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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붓다의 가르침은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는다

불성, 찰나마다 생멸해 무상하고 공하다 

불변·불멸인 불성, 시간선상서 변화 없이 존재한다 믿어지지만
만물은 순간순간 4차원적 연속체 단층 모아 놓은 가상 집합체
불성이 실재한다는 이론은 무수한 논리적 딜레마에 놓여 있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우리는 궁극의 진리를 언어나 논리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선문(禪門)의 주장에 익숙하다. 진리와 깨달음이 문자로는 불가능하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통찰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립문자가 논리에 어긋나는 견해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진리가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논리에 어긋나는 주장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논리는 진리의 충분조건은 못되지만 진리를 구성하는 필요조건이다.

나는 사고(思考)를 배제하며 수행자의 체험만을 요구하는 선문 일부의 주장에 철학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논리학에서 어떤 주장을 논파(論破)할 때 사용하는 딜레마나 패러독스와 같은 논증을 이용해 불교 일부의 가르침을 분석해 왔다. 먼저 다음과 같은 ‘선(禪)의 딜레마’에 주목해 보자.

(1) 깨침을 위해 선이 요구하는 체험이 있다면, 그 체험은 수행자마다 같거나 다르다.
(2) 깨친 자에게 공통된 체험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깨침에 공통된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대승의 공(空) 가르침에 어긋난다.
(3) 깨침의 체험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각각 상이한 체험을 모두 동일한 깨침으로 보게 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이 제시된 적이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또 객관적 기준으로서의 자성을 가지게 되어 공에 어긋나게 된다.

(1), (2), (3)에 의해 선이 요구하는 체험을 깨침의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위의 논증에서 사용된 공(空)을 대승 일부의 주장인 ‘진공묘유(眞空妙有)’처럼 자성을 가진 실체 또는 실재(實在)로 받아들인다면 (2)와 (3)이 공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실재로서의 공이 가지는 패러독스’에 직면한다.

공은 (스스로) 공하거나 공하지 않다.
(1) 공이 공하면, 자성을 결여함이 자성을 결여한다는 (없는 게 없다는) 말이므로, 자성을 결여하지 않는다 (자성이 있다), 즉 공하지 않다.
(2) 공이 공하지 않으면, 자성을 결여함이 자성을 결여하지 않는다는 (없다는 게 그렇다는) 말이므로, 자성을 결여한다, 즉 공하다.

따라서 공이 공하면 공하지 않고, 공하지 않으면 공하다. 이것은 패러독스로서, 이와 같이 실재하는 공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실재하는 공을 도입함으로써 선이 가진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선문은 또 불성의 존재를 언급하며 각자가 모두 가지고 있다는 불성을 깨치는 체험을 하기만 하면 깨달음이 완성된다고 가르친다. 간화선과 묵조선 전통 모두 불성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참선하고 수행한다. 그러나 불성은 존재론적으로 불법의 체계 안에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만약 선문에서 말하는 대로 불성이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굉장한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면, 불성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고 불변 불멸한다. 이것은 불성이 붓다가 가르친 연기가 포섭하지 못하는 영역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붓다의 연기법이 존재세계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로서 불교 안에서 받아들이기 곤란한 견해이다. 그런데 그보다도 먼저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자기기원의 패러독스’에 부딪혀 설득력을 잃는다.

(1)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스스로 생겨났을 것이다. 불성이 자기기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생겨날 때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2) 불성이 자기기원 당시 존재한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생겨날 수는 없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3) 불성이 자기기원 당시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1), (2), (3)에 의해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연기하지 않는다는 불성은 자기기원으로 생겨나야 할 텐데, ‘자기기원의 패러독스’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논증은 한 가지 더 가능한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아서 불완전하다. 불성은 (1) 조건에 의해 생멸(연기)하거나, (2) 자기기원하거나, 아니면 (3) 무시(無始)로부터 영원히 존재해 왔을 수도 있는데, 이 (3)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성은 무시로부터 존재해 왔을까?

불변하고 불멸인 불성은 시간선상에서 변화 없이 존재한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형이상학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시간선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순간순간마다 그 4차원적 연속체의 단층(slices)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모아 놓은 가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아비달마학파 이래 불교에 존재해 온 견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아비달마학파와 중관학파의 논증으로부터 모든 집합체는 자성이 없어 공(空)하며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따라서 불성 또한 시간선상에서 불변 불멸할 수 없고 찰나마다 생멸하는 무상(無常)하고 공한 무엇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불성 개념과 정반대로 어긋난다. 기존의 불성 개념은 이와 같이 무수한 논리적·형이상학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본고의 첫 부분에서 도입한 ‘선(禪)의 딜레마’는 근원적으로 굉장한 자성을 가졌다는 불성의 실재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불성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1) 연기하거나, (2) 자기기원하거나, 아니면 (3) 무시로부터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1) 연기한다면 자성이 없어 공하기 때문에 실재할 수 없고, (2) 자기기원은 그 패러독스 때문에 불가능하며, (3) 바로 위 단락에서 보았듯이 불성이 무시로부터 존재해 왔을 수도 없다. 이러한 논리적 문제들 때문에 나는 지성(知性)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불성의 실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실재하지 않는 불성을 깨쳤다고 믿는 것으로 인해 우리 불교계에서 그동안 여러 불가해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기도 하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98호 / 2021년 8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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