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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종학연구소 설립의 꿈

‘학자적 이성’과 ‘수행자적 믿음’ 변증적 종합 필요

종교·신앙 대상들 속에는 비합리적·비이성적 요소들 산재
학적인 엄밀성으로만 연구하게 되면 있는 것도 놓치게 돼
‘박사스님’들이 장점 잘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종학

신 교수는 ‘믿음’을 언어와 사유의 영역으로 들여놓고, 타인에게 설명하고 논증하는 작업을 ‘박사스님’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종학연구소’ 설립을 제안했다. 사진은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주최로 지난해 10월 열린 ‘교육아사리’ 스님들의 추계학술대회 모습.
신 교수는 ‘믿음’을 언어와 사유의 영역으로 들여놓고, 타인에게 설명하고 논증하는 작업을 ‘박사스님’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종학연구소’ 설립을 제안했다. 사진은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주최로 지난해 10월 열린 ‘교육아사리’ 스님들의 추계학술대회 모습.

불교를 대상으로, 승려가 아닌 일반인이 직업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곳은 근대 이후 서양의 대학이다. 제국주의가 한창 팽창하던 시절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설치해 인도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저들의 언어, 역사, 지리, 사회, 민족, 종교 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의 동양 진출은 이렇게 지역 경영과 연계되는 ‘지역학(地域學)’ 연구로 이어졌다. 당시 청나라와의 교역 문제로 각축을 벌였던 그들은 그런 식의 중국학(Sinology) 연구에도 박차를 가했다. 언어에 대한 학적 방법으로 중국보다 먼저 중국어 문법책을 쓴 서유럽의 학문도 그런 배경이고,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이 옥스퍼드에서 간행된 것도 그렇다. 독일 학자의 방대한 ‘베다’ 번역도 그렇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 진출을 위해 조선이 필요했던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대상화 하여 연구했다.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가 일본인 학자의 손에서 먼저 나온 것도 그런 배경이다. 그들은 조선의 언어, 역사, 지리, 민속, 사상 등등을 총체적으로 연구했다.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 숫자로 볼 때에, 대한민국의 한국학 연구가 일본을 능가하는 시기는 1970년대 이후였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대상화 하여 ○○을 연구함’이다. 이 글에서는 동그라미 속에 불교만 한정해서 대입해서 본다. 우주과학자가 은하계를 대상으로 연구할 경우, 별을 믿지는 않는다. 곤충학자가 말똥구리의 일생을 연구할 때에 그 대상에 특정 감정을 투입하지는 않는다. 대상화 하여 연구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불교학 연구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스님이나 신도들에게 불교는 과연 그와 같은 그런 대상일까? 그렇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특히 출가 수행자에게 불교는 삶의 전체이고 인생이다. 실존이다. 그들에게 불교는 대상이 아니고 주체이다. 재가 불자의 경우도, 적어도 자신 인생의 기준이 되는 가치에 있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가치와 윤리덕목을 총괄하는 ‘으뜸가는 가르침[宗敎]’이다. 그렇게 ‘으뜸 삼는 가르침’으로 불교를 한다.

대학에서 중세철학사를 배우다보면 다들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테르툴티아누스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는 있다. 근대 유럽 철학에 합리성이 싹을 틔우던 시절 신(GOD)의 존재 증명을 위해 안젤무스 등등이 시도한 사변적 논증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학적 엄밀성’을 추구하던 신학자들이다. 이 엄밀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경계 지점까지도 가본 사람들이다. 그 지점을 경험한 저들이, ‘학적 엄밀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 영역을 없는 듯이 잘라 내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철학적 문제로 끌어안아 학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학문으로 해도 안 되자, 끝내 버리지 않고 그 문제를 ‘믿음’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그런 면에서 도킨스의 반박은 상대 논파를 위한 표적 옮기기의 오류이다.

필자가 동경대 유학 시절 아까몬(赤門) 건너편 서점에서 처음 구입한 책이 ‘타르카브하샤 TARKAVHĀSĀ; 진리와 논리’이다. 범어 원문과 영어 번역이 나란히 있어 그런대로 읽을 수 있었다. ‘전지자인 부처의 존재 가능성 논증’ 부분은 지금도 가끔씩 펼쳐본다. 그 논증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정교한 추론과 변증은 연구자의 근성을 배우게 한다.

학자에게 학문적으로 도저히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사장시켜 없는 듯이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이 ‘남겨둠’이 때로는 새로운 지식으로 확장하는 출발점이 된다.

기존의 과학 지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사례가 발견될 때에, 보통의 과학자들은 우연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학 발견을 이룬 연구자들의 경우는, 차라리 기존의 과학 지식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새로 발견된 사례까지 포함해서 필연성을 입증하는 더 큰 그림을 그린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종교와 신앙으로 불리는 대상들 속에는 비합리적, 비이성적 요소가 산재해있다. 인간 이성과 합리성의 잣대 ‘만’ 휘두르고, 학적 엄밀성으로 ‘만’ 연구한다면, 있는 것도 놓치고 만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그 ‘있음’이 설사 현재의 학문 연구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해도 버려서는 안 된다.

‘믿음’에는 두 가지 층차가 있다. 처음부터 그냥 믿어지는 ‘믿음’도 있고, 학적 엄밀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 뒤에 나타나는 ‘믿음’도 있다. 어느 ‘믿음’이 더 효과적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지식은 결국은 ‘경험적 효과성’에 의해, 그 지식의 참과 거짓이 판별된다. 어머니는 그냥 부처님을 믿으셨다. ‘경험적 효과성’이라는 진리관에 입각해 볼 때에, ‘화엄경약찬게’를 돌돌 외우는 당신은 그 어느 화엄학자보다 화엄의 중중무진 연기 속에 사신다.

현재 한국에서 펼쳐지는 ‘불교학’을 보자. 일반인이 그 연구를 한 지는 아마도 필자 세대들이 2세대일 것이다. 1세대 우리들의 선생님들은 많이들 스님 하다 환속한 분들이 교수를 했다. 고인이 되신 서울대 심재룡 교수님, 동국대 이기영 교수님과 고익진 교수님 등 몇 안 되는 분들이 출가 경험 없이 학적 방법으로 불교를 연구했다. ‘믿음’과 ‘학문’이 구별되지 않던 시절, 위의 교수님들은 방법적 측면에서 불교의 학적 수준으로 높이 끌어올렸다.

학문의 ‘마당’에 들어온 이상, 학적인 연구 방법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학자의 운명이다. 그런데 출가하신 스님들이 불교를 대할 경우는 위에서 말했듯이 다른 부분이 있다. 바로 그 다른 지점에 종학(宗學)적 자세가 요구된다.

최근에는 스님이면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급격하게 늘었다. 조계종에서는 제도적으로 이런 분들을 ‘교육아사리’로 모셔 연구비를 드리고 주제 연구하게 하여 보고서를 내게 한다. ‘박사스님’, 이런 용어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분들은 아무리 학문적 글쓰기라고 해도, 부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부정하거나 반박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자교상위(自敎相違)’라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그런 면에서 필자 같은 연구자들은 자유롭다.

‘박사스님’들께서 장점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종학’이라고 생각된다. 철저하게 학적 엄밀성으로 불교를 연구하면서, 또 출가 스님이시니 수행을 해가면서, 그 과정에서 도저히 인간 이성이나 철학적 논증으로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나 주제가 출현되면, 그렇게 출현되는 지점에서 ‘학자적 이성’과 ‘수행자적 믿음’을 변증적으로 종합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을 언어와 사유의 영역으로 들여놓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설명하고 논증하는 작업, 이런 작업을 ‘박사스님’이 모여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칭 ‘종학연구소’ 설립을 제안한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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