 뜻을 이해하여 널리 열어 보이라. 뒤에 새로 발심한 보살이 백리, 천리를 와서 대승의 경과 율을 구함을 보거든, 몸, 팔, 손가락을 태워 모든 부처님께 공양할 수 없다면 출가보살이 아니라고 하라”며 소신공양을 찬탄하고 있다. 또 ‘열반경’에서 현세의 육신으로 등잔과 심지를 만들어 불을 밝히는 소신(燒身)의 고통은 미래 지옥에 비하면 사소하며, 무상의 진리를 얻는 첩경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가장 널리 읽히는 대승경전에서 소신공양은 무량한 공덕과 최고의 수행방편으로 칭송된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만적 선사가 스스로 몸을 불태워 공양 올리는 모습이 소재로 다뤄지듯 동아시아에서 소신공양은 그리 낯설지 않으며 최근 우리나라에서 소신공양이 이뤄지기도 했다.

소신공양이 처음 시작된 곳은 인도이다. ‘자타카’를 비롯한 초기경전에 소신공양이 자주 나타나며 ‘니다나 카타’라는 팔리 불전에는 구체적인 소신공양의 과정도 소개돼 있다. 중국에서 소신공양은 불교 전래 직후 이뤄진 것은 아니다. 고대 중국에서 시신을 태우는 화장 문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한족의 문화였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을 불로 태운다는 것은 ‘자치통감’에 나오듯 전시에 적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주기 위한 일환으로 이용됐다. 또 지배층 남성들이 자신의 사후 비첩(婢妾)들이 다른 남자에게 재가하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태워 비구니로 출가시켰다는 ‘송서(宋書)’의 잔악무도한 기록이 드물게 있을 뿐이다.

극도의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던 소신이 성행한 것은 불교가 중국 전역에 확산된 이후다. 불교 전래 400~500년이 지나서 서역 스님들을 대상으로 이뤄지던 화장이 한인 스님들에게로 급격히 확대됐다. 소신공양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소신공양은 왕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했으며, 나중에는 재가자로 확대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중국불교 초기 난해하고 철학적 성격이 짙은 반야 계통의 경전이 중시되다 남북조시대 신행이 강조되는 ‘법화경’과 ‘열반경’이 크게 성행하는 불교의 흐름과도 맞닿아있다.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은 후진(後秦)의 요흥(396~399) 시기 법우(法羽)라는 스님이다. ‘고승전’에 따르면 스님은 15세에 두타행을 열심히 닦는 혜시 스님의 제자로 출가했다. 심지가 굳고 용맹했으며 항상 우러러 약왕보살을 본받고자 했다. 자신의 소신공양 의사를 왕에게 알렸을 때 왕은 “도에 들어가는 방법이 많은데 왜 하필 몸을 불태우려 하는가. 굳건한 의지를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세 번 더 생각하기를 바라오”리고 말했다. 그러나 스님의 발원이 워낙 견고했기에 부득이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스님은 곧 향유를 복용하고 천으로 몸을 감싼 뒤 ‘사신품(捨身品)’을 외우며 스스로를 불살랐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 모두 슬퍼하고 우러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이때 스님의 나이 45세였다고 한다.

28세에 소신공양한 혜소(慧紹) 스님은 동진출가자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고기를 먹이면 토해내고 채소만 먹었던 그는 8세 어린나이에 출가했다. 신심이 장하고 부지런히 정진했던 스님은 초제사(招提寺)라는 절에 머무를 때부터 소신공양에 뜻을 세웠다. 스님은 틈틈이 장작을 패서 절 동쪽에 높이 쌓아두었다. 장작 중앙에 자기 몸이 들어갈 만한 작은 감실도 만들었다. 스님은 얼마 후 스승 승요(僧要) 스님을 찾아 뵙고 작별인사를 드렸다. 승요 스님은 160세까지 살았던 고승으로 청빈하고 덕이 높은 스님이었다. 제자의 갑작스런 선언에 놀란 승요 스님은 그 생각을 접으라고 거듭거듭 만류했다. 허나 혜소 스님의 결심은 금강석처럼 단단했기에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혜소 스님은 은사의 탄식과 안타까운 시선을 뒤로 하고 장작더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신공양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들었고 수레와 말을 타고 온 사람들도 보였다. 초저녁이 되자 스님은 정성껏 향을 올린 뒤 촛불을 들어 직접 섶에 불을 붙인 채 그 가운데 들어가 앉았다. 스님은 ‘약왕경’의 ‘본사품’을 큰소리로 외웠고 솟구치는 불기둥이 곧바로 스님을 집어삼켰다. 멀찍이 떨어져 이 광경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스님이 숨을 거둔 줄 알고 장작더미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불구덩이 속에서 경전 외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갑자기 “일심(一心)”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린 후 이내 조용해졌다. 이때였다. 커다란 운석이 희뿌연 연기 속에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하늘로 곧장 솟구쳐 올라갔다. 사람들은 하늘궁전에서 스님을 영접한 것이라 믿었다. 혜소 스님은 소신 전 자신의 몸을 불사른 곳에 오동나무가 돋아날 터이니 베지 말 것을 당부했고 실제 사흘 뒤 오동나무가 돋아났다고 한다. 

동진시대의 혜익(慧益) 스님도 소신공양을 결행한 고승이었다. 스님은 고행 정진하며 몸을 불사르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자신의 결심을 실행으로 옮겨갔다. 대명 7년(460) 곡식을 끊고 마맥(麻麥)만 먹다가 2년 뒤엔 그마저 끊고 소량의 기름으로 연명했다. 나중에는 소량의 향환(香丸)으로 겨우겨우 생명을 이어갔다. 부처님 고행상처럼 뼈가 앙상히 드러났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불교를 억압하던 효무제도 수년간 지속되는 스님의 결연한 행동에 감동해 직접 절을 찾았다. 그는 스님에게 소신하지 말 것을 청했지만 스님은 뜻을 접지 않았다. 461년 4월8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종산(鐘山) 남쪽에 가마솥이 설치되고 기름이 마련됐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황제는 서둘러 종산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고 기름을 부은 커다란 가마솥이 있었다.

시간이 되자 바짝 마른 스님은 기름 가마솥에 들어가 작은 상에 기대 자신의 몸을 정결히 닦았다. 이어 긴 모자를 쓰고 기름을 쏟아 붓더니 불을 붙이려 했다. 이때 황제는 신하에게 어서 가 다시 한 번 설득해보라고 명령했다. 뛰다시피 달려간 신하는 “왜 이렇게 목숨을 버리려하오. 잘 생각하여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좋겠소”라는 황제의 뜻을 전했다. 이에 스님은 이렇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성상의 자애로움이 망극하오이다. 원컨대 스무 사람을 제도해 출가하도록 해주십시오.” 황제는 스님의 의지가 확고함을 확인한 뒤 칙명을 내려 이를 허가했다. 스님은 곧 손수 촛불을 잡고 모자를 태웠다. 모자가 서서히 타오르자 촛불을 내려놓고 합장한 뒤 ‘약왕품’을 외웠다. 불길이 스님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을 외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에 왕족과 귀족, 관리, 천민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황제도 이를 끝까지 지켜보고 궁으로 돌아갔고 꿈 속에 스님이 석장을 흔들며 황제 앞에 이르러 다시 불법의 보호를 부탁했다. 이튿날 황제는 스님을 위해 재를 지내고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 소신공양한 그 장소에 약왕사를 짓고 원하는 이들을 출가시켜 머물 수 있도록 했다. 혜익 스님은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불법을 억압하는 황제를 개심토록 하고 대중들의 신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외에 법광, 법존, 담홍, 승애 스님 등을 비롯해 형주 지역의 비구니 자매가 같이 소신공양을 결행한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승애(僧崖) 스님은 소신공양의 대표적인 사례로 두고두고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스님은 뭇 생명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과 원력이 있었고 생전에 이미 ‘승애보살’로 불렸다. ‘속고승전’에는 승애 스님이 소신에 앞서 “나는 범부다. 나는 맹세코 지옥에 들어가 중생을 대신해 고통 받고 그들을 성불시키기를 원하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발원한 기록과 함께 극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소신공양은 천수백 년 전에 있었던 종결형의 과거가 아니다. 1963년 베트남 틱쾅둑 스님이 불교탄압에 항거해 사이공 거리에서 소신공양했고, 우리나라 태고종 승정 충담 스님도 1998년 6월27일 새벽, 청평 감로사에서 조국통일과 불국토 등을 발원하며 소신공양했다. 또 2010년 5월31일 경북 군위군 낙동강 강둑에서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이 있었다. 해외언론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중국내 150여명의 티베트스님들이 자국의 독립을 요구하며 소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신공양은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이 대단히 거룩하고 동시에 참혹하기에 이것이 불교적인가에 대한 논란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비판적인 관점에선 부처님이 살인과 자살, 교살과 자기학대를 엄격히 금지했기에 소신공양은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본다. ‘고승전’을 편찬한 혜교 스님도 “명예를 좇거나 혹은 억지로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했으며, 인도를 순례했던 당나라 의정 스님은 “당시 소신했던 이들 대부분 성인의 경전을 익히지 못한 초학자로 소신 행위가 기본 계율에 어긋나기에 사문이 행할 일이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실제 문헌에는 소신공양 나이가 점점 어려져 나중에는 열 살도 안 된 상태에서 결행되는 사례가 나타난다. 차차석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는 소신공양을 다룬 논문에서 “자신을 헌신해 세상의 등불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법화경’의 정신이며, 불교도들의 의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를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소신공양은 육체라는 집착의 근원과 고통의 극한이라는 과정을 넘어서야 결행 가능하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긍정과 부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스님의 입적형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그 지극한 신심 자체는 참으로 거룩하고 장한 일로 찬탄 받아 마땅하다.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98호 / 2021년 8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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