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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정암사 주지 법상 스님

“벽화·주련 속 가르침에 귀 기울이면 법음 진수 만끽!”  

담양 황정산 원통암 오르고 초3년 때 “스님 되고 싶다”
경전 속 이야기 간단 명료 스리랑카 벽화에 완전 매료
사찰답사 6년 여정 끝에 벽화·주련 담은 명저 출간
“벽화 소재 다양성 지향 주련의 한글화 시급 해” 
각성 스님 ‘주심부’ 강의서 법열 체험 후 번역 원력
“우리가 믿을 건 불법 뿐!” 전각 서까래마다 ‘말씀’ 새겨
재정·시간여건 조성된다면 “남방사찰 벽화 담고 싶어”

정암사 주지 법상 스님은 “주련의 한글화가 절실하다”며 “위드 코로나로 접어들면 삼계주전의 주련도 바꿀 것”이라고 했다.정암사 삼계주전.신도를 위한 공간 구성이 이채롭다.삼계주전 벽화는 부처님 일대기를 담고 있다.법상 스님은 ‘법화경 강해’, ‘화엄경 게송 전집’ 등 다수의 저서를 선보였다. 
정암사 주지 법상 스님은 “주련의 한글화가 절실하다”며 “위드 코로나로 접어들면 삼계주전의 주련도 바꿀 것”이라고 했다.

一光東照八千土 (일광동조팔천토) 
大地山河如杲日 (대지산하여고일) 
即是如來微妙法 (즉시여래미묘법) 
不須向外謾尋覓 (불수향외만심멱)

한 줄기 빛으로 팔천토 비추니 
대지산하가 해처럼 밝아지네. 
이것이 여래의 미묘한 법이니 
모름지기 밖에서 찾지 말라.

하동 쌍계사 화엄전에 걸린 주련이다. 직역은 쉬우나 뜻을 새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앞의 두 구와 뒤의 두 구가 문맥상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광(一光)·미묘법(微妙法)을 간파하지 않고는 100년을 들여다보아도 그 깊은 뜻 꿰뚫지 못할 것이다. 

정암사 삼계주전.
정암사 삼계주전.

법보신문에 연재 중인 ‘법상 스님의 사찰주련’에서는 간단명료하게 풀어냈다. ‘하나의 빛(一光)’은 여일(如一), 일승(一乘), 진리(眞理)와 맥이 닿기에 ‘참다운 하나의 진리’라고 풀었다. 팔천토(八千土)를 직역하면 ‘온 세상’인데 좀 더 상세한 해설을 보자. 

“팔천토는 팔만사천 세계이자 팔만사천법문이다.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병이 팔만사천병이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번뇌도 팔만사천번뇌이다. 병에 따라 약이 있듯이 팔만사천법문이 생겨나는 것이다.” 

불전이나 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미묘법’을 이 게송에서는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으로 보았다. ‘밖에서 찾지 말라’는 말구를 사유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법상 스님의 총평에 귀를 기울여 보자. 

“진리가 이 세상에 드리움에 뭇 생명(중생)은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만난다. 마지막 구절은 자성시불(自性是佛)을 강조한 표현이다. 우리의 마음에 부처의 성품이 있으므로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하여 번뇌에 물들지 아니하면 곧 부처를 만날 수 있음을 말한다.”

불성과 청정심이 전하는 의미를 다시금 새겨가며 게송을 음미하다보면 통하지 않았던 전·후구의 문맥이 자연스레 이어지며 부처님 법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이 게송의 핵심을 적확하게 풀어낸 법상 스님의 가르침 덕이다. 저서 ‘사찰에서 만나는 주련’을 펼쳤거나 ‘법상 스님의 사찰 주련’에 시선을 고정시킨 독자들은 안다. 대승경전과 선어록에 대한 탁월한 통찰에 해박한 한문지식이 더해져 빚어낸 사찰주련 해설이 일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법상 스님은 ‘법화경 강해’, ‘화엄경 게송 전집’ 등 다수의 저서를 선보였다. 
법상 스님은 ‘법화경 강해’, ‘화엄경 게송 전집’ 등 다수의 저서를 선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충북 단양의 황정산 원통암에 올랐다. 결혼 앞두고 전근해야 하는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을 이끌고 소풍 삼아 오른 ‘5월 산행’이었다. 암자에 닿자마자 가슴이 출렁였다.

“스님 되고 싶다!”

1970년대의 허름한 암자를 보자마자 출가라니!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3대를 내려오는 동안 적어도 스님 한 명은 배출한 집안이고 보면 숙연일 터였다. 3남3녀 중의 장남임에도 고등학교 졸업 직후 삭발염의 했다. 

낙숫물이 돌을 뚫듯 ‘금강경’, ‘반야심경’ ‘법화경’ 등의 경전 공부에 매진했다. 어제 접한 부처님 말씀이 오늘 새롭게 들리기라도 하면 무척이나 행복했다. 중국 선의 진면목을 보려면 ‘도덕경’ ‘장자’ 등에도 정통해야 함을 알아차리고는 중국 고서 등의 외전도 독파해 갔다. 

해외로 자주 떠나는 스님들을 곱지 않게 보곤 했다. 성지를 순례하는 일정이라 해도 해외 체류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인데, 그 정재로 법보시를 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법상 스님도 결국 미얀마 순례길에 올랐다. 원래 가기로 했던 스님이 부득이한 일로 동참할 수 없어 대신 떠난 길이다. 고대도시 바간(Bagan)! 2500여개의 탑 사이를 합장한 채 걸으며 여행과 순례 사이의 엄청난 간극차를 처음으로 실감하며 선지식들이 만행을 떠난 연유를  알게 됐다. 그 때부터 ‘백문이 불여순례(百聞而 不如巡禮)’라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

스리랑카로 향하는 비행기에도 몸을 실었다. 부처님의 나라에 스민 법향에 6개월 동안 흠뻑 젖었는데 유독 벽화에 눈길이 쏠렸다. 스리랑카 불화 특유의 화려한 색채에 끌린 게 아니다. 부처님 전생담과 일대기를 비롯한 경전 속 이야기의 정수를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게 표현한 점이 이색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느 사찰을 가던 벽화는 말을 걸어 왔다. 아니, 법담을 들려주었다. 

삼계주전 벽화는 부처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삼계주전 벽화는 부처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귀국 후 전국의 사찰을 답사했다. 한국의 산사가 들려주려 하는 부처님 말씀을 직접 듣고 전하고 싶어서였다. 벽화에 머문 시선은 주련으로도 이어졌다. 6년여의 긴 여정 끝에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와 ‘사찰에서 만나는 주련’의 명저를 연이어 선보였다. 예술·학술적 접근이 아닌 그야말로 선과 교의 진수에 방점을 찍은 진귀한 강설집이요 법문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찰에서 만나는 주련’의 후기에 적은 한 문장이 빛난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방곡곡의 사원을 순례하면서 자료를 수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도 많았다. 순례의 기쁨과 더불어 자신도 모르게 시나브로 익어지는 공부가 그것이다. 이러한 기쁨이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에 쓰인 사진은 모두 법상 스님의 작품이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색감을 뽑아냈는데 보정솜씨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색채다. 

“계절과, 지역 날씨를 고려해 현장에 도착하지만 ‘좋은 빛’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한나절 정도 기다리는 건 다반사였습니다. 서두르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도 있었습니다. 벽화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는 여유입니다.”

사유의 사유를 거듭하며 의식의 폭을 넓혀갔다는 뜻일 터다. 어느 경전의 어느 부분을 인용해 이야기를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그 자리서 잡고, 돌아와서는 자료를 보충해 가며 집필했을 것이다. 사진과 글은 법상 스님의 네이버 카페 ‘선재선재’에 올렸다. 전국 사찰 순례가 마무리될 즈음 온라인에 축적된 자료들을 엄선해 책으로 엮었다. 부처님 일대기, 경전, 설화,고승과 선사, 호법신장 등으로 분류하고는 그 주제에 맞는 벽화를 선택했다. 

제주 월영사의 벽화와 함께 소개한 ‘조주 선사의 끽다거’의 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차를 마시는 일과 같은 다반사적인 일상 정황 속에서도 본심이 작용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려는 조주선사의 의도가 숨어 있다.’ 하여,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심(心)은 어떤 마음인지를 여쭈어 보았다.

“단순히 ‘평소의 마음’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치우쳐 있지 않은 마음’입니다.” 

분별, 망상에 흐트러진 마음이 아니라 실상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이라는 뜻일 터다. 

벽화는 세월에 스쳐 끝내 지워질 것이니 언젠가는 새로 그려야 한다. 새 전각이 들어서면 새 벽화 또한 필연이다. 현 시대에 벽화를 조성할 때 감안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선적 세계를 잘 드러낸 대표적인 선화 중의 하나가 십우도(十牛圖)입니다. 돈오(頓悟)의 경지를 직관으로 엿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어 스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소재의 벽화는 너무 많습니다. 선원을 넘어 대웅전이나 관음전의 벽화에도 등장할 정도입니다. ‘화엄경’ ‘법화경’만 해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벽화 소재의 다양성을 지향해야 할 때입니다. 벽화의 배경으로 넣은 산수화가 너무 지나치다는 점도 꼽을 수 있습니다. 전 화면을 가득 채우다시피한 학, 폭포, 구름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찾는데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가능한 ‘말씀’ ‘가르침’에 집중한 그림이어야 합니다. 한눈에 보고도 불자라면 ‘아, 그 장면이구나!’ 할 정도여야 합니다.”  

신도를 위한 공간 구성이 이채롭다.
신도를 위한 공간 구성이 이채롭다.

어느 날부터인가 신도들이 사찰참배 중에 본 글귀라며 풀어 달라 청해왔다. 자구해석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신도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주고자 떠난 길이었다. 벽화와 달리 주련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렬종대로 서 있는 10개의 과녁을 화살 하나로 단번에 뚫는 통쾌함이 있습니다. 불보살님의 말씀을 몇 개의 한자에 응축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무상, 무아, 고, 열반, 연기, 불이, 중도, 상생 등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주련을 조성하는 데 감안해야 할 건 무엇일까?

“현대인은 한자에 약합니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 올리는 불자도 주련의 뜻을 헤아려 보려는 시도조차 안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주련은 ‘전법’보다는 ‘장엄 역할’에 충실하게 됐습니다. 한글로 써 내려간 주련이 많이 걸리기를 희망합니다. 한문이냐 한글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방식을 선택했을 때 부처님 법을 더 넓게 펼칠 수 있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위드 코로나(With Corona)로 접어들면 정암사 삼천불전 주련도 한글로 바꾸려 합니다.”

‘사찰에서 만나는 주련’을 보완해 법보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법상 스님의 사찰 주련’이 마무리되면 증보판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주심부 1’을 선보인 법상 스님은 그 두 번째 권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중국 북송 시대의 영명연수 스님은 자신이 펴낸 ‘종경록(100권)’을 4권으로 압축했는데 그것이 바로 ‘주심부(註心賦)’다. 화엄, 법화, 유식, 중관, 능엄선, 열반, 정토, 밀교 등의 핵심요소가 함축돼 있다. 여기에 천착한 연유가 궁금했다.

“수 년 전, 우리 시대의 대강백이셨던 각성 큰스님이 범어사에서 ‘주심부’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때 청강했습니다. 5일 간의 짧은 강설이었지만 강렬했습니다. 정말이지 ‘묵었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법열을 경험했습니다. 다소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심부’만은 온전히 번역해 내 놓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정재와 시간 등의 여건이 허락된다면 어떤 불사를 시작하고 싶은지 여쭈었다.

“라오스, 미얀마,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한 남방사찰의 벽화를 담아내고 싶습니다. 라오스와 스리랑카의 벽화 자료는 거의 마무리 됐습니다. 미얀마 벽화만 마무리되면 집필할 수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와는 다소 결이 다른 남방불교가 전하는 부처님 법을 담고 싶은 것이다. 법상 스님의 장서가 꽂혀있는 서재에 이미 각묵 스님의 ‘니까야’ 전질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부대중과 나누고 싶은 일구를 청하니 ‘법화경’의 방편품 한 대목을 전했다.

‘사리불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일심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이해하고 받아 가지라. 여래의 말씀은 허망하지 않느니라.’

삼계주전 전각 서까래.
삼계주전 전각 서까래.

정암사 삼계주전(三界主殿)을 참배할 때 전각 내외의 서까래를 유심히 보시라. 부처님 말씀이 새겨져 있다. 법상 스님의 전법 원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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