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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믿음이라도, 제대로 된 믿음을 위하여 

의미 있는 행동 되려면 반드시 믿음 밑받침 돼야

목적 성취 위해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한 지식·정보
불경 내용도 섣부르게 믿기보다 제대로 됐는지 점검이 우선
내 삶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믿음을 제시해야

신규탁 교수는 “제대로 된 지식, 믿음, 실행, 이 세 요소는 불자로서의 신행 생활에서도 중요한 내용”이라고 강조한다. 사진은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는 불자들.
신규탁 교수는 “제대로 된 지식, 믿음, 실행, 이 세 요소는 불자로서의 신행 생활에서도 중요한 내용”이라고 강조한다. 사진은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는 불자들.

‘믿음’이라는 말이나 행위는 종교 또는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책 속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믿음’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크게 두 ‘겹[층위層位]’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경전들 속에 등장하는 소위 ‘믿음’과 관련된 상황이나 ‘믿음’을 표현하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옛사람들이 만든 과거의 ‘층[겹]’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경전에 믿음을 내는 나 자신이 당면한 지금의 ‘겹[층위]’이다.

전자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지금까지 작동하는 해당 종교 자체의 몫이고, 후자는 그런 종교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나의 몫이다. 이상 두 겹의 ‘믿음’을 제대로 잘 활용해야 내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믿음’대로 행동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를 적잖이 경험한다. 최근 수년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아파트 가격을 사례로 들어보자. 잘못된 정보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행위는 결국 손해로 이어진다. 그러면 반대 국면을 상정해보자. 즉, 제대로 된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아파트를 팔던지 사면 자신이 원하는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 간단한 사례를 보더라도 ‘믿음’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엇’ 중의 하나가 ‘제대로’ 된 지식이나 정보이다. 그것을 믿고 그에 따라 실천해야만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지식, 믿음, 실행, 이 세 요소는 불자로서의 신행(信行) 생활에서도 중요한 내용이다.

위의 아파트 사례에 공감이 간다면, 계속해서 그것을 불교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에 적용해보자. 위의 문단에서 필자가 말했던 믿음 중에서 종교로 향하는 나의 믿음에 주목해 보자. 우리들이 읽고 있는 불교 경전에 담겨진 내용에 대해 섣부르게 믿음부터 먼저 발동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믿음을 내기 전에 살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불교 경전에 담겨진 내용이 ‘제대로 된’ 지식이나 정보인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단지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불교 경전을 읽는 것이라면, 설사 ‘제대로 되지 않은’ 지식이나 정보라 해도 그리 문제 될 것은 없다. 소양이 좀 부족하다거나 잘못되었다 해도 사는데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문제는 거기에 믿음을 내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인으로서 불경 읽기는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첫째는 불경에 등장하는 내용이 제대로 된 지식이나 정보인지? 둘째는 제대로 된 것임을 안 뒤에는 그 앎에 믿음을 내어 앎의 내용대로 실천할 것인지? ‘의미 있는’ 행동이 되려면 반드시 믿음이 밑받침 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필자는 ‘제대로 된 지식이나 정보’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사용했는데, ‘제대로 된’이란 무슨 뜻인가? 필자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제대로 됨’이란 ‘이유와 결합 된’ 또는 ‘정당화 된’이라는 뜻이다. 이유와 결합시키는 또는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철학의 역사로 보면 크게 ‘경험주의적’ 전통과 ‘합리주의적’ 전통이 있다. 이 두 전통은 긴 세월 속에서 저마다 ‘제대로 된 믿음’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천재적 철학자들에 의해, 어느 한 전통으로 다른 쪽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는 고유의 논증구조를 유지하면서, 믿음이 지식으로 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을 보충해 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진리’와 ‘믿음’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앎이 지식인데, 그 지식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어야 한다. 그런 지식이 ‘참된(true) 지식’이다. ‘참된 지식’에 따라 행동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문제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인데, 그러면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정당화(justify)’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는 위의 첫 문단에 제시한 첫째 ‘겹[층위]’으로, 해당 종교 자체의 몫이다.

초기불교 경전 즉 아함부경전 속에 전해지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법문들도 이런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역적으로 전해 오는 관습에 대한 믿음, 베다 경전에 쓰인 내용에 대한 믿음, 당시 성자들의 말씀에 대한 믿음 등등의 다양한 믿음들이 있다. 이 믿음들에 대해 석가모니부처님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수준에 맞게 그것들이 과연 정당화되는지를 점검해가고 있다.

석가모니 사후에는, 그의 생전에는 제기되지 않았던 각종 믿음들과 또 믿음을 정당화 하는 다양한 논증 방식들이 출현했다. 그리하여 석가의 훗날 제자들은 아함부경전들 속에 전하는 ‘말씀’에 근거하고, 또 자신들이 개발한 ‘논증방법’에 근거하여, 불교를 지키고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다. 설일체유부는 유부대로, 경량부는 경량부대로, 다양한 부파들이 그렇게 했다.

다시 세월이 흘러 기존의 부파들이 제시한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겼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대승’이라는 명분을 걸고 새롭게, ‘정당화 된 참인 믿음’을 경전 형식을 빌려 세상에 유통시켰고, 그리하여 세상에는 소승과 대승이 전승되고 있다. 나아가 대승 중에서도,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는 진리의 논증을 서로 달리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불교가 중국 땅에 들어온다. 기존의 고급스런 문화와 사상을 갖추고 있던 중국 지역의 지성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를 그냥 수용할 리가 없다. 결국 비판적 수용이라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공과 무자성과 무아를 강조하는 진리론을 공종(空宗)이라 이름 붙이고, 오직 식만이 실재함[唯識]을 주장하는 일군의 이론을 상종(相宗)이라 이름 붙이고, 이 두 종을 극복 지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성종(性宗)을 제시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나아가 이상의 모두가 ‘참인(true) 지식’을 담보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선종(禪宗) 운동을 일으켜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등을 주장하는 승려 집단도 생겼다. 선종도 뒷날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면서 저마다 참임을 주장하며 갈라졌다.

지금 현재 한국의 불교 ‘시장’에는 이상에 언급한 다양한 진리관을 갖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자신들이 유통하는 상품들이 ‘이유와 결합된’ 또는 ‘정당화된 지식과 결합된’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인간 지성의 발달에 따라 이런 다양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 생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다양한 교단이나 이론의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님들이 화합을 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당화 된 참인 믿음으로 향해가는 구도의 열정과 그리고 실존적 삶의 선택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선택이 우리 앞에도 놓여 있다. 인문 소양을 넘어선 삶으로서의 불교라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진리로 향하는 열정을 바탕으로 내 삶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이 길이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스님들은 ‘길’을 제시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종학(宗學)이 필요하다. 종단 차원의 교학에서 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03호 / 2021년 10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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