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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19)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2)

당 불교계 최대 현안인 공·유 대립 ‘대승기신론’ 속 일심 사상으로 극복

원효 출가 전 행적 없어…군대나 화랑에 속했을 가능성 있어
구역 경전 시절, 현장의 신역 등장으로 당 불교계 변화 바람
원효, 2차례 유학 실패…구역 이해 속 신역 통해 깨달음 열어

 ‘삼국유사’ 권 제4 의해·제5 원효불기(국보). 부산 범어사 소장.
 ‘삼국유사’ 권 제4 의해·제5 원효불기(국보). 부산 범어사 소장.

역사적 인물로서 원효(617~686)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26대 진평왕・27대 선덕여왕・28대 진덕여왕・29대 태종무열왕・30대 문무왕・31대 신문왕 등 무려 6대의 국왕을 거치는 동안 신라는 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원효의 불교적인 삶도 그에 못지않은 여러차례의 전기를 맞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온몸을 던져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원효의 출가 전 행적에 관한 자료는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어릴 때 이름이 군부대의 이름인 서당(誓幢)이었다는 점을 들어 젊은 시절 일시적이나마 군대에 몸담았거나 화랑도에 속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6두품이라는 출신성분과 삼국 사이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을 감안하면 예상될 수 있는 사실이다. 불교 입문 뒷날인 문무왕 2년(662) 김유신의 고구려 원정 때 종군하여 당의 소정방이 보내온 암호를 해독해줌으로서 신라군이 무사히 귀환케 하는 군공을 세운 바도 있었다. 그러나 원효의 행적은 역시 불교인으로서 평가받아야 할 것인데, 그러한 불교적인 삶은 불문으로의 출가가 첫 번째 전기가 되었다. 출가 동기에 대해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으나, 학문적 진로의 갈림길에서 세속의 가르침인 유교를 선택한 강수(强首)와 다르게 출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세상일반의 가치에 동조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원효는 불교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뒷날 그의 저술에서 ‘노자’나 ‘장자’류의 문장투나 사상내용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원효의 출가 당시의 나이에 대해서는 총각 머리할 나이였다는 ‘송고승전’ 원효전의 표현에 의거하여 15세 무렵으로 인정하는 추세이지만, 그보다 늦었을 수도 있으며, 출가에 앞서 이미 유교나 노장사상 분야에서 상당한 학문적 지식을 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원효는 출가한 뒤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였는데, 일정한 스승에 매이지 않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구도행각이 대중불교운동 전개와 사상체계 수립의 열정과 창조적 능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직접 찾아 가르침을 받은 선지식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긴 사람만도 법화행자인 낭지, 대중불교운동가인 혜공, 열반종의 보덕 등이 확인되고 있으며, 대중불교운동의 선구자인 혜숙과 ‘금강삼매경’의 편자인 대안(大安) 등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낭지에게는 ‘법화경’의 일승사상, 혜공에게는 삼론종의 반야공관사상, 보덕에게는 ‘열반경’의 일승사상, 대안에게는 ‘금강삼매경’의 반야공관사상을 전수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밖에 원광과 자장 등에 의해 수입된 ‘섭대승론’의 구유식사상을 접할 수 있었으며, 자장에 의해 정비된 사분율종의 계율사상 등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뒷날 그의 저술 곳곳에서 ‘범망경’과 ‘영락경’의 대승보살계에 의거해 소승계를 비판하고 있던 내용에서 확인된다. 무엇보다도 진흥왕 대부터 100여년간 유학승들에 의해 중국의 선진적인 불교가 계속 수입되고 있었으며, 특히 진흥왕 26년(565)에 1700여권, 선덕여왕 12년(643)에 400여함 등 한역경전이 속속 전래되어 옴으로서 원효가 중국에 유학을 시도하는 진덕여왕 4년(650) 이전에 이미 구역경전들을 상당히 폭넓게 섭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관 19년(645년) 현장이 당 장안에 귀환한 이후 당 불교계의 변화 소식과 신역경전의 전래는 원효에게 상당히 경이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정관 19년(645) 1월 현장(玄獎, 602~664)이 17년간에 걸친 인도 구법여행을 마치고 장안에 돌아오자, 당태종은 2월에 칙령을 내려 번경원을 설치하고 현장이 가져온 경전들을 번역케 하였다. 국립 번역기관인 번경원에서 새로 번역한 경전은 76부 1347권에 이르는데, 구마라습 등 역대 번역삼장들이 번역한 경전의 총량 469부 1222권에 비하면 현장의 번역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중국의 경전 번역사에서 한 시대를 그어 현장 이전의 번역을 구역, 현장의 번역을 신역이라고 구분되었는데, 한자 한구절도 소홀함이 없는 직역 위주의 정확한 번역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현장이 번역한 경전은 유가행파의 불교가 중심을 이루었고, 특히 현장의 제자들에 의해 호법(護法)의 학설을 중심으로 하여 법상종을 성립시켰다. 

그 결과 7세기 중반 당 불교계는 구역경전과 신역경전, 구유식과 신유식 사이에 갈등이 야기되었으며, 급기야 불교계의 전면적인 변화로 확대되어 근본적인 과제가 새로 대두되었다. 첫째 같은 대승불교 가운데서 일승과 삼승의 대립, 둘째 같은 삼승불교 가운데서 중관과 유식 사이의 공(空)・유(有)의 논쟁, 셋째 같은 유식불교 가운데 구유식과 신유식의 논쟁, 넷째 불성을 둘러싼 유무 논쟁이었다.

당에서 불교계 변화가 시작될 때 이미 구역불교에 대한 이해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원효는 이런 소식에 누구보다 먼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진덕여왕 3년(649) 초 김춘추에 의해 전해진 ‘유가사지론’은 원효의 주목을 받았고, 급기야 당 유학을 결심하게 하였던 것 같다. 원전을 찾아 인도에 갔던 현장이 특히 중요시한 경전이 ‘유가사지론’이었고, 귀국하여 먼저 번역하기 시작하여 정관 22년(648) 5월 100권으로 완성하였는데, 당태종도 특별한 관심을 표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원효는 그 다음해 초 전해져온 이 경전을 곧 접했던 것 같은데, 당에 유학을 시도하기 전의 저술인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이 책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효의 독자적 불교사상체계 수립의 중심적인 경전은 ‘대승기신론’인데, 연구 시작 단계에서 작성된 연구노트인 ‘별기’의 서문인 종체 부분에서 중관과 유식 사이의 공・유 대립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 경전으로 ‘대승기신론’을 언급하고 있었다. 현장의 신역 이전의 구역경전을 폭넓게 섭렵하고, 구역불교인 삼론종의 반야공관사상・섭론종의 구유식사상・‘법화경’의 일승사상을 이해하고 있던 원효에게 신역불교, 특히 신유식은 남다른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 불교계에서 제기된 4종 과제 가운데도 특히 중관과 유식 사이의 공・유 대립을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원효의 탁월한 역사의식 소산이라고 본다. 불교의 생성 발전과정에 대한 원효의 역사적인 이해방법이 공・유 대립이 여타 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서 인식케 하였던 것이다. 공・유 대립은 원래 인도 대승불교 가운데 중관학파와 유가행파 사이의 논쟁이 중국 불교계에 이월된 역사적인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당 불교계의 문제가 신라로 확대됨으로서 동아시아 대승불교권에 편입되어서 당과 함께 중심무대의 하나가 되었다.

진덕여왕 4년(650) 원효는 34세 장년으로서 평생 도반 관계인 8세 연하 의상과 함께 당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원효의 당 유학 시도 동기에 대해서는 중국 측 자료인 ‘송고승전’에서만 전해주고 있다. 즉 ‘의상전’에서는 당에 교종이 융성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는데, ‘원효전’에서는 현장삼장과 자은의 문하를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여 현장의 신역경전과 신유식학에 원효가 특별한 관심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1차 유학 시도는 실패하고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 인용한 ‘최후본전’과 ‘원효행장’을 통해 확인된다. 즉 의상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고구려 변방의 순라군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면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원효와 의상이 함께 육로로 고구려 내지를 관통하여 요동까지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때는 요하를 국경선으로 하여 고구려와 당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앞서 영양왕 23년(612) 수양제의 이른바 백만대군을 물리친 뒤 중국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하여 요하 동쪽 강변을 따라 천리장성을 쌓았다. 

보장왕 4년(645)에는 당 태종의 대규모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소규모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보장왕 8년(649) 5월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고구려 원정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겨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 때 원효와 의상이 요동에 이르렀다가 곤란을 겪고 되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의 2차 당 유학의 시도는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부석본비’에 의거하여 태종무열왕 8년(661) 해로를 택하여 당주(당항성) 경계에서 토굴 속에서 자다가 깨우침을 이룬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부석본비’ 의상의 2차 시도 사실에서 원효의 이름이 빠진 것은 원효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먼저 요동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사건과 뒤에 당주 경계에서 원효가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사건은 같은 해에 연이어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이 새로 제기되었다. 즉 원효는 661년이 아니라 650년 같은 해에 먼저 육로의 요동에서 실패하고, 뒤에 다시 해로의 당주 경계에서 깨달음을 이루면서 당 유학을 그만두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료에 근거한 주장은 아니며, 더욱 당시 삼국 사이의 정세나 교통의 사정을 고려할 때 같은 해 두 번의 시도는 무리라고 보며, 종래의 주장대로 의상이 해로로 당에 간 태종무열왕 8년(661) 2차 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추론이다. 더욱 1년 앞서 백제가 멸망되어 당주 지역을 통한 해로의 위험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점도 고려된다.

결국 원효는 현장 신역으로 말미암은 당 불교계 변화의 소식을 접하고. 특히 신역의 ‘유가사지론’을 읽고 진덕여왕 4년(650) 서둘러 의상과 육로를 선택하여 요동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당에서 속속 전해져오는 신역경전들을 섭렵하는 한편, 당 불교계의 최대 현안인 공・유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체계의 수립을 위해 ‘대승기신론’의 연구를 계속하여 일심(一心) 사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갔던 것으로 보며, 그 연구노트인 ‘별기’를 작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효와 의상은 오래 기다린 끝에 11년 만인 태종무열왕 8년(661) 2차로 당을 향해 출발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마침 1년 전 백제를 멸망시켜 해로가 활짝 열린 것도 출발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효가 당주 경계로 가던 도중 직산 근처 토굴 속에서 깨달아 당 유학의 꿈을 접고 귀환함으로서 의상만이 홀로 당 유학을 관철하게 되었다. 원효의 깨달음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깨쳤다는 것인데,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과 함께 유식학의 유심론적 세계관의 이해가 그 바탕이 된 것이다. 원효가 깨달음을 이루고 토로했다는 오도송은 바로 ‘대승기신론’에서 인용한 문귀(文句) 그대로였던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리고 유심론적 세계관은 구마라습 계통의 반야공관사상에서는 보이지 않고, 현장에 의해 수입된 신유식불교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었다. 원효의 깨달음은 구마라습 계통인 ‘반야경’의 공관사상과 ‘법화경’의 일승사상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다시 10년 이상 ‘대승기신론’을 집중 연구하고, 그와 함께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현장 역의 신유식 경전들을 폭넓게 섭렵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경지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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