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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지혜 ⑥

기자명 박희택

실상은 상을 벗어나 공성 체득한 지혜

즉비는 연기‧중도 이해 때 성립
모든 존재‧현상이 가명임 이해
공성과 가명을 융섭함이 중도
이것을 직관하는 게 중도실상

‘금강경’ 제13분인 여법수지분에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설하였으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까닭이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는 말씀이 나온다. ‘금강경’에 보이는 36차례 즉비논리 중 8번째로서, 경제(經題)인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반야바라밀’ 자체에 대해서 즉비논리를 적용하고 있는 내용이다.

반야사상 핵심구인 반야바라밀을, ‘반야심경’에서 그토록 중시한 반야바라밀을 ‘금강경’에서는 즉비하는 발상도 놀랍거니와, 즉비하였기에 반야바라밀이 된다는 귀결도 언뜻 이해하기 용이하지는 않다. 이는 제8분인 의법출생분의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佛法者卽非佛法, ‘금강경’의 4번째 즉비논리)”와도 같이, 근본에 대한 부정을 하는 듯한 즉비논리까지 만나면 일견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뿐만이 아니다. 제14분인 이상적멸분의 “이 궁극적 지혜라는 것은 궁극적 지혜가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궁극적 지혜라 말씀하셨습니다(是實相者卽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금강경’의 12번째 즉비논리)”는 말씀도 있다. 우리가 그토록 얻고자 하는 궁극적 지혜가 궁극적 지혜가 곧 아니기에 궁극적 지혜라는 논리이다.

즉비논리는 서양논리학에서 쉬 볼 수 없는 것으로써, 서양에는 자성(自性)을 공성(空性)으로 이해하는 철학적 안목이 성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의 연기와 중도의 철학을 이해할 때만이 성립될 수 있는 안목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하나의 관념[相]에 지나기 않기에, 이 관념에 취착된다면 그 실상을 볼 수 없다는 엄밀한 안목이다.

이를 ‘금강경’ 이상적멸분에서는 “모든 관념을 떠난 이를 부처님이라 말하기 때문이다(離一切諸相 卽名諸佛)”라 표현한다. 중국 양나라 소명태자가 ‘금강경’을 32분으로 과문(科文)하면서 분명(分名)으로 붙인 이상적멸(離相寂滅, 관념을 떠난 열반, 제14분)이라든지 일상무상(一相無相, 관념과 그 관념의 부정, 제9분) 등도 이를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들 관념을 크게는 넷으로 분류할 수 있기에 4상이라 하고, 4상을 벗어나면 곧 여래를 본다고 설하는 것이다. ‘금강경’ 여리실견분에 나오는 사구게인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만약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가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강경’의 나머지 사구게들도 관념의 공성을 표현한 것임은 물론이다.

‘금강경’에서 ‘실상(實相)’이라 부르는 궁극적 지혜는 상(相, 관념)을 벗어나 공성을 체득한 지혜이기에 실상으로 불리운다. 이 실상은 공성(空性)의 체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기에, 모든 존재와 현상이 단지 가명(假名)으로 있을 뿐임을 투철히 이해하며, 필경 실상이라는 것은 공성과 가명을 융섭하는 중도(中道)임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실상’이라 한다. 공-가-중(空-假-中)에 걸친 공관과 가관과 중관의 삼관(三觀)이 즉비논리의 철학적 관점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삼관이 기초가 된 즉비논리는 반야바라밀이든 부처의 가르침이든 궁극적 지혜이든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조차 공성을 떠나 있지 않다는 것을 확고하게 알게 해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신수봉행하도록 해준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곧 아니기에 반야바라밀이다는 즉비논리를 통해 반야바라밀을 진정으로 신수봉행할 수 있게 된다.

동양사상에서 즉비논리와 유사한 논리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제1장 “도를 도라고 하면 상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상명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가 있고, 서양사상에서는 플라톤의 ‘향연’에 인용된 헤라이클레이토스의 “일자(一者)는 자신과 불화함으로써 자신과 화합한다. 활과 뤼라의 조화처럼”이 단편적으로 있을 뿐이다.

하지만 ‘금강경’과 같이 전체를 꿰뚫어 즉비논리를 구사하여 사상적 지혜성(智慧性)을 확보한 사례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근자에 열반한 고우 스님은 ‘육조단경’ 정혜품의 “보리반야의 지혜는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菩提般若之智 世人本自有之)”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우리가 형상지어 있는 것만 보고서 있다고 집착한다. 더 깊이 보아 그 형상이 연기고, 실체가 없는 공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즉비논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603호 / 2021년 10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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