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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쓰린 천리길서 ‘무가보’ 품을 터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21.10.12 12:00
  • 호수 1604
  • 댓글 0

험로·고난 길이 부처님 걸었던 길
순례는 자신 존재 꿰뚫려는 수행
고통 너머 자기변화 발보리심 담겨

“나부터, 우리 먼저, 미혹함을 사르겠다는 청정발원을 깊게 새깁니다. 함께한 원력으로 쓰러진 자리에서 떨쳐 일어설 것이며 이제 천리순례 만행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떠나고자 합니다.”

승보종찰 송광사와, 법보종찰 해인사를 거쳐 불보종찰 통도사에 닿는 총 423km의 천릿길에 오른 순례자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떠난다”고 했다. 지평선 시원스레 펼쳐 보이는 평탄의 길이 아니다. 흙과 돌이 뒤엉킨 험난한 산길을 걷다가 해발 958m의 시암재, 1079m의 성삼재를 넘어야만 하는 험로이다. 낮과 밤, 새벽마다 달라지는 급격한 온도차를 극복해야 하고, 불시에 휘몰아치는 강풍에도 맞서야 하기에 천리순례길은 ‘고난의 길’ 자체다. 

그럼에도 비구 48명, 비구니 6명, 우바새 14명, 우바이 26명 등 총 94명의 순례대중은 불보살님께 올린 ‘고불문’에서 다짐했듯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우리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대자대비의 꽃비가 내리는 길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순례대중 가운데 최고령자는 지난해 ‘자비순례’에 이어 이번 천리순례에도 동참한 77세의 이채순 불자라고 한다. “지난해에는 왜 못하겠느냐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아상이었다.” 순례보다 극복에 치우쳤던 자신을 경책한 그는 “올해는 하심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동참했다”며 순례 본연의 정신에 방점을 찍었다. 승가 중 최고령의 스님은 서울 전등사 주지 동명 스님이라고 한다. 천리순례 여정 소식이 “게으르고 나태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며 “익숙한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면서 내가 살아왔던 것들을 뒤돌아보는 기회로 삼겠다”고 했다. 비바람과 안개 낀 새벽길이 바로 부처님께서 걸었던 길임을 순례대중은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성지를 순례하면 비록 내가 없어도 나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그곳에서 언제나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겠다.” 붓다고사도 전했다. “비구가 부처님의 회상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은 부처님의 영역으로 향한다.” 그 어느 산사의 대웅전 앞에 섰든, 합장한  순간 부처님을 친견한 것이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렸음이다. 그 순간 충만해 오는 법열은 순례대중에 내려진 최고의 가피이다. 

고무적인 건 산사에서 순례객을 기다린 것이 부처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송광사만 해도 ‘정혜결사’를 주도해 한국 선수행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보조국사 지눌 스님을 포함한 16국사와 부휴, 무용, 묵암, 효봉 스님 등의 근현대 대표 선지식이 너른 품으로 사부대중을 안아 주었다. 

해인사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놓은 논(論)과 조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니 인류가 경청해야 할 지중한 일언들이 팔만대장경에 새겨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그 말씀 면면이 전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다졌을 것이다.

절과 절을 잇는 땅을 한 발 한 발 밟아가는 순례길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피는 또 있다. 성지순례는 수행이기도 하다. 자기 존재의 중심을 꿰뚫어 보려는 숭고하면서도 처절한 몸부림이다. 하여 고뇌는 필연으로 따라온다. 참회와 회심에서 시작된 고뇌이기에 걸으며 생긴 물집보다 더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순례대중은 안다. 그 고통 너머에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발보리심이 가부좌 틀고 있음을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탐진치의 비움이 시작되고 삼법인이 채워져 가고 있을 즈음이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전해져 오는 울림을 직감할 것이다. 그 속에서 얻은 그 무엇을 일러 ‘거룩한 침묵의 소리’로 갈무리 하든, ‘삼라만상 무량삼매’로 매듭짓든, 그것은 특별한 체득이며 평생 간직할 자신만의 무가보이다. 

이제 곧 가을억새가 장관인 사자평에 닿는다. 재약산의 표충사와 영축산의 통도사를 잇는 ‘한국의 알프스’라 명명된 아름다운 산길에서 만나는 풍광이다. 속은 비었지만 강풍에도 꺾이지 않는 억새에서 비움과 채움의 묘미를 느껴보기 바란다.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부처님의 마지막 체취’이자 기억인 통도사의 불사리를 원만히 친견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604호 / 2021년 10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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