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라리 고장난 시계가 낫다

기자명 안직수

병역의무 중인 조카에게 전화가 왔다. 전역 100일을 남겨두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카의 시계는 올겨울 전역일에 맞춰져 있다.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 인류가 정한 시계는 하루 24시간이지만, 사람마다 가진 시계는 다르다. 기자들의 시간은 원고 마감시간에 맞춰 흐르고, 사업가의 시계는 직원들 급여일에 맞춰져 있다. 대선을 꿈꾸는 분들의 시계는 내년 3월9일에 맞춰져 있고,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시계는 내년 6월1일이 데드라인이다. 코로나19로 집합금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방역당국의 시계는 전 국민의 70%가 접종을 마칠 시기에 시계를 고정시켜 놨다.

서민들 시간은 어떨까? 코로나19로 집합금지 명령이 이어지면서 고정 급여가 없는 자영업자들은 매달 돌아오는 임대료 및 각종 공과금도 버겁다. 전통시장을 걷다보면 곳곳이 신음소리다. 지금의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아우르지 못하고, 감염병 때문이니 참으라고 강요하는 형국이다. 정치인의 관심은 여야 모두 대선 후보 경선에 가 있다.

8월 말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재난지원금이 나왔다. 지원금 지급 직전 부가가치세 납부통지서를 받아든 소상공인 다수는 그 돈으로 세금을 내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그래도 부족하면 저금리로 빚을 내 가게를 운영하고 세금도 낸다.

소상공인들은 ‘신용 연좌제’가 가장 무섭다고 말한다. 은행이자가 연체되면 개인신용정보가 다른 은행뿐 아니라 카드사, 통신사까지 연동되다 보니 “제일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신용정보에 문제가 생겨 인터넷조차 중단되면 배달 서비스도, 경제활동도 모두 중단된다.

정부는 ‘추석에 소비하라’고 일정 소득 이하 국민들에게 1인당 25만원씩 지급했다. 본래 직업을 잃고 ‘배달의민족’과 ‘더 빠르게’를 외치는 쿠팡물류센터로 내몰리는 일용직 근로자들 모습이 오버랩되는 현실이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선거라는 시간에 올라탄 정치인들이 저마다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서민들을 얼마나 돌아보고 있을까. 치솟는 집값에 결혼을 포기하는 청년들, 급여로 안 된다며 빚을 내 주식투자에 열광하는 중장년층, 신음조차 포기한 소상공인들을 아우를 근본적 정책 대안은 없는가.

부처님께서는 ‘중아함경’에서 지도자의 네 가지 덕목을 말씀하셨다. 첫째 대중의 어려움과 고통을 잘 파악해 은혜를 베풀고, 둘째 합당하고 사리에 맞으며 부드럽고 고운 말을 쓰며, 셋째 자신의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며, 넷째 사람들을 잘 헤아려 모든 일을 같이하려 노력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하셨다.

어디 한 구절 틀린 곳이 없는 말씀이다. 민심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늘 그런 지도자를 원했고, 이에 근접하다고 생각하는 후보에게 표를 줬다. 첨언하면 자신과 형편이 비슷한 사람만 만나고 대화하면 자칫 대중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들의 목소리가 대중의 목소리인양 착각에 든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외치다가 국회의사당, 청와대에 들어가면 사고가 경직되는 근본 원인도 거기에 있다.

지금 대한민국 시계는 대선 시간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 주체이고 대상인 서민들 사이에서 ‘정치혐오’ ‘민심이탈’이 심각한데도, 이를 진지하게 돌아보려는 위정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추석을 앞두고 정치인마다 전통시장을 찾을 예정이다. 정해진 시간에 빨리 전통시장 한 바퀴 돌면서 사진만 찍지 말고, 한 명의 상인을 만나더라도 진지하게 대화하면서 민심을 바로 보기 바란다.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목소리에서 대중의 아픔을 체감하며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공감능력을 키워야 바른 정치가 살아난다.

“고장 난 시계는 하루 두 번은 맞는다”던 어느 큰스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올 추석에는 정권 쟁취라는 시계를 잠시 멈추고, 정치인들이 고장난 시계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안직수 복지법인 i길벗 상임이사 jsahn21@hanmail.net

[1601호 / 2021년 9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