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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18)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1)

평생 식지 않은 구도열정이 위대한 불교사상가 ‘원효’ 탄생 배경

화쟁‧일심 중심으로 한 사상연구 진전 불구 역사적 연구 부진
‘고선사서당화상비’ ‘송고승전’ ‘삼국유사’ 등 자료 극히 제한
원효, 신역 경전 섭렵 통해 동아시아 불교 과제 인식·해결 모색

‘고선사서당화상비’는 9세기 초반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원효 관련 전기 기록물이다. 동국대 소장 비편.
‘고선사서당화상비’는 9세기 초반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원효 관련 전기 기록물이다. 동국대 소장 비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비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비편.

한국불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신라의 원효를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00년대 초기부터 원효는 주목을 받아 저술들이 수집 정리되기 시작하였으며, 최근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추진되어 적지 않은 분량의 저서와 논문이 축적되었다. 특히 원효의 저술 발굴과 주석 작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화쟁(和諍)’과 ‘일심(一心)’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관한 연구도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에 관한 연구에 비하여 역사적 연구는 부진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원효 연구는 저술에 의한 사상의 규명 못지않게 그의 행적을 살펴보는 역사적인 접근방법도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원효 행적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활발하지 못한 것은 전반적으로 불교사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학계 상황과 관련된 것이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관련 사료의 부족에 있는 것 같다. 유교사관에 의거하여 역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불교 관련 사실들이 대부분 누락되었으며, 전해지던 자료들도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세한 자료지만 그 자료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나 연구방법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특히 원효에 대한 전기자료는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료의 설화적인 성격이 역사적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본고는 원효의 전기 전체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서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원효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연대를 알 수 없는 설화적 자료지만, 면밀한 검토를 통해 원효의 행적을 시기별로 구분해 이해함으로서 원효 사상의 변화과정을 유추해 보려고 한다. 원효 저작의 상호 인용에 의거해서 저술 연도를 추정해 보려는 작업을 보완하는 의미도 없지 않을 것이다.

원효의 전기자료로는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上碑)’, ‘송고승전’의 ‘원효전’,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 등이 있고, 이밖에는 단편적인 자료가 약간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에서 ‘효사본전(曉師本傳)’과 ‘효사행장(曉師行狀)’ 등의 자료 이름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일연(1206∼1289) 당시까지 원효의 행적에 대한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고려 명종대(1170∼1197)에 수립된 ‘분황사화쟁국사비’도 일찍이 파괴되어 ‘대동금석서’에 일부분의 탁본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며, ‘해동고승전’도 1∼2권만이 전하여 원효전 부분은 결실되었다.

이상에서 열거한 자료 가운데 ‘고선사서당화상비’는 원효 입적후 130여년 지난 9세기 초반(800∼808)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기 기록물이다. 이 비는 일찍이 부서져 4조각만 남아 있고, 마멸된 부분이 많아 판독하기에 어려움이 많지만, 입적 연대와 입적 장소의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 있어서 원효의 생존연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공(空)‧유(有) 논쟁이 치열했던 불교계 상황과 ‘십문화쟁론’과 ‘화엄종요’ 등의 저서에 대한 당시대의 평가 내용도 원효불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다음 ‘송고승전’은 988년 송의 승려 찬녕이 태종의 칙명을 받아 완성한 고승전으로서 ‘원효전’은 권4 의해편에 수록되었는데, 원효의 전기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금강삼매경론’의 저술 경위에 초점을 맞추었고, 또한 그 내용이 전체 분량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는 “원효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始末)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큰 업적은 ‘당전(송고승전)’과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어서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 특이한 사적만을 쓴다”고 일연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원효의 대중교화의 무애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로써 현존하는 원효의 전기자료는 몇 종뿐이며, 그나마도 기본이 되는 자료인 ‘송고승전’과 ‘삼국유사’ 내용이 찬자가 서술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에 따라 행적 가운데 일부분만 선별하여 수록하였기 때문에 원효의 생애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서술은 어렵게 되었다.

원효 행적 가운데 연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 기록에 의해서 출생연대가 진평왕 39년(617)이었고, ‘서당화상비’ 기록에 의해서 입적 시기가 신문왕 6년(686) 3월30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의상에 대한 기록에 의해서 원효가 의상과 함께 2차례 중국 유학을 시도했던 연대가 진덕여왕 4년(650)과 태종무열왕 8년(661)이었으며, 원효의 저서 가운데 유일하게 저술연대가 표기되어 있는 ‘판비량론’의 문무왕 11년(671) 등의 사실뿐이다. 그밖의 원효 행적은 대부분 설화적인 내용으로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자료를 자세히 검토하면 분명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선후 관계는 파악할 수 있으며, 그러한 선후 관계의 문맥을 통하여 원효의 생애에서 몇 차례의 커다란 사상적 전기를 맞았던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로서 그의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 아버지는 담내(談㮈)나마(11위)였음을 보아 6두품의 신분 출신으로 이해된다. 중급 귀족에 속하는 6품족 출신은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문적 실력에 의해 출세를 모색하고 있었고, 이들은 ‘국사(國士)’로 불리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평왕대(579∼632) 지배체제의 정비에 상응하여 신분의 구분이 고정화되어 가는 것에 반발하여 6두품 이하의 중급 귀족들 가운데 불만을 표출하는 인물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진평왕 43년(621)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로 망명한 설계두(薛罽頭)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원효가 15세 즈음 출가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원효가 출가한 이후의 수학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대사의 덕은 숙세(宿世)로부터 심었기에 실로 태어나면서부터 알았다. 자기의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스스로 깨달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을 좇지 않았다.”(‘서당화상비’). “관모지년(丱髳之年, 15세)에 홀연히 불문에 들어가서 스승을 따라 수업하고 유력함에 일정함이 없었다.”(‘송고승전’).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삼국유사’)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 해석하면 원효는 일정한 스승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학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원효의 스승으로 영취산의 낭지(朗智), 오어사의 혜공(惠空), 열반종의 보덕(普德)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낭지는 뒷날 의상의 제자가 되는 지통의 스승이었으며, 원효가 사미 시절 반고사에 있던 그로부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의 저술을 권유받았다고 하는데, 원효의 가장 이른 시기 저술로 추정된다. 그리고 혜공은 원효가 여러 불경의 주소를 지으면서 질의도 하고 희롱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통일 뒤에는 의상과 함께 보덕으로부터 ‘열반경’을 배웠고, 당에서 귀국한 의상에게도 화엄학에 관한 문의를 하고 있던 것을 보아 구도행각은 평생 계속되었음을 볼 수 있다. 위대한 불교사상가로서의 원효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고,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도 아니라 평생의 식지 않은 구도열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원효는 34세 때인 진덕여왕 4년(650)과 46세 때인 태종무열왕 8년(661) 평생 도반 관계였던 의상과 2차에 걸쳐 중국 유학을 시도하였는데, 주목할 사실은 이때 이미 원효는 상당한 수준의 불교학자로서 분명한 문제의식과 유학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와 의상의 중국 유학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고자 했다. 현장삼장 자은의 문하를 사모해서였다. 그러나 인연이 어긋났기에 푸근한 마음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원효전). “(의상은) 나이 약관(弱冠)에 이르러 당나라에 교종이 융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유행하고자 하여 길을 떠났다.”(의상전) 원효와 의상은 중국 유학을 시도하기에 앞서 스승을 찾아 불교를 공부하고 신라에 전해져 온 경전들을 섭렵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 유학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관 19년(645) 이래 현장의 귀국과 경전번역으로 인한 중국 불교계의 변화를 주목하고, 새로운 불교를 직접 배우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신라에서는 법흥왕 14년(527) 불교를 공인한 때로부터 1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진흥왕대의 각덕‧명관, 진평왕대의 지명‧원광‧담육‧안함, 선덕여왕대의 자장에 이르기까지 유학승들이 뒤를 이어 귀국하여 중국불교를 수입하였으며, 아울러 진흥왕 26년(565)에는 명관이 불경 1700여권, 선덕여왕 12년(643)에는 자장이 불경 400여함을 가져오는 등 경전들이 속속 전해져 와서 불교 연구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현장이 번역한 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가사지론’이 완성되자 곧 바로 신라에 전해져 왔던 사실이었다. 고려중기의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에서는, “당나라 문황(文皇,627∼649.5)이 신라왕의 표문으로 ‘유가사지론’ 100권을 보내주었다. 이 무렵 응리원실종(應理圓實宗), 즉 법상학이 없었는데, 이 땅에서도 점점 융성하게 되었다. 원효법사가 이끌고 태현대통이 뒤를 이어 따르매 등불이 전해져 타오르고 대대로 법을 이었다”라고 하여 ‘유가사지론’이 수입된 사실을 특필하고 있었다. ‘유가사지론’의 번역이 완료된 것은 정관 22년(648) 5월이고, 김춘추가 당에 가서 당태종을 만나고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당태종이 찬술한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된 ‘진서(晉書)’를 받아온 때가 그해 12월이었음을 고려하면, ‘유가사지론’도 그때 김춘추가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원효가 진덕여왕 4년(650) 당의 현장삼장 자은의 문하를 사모해서 1차 중국 유학을 시도한 것은 ‘유가사지론’을 접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1차 유학 시도는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에게 정탐자로 잡혔다가 수십 일만에 겨우 빠져 되돌아옴으로서 실패하였다. 그 뒤 태종무열왕 8년(661)에 의상과 함께 2차 당 유학을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중도에서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닫고 되돌아오게 되었다. 원효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저술한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유가사지론’을 인용하고 있었음을 보아 그 경전을 접한 것이 유학 결행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승기신론별기’의 서문인 종체(宗體) 부분에서 중관학과 유식학 사이의 공(空)‧유(有) 대립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경전으로 ‘대승기신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원효불교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이로써 원효는 일찍부터 스승들을 자유롭게 찾아 불교를 배우고, 신라에 전해온 경전들을 섭렵한 토대 위에서 현장의 번역으로 인한 중국의 불교계의 변화에 대한 주목과 신역 경전의 섭렵을 통해 신라불교계뿐만 당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불교계의 과제를 누구보다 먼저 인식하고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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