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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교적 역사관의 정립

종학 안목으로 세상 구성·기술하는 학승 필요

‘현재적 행위’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재구성에는 평가 수반
불교 역사도 선택해서 서술방법 정하는 현재적 행위 작동
고승 등 근현대불교사 재조명하고 기록할 때도 적용돼야

신규탁 교수는 “스님들이 3업을 던져 생을 살아내는 수행자의 ‘현재적 행위’로 세상을 기록한다면 그것 또한 종학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불교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했던 일연 스님을 기념하는 군위 인각사 삼국유사박물관. 사진=인각사 홈페이지.
신규탁 교수는 “스님들이 3업을 던져 생을 살아내는 수행자의 ‘현재적 행위’로 세상을 기록한다면 그것 또한 종학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불교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했던 일연 스님을 기념하는 군위 인각사 삼국유사박물관. 사진=인각사 홈페이지.

세월의 무대 속에서 일어나는 한 개인의 삶이나 나아가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세상을 보면, 그 속에는 무수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 지난 ‘무수한 일들’을 사람들은 ‘기록’해 왔는데, ‘기록하는 행위’에는 반드시 기록하는 주체가 있게 마련이다. 물론 그 주최는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필자가 종학(宗學)을 논하는 이번 글에서는 ‘기록하는 행위’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의 행위는 크게 세 방면으로 드러난다. 육체를 매개로 한 행위,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한 행위, 사유를 매개로 한 행위,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을 분석해서 들여다보면, 그런 행위를 하는 지금 이 순간 이전에 축적된 과거의 행위가 있다. 과거의 축적됨이 없는 진공 상태에서의 행위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의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축적되어 과거가 되고, 그렇게 축적되어진 행위는 또 다시 다음 순간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하여 과거-현재-미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간순간의 행위 알갱이들이 모여 다발지고, 그렇게 다발진 덩어리는 시간의 축으로 보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기록하는 행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들여다보자. 현재까지 축적된 행위의 다발을 매개로 과거에 벌어진 ‘무수한 일들’을 소환한다.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현재적 행위’가 있기 때문에 지난 ‘무수한 일들’에 대한 소환이 가능하다. 현재와 과거는 단순하게 시간의 흐름으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현재에 작동하고, 현재가 과거를 재구성(re-construction)한다. 예를 들어 이해를 돕기로 한다.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라는 한 인물이 10월26일 돌아가셨다. 각 신문마다 각 정당마다 다양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벌어진 ‘일’은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인데, 왜 이렇게 상반된 반응들이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당사자가 과거에 한 ‘일들’이 현재의 신문사와 정당에 작동하고 있고, 현재의 신문사와 정당의 ‘현재적 행위’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구성에는 평가가 수반된다.

불교의 역사를 기술함도 그와 같다. 역사는 사건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순간순간 무수하게 많다. 그 하고 많은 일들 중에서 어떤 일들을 선택해서,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일들을 어떻게 서술할지에는 ‘현재적 행위’가 작동한다.

‘조작’과 구별하기 위해서 필자는 위에서 ‘재구성’이라는 용어를 썼다. 인간의 앎(지식)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있는 그대로’란 실재하지 않는다. 나와 남이 상호간에 경험적으로 서로 확인 가능한 것은, 오직 ‘현재적 행위’ 즉 해석하고 평가하는 행위뿐이다.

이런 역사와 관련하여 현재 우리나라 대학에는 불교를 소재로 연구하는 교수들이 계신다. 그런데 역사 연구자 전체의 인원을 감안할 때에 숫자적 열세에서 많은 부분을 감당한다. 우리 고대 역사에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이 큰 것에 비교하면 대학의 소위 ‘교수 티오’가 적다는 말이다. 연구자 숫자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출가 수행자 중에서 역사학 방면의 ‘학승(學僧)’ 수급은 더욱 절실하다. ‘삼국유사’를 집필하신 일연 스님 한 분의 영향력을 상기하자.

중국의 ‘시경, 대아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무념이조(無念爾祖)아, 율수궐덕(聿修厥德)하라.” 그대들의 조상을 잊지 않으려면 그분들이 남긴 덕을 닦으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족보를 연구하는 보학(譜學)을 율수지학(聿修之學)이라고 별칭하기도 한다. 조상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세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되어 인용한 것이다.

불교계를 돌아보면 코로나19 탓인지 요즈음은 그 횟수가 많이 줄었지만, 몇 해 전만해도 절집안의 각 문중들마다 문조(門祖) 선양을 위한 학술대회가 많았다. 용성, 경허, 한암, 경봉, 청담, 고암, 구산, 운허, 성철, 혜암 등등의 큰스님의 수행과 공덕을 선양하는 일은 문도로서 당연 의미 있는 일이다. 나아가서는 근현대불교사를 재조명하고 기록하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런 개별 스님 연구와 더불어, 나아가 개별 스님들이 모여 만들어진 승가공동체, 더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역사공동체, 그런 공동토대에 대한 역사 연구와 서술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현재적 행위’가 결국은 과거를 ‘재구성’한다고 위에서 썼다. 저마다의 입장과 안목에서 과거를 재구성하여 기술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기록자는 세상의 역사를 신(GOD)의 역사하심으로 재구성해 놓았다. ‘신약성경’은 그런 신의 역사를 완성한 것이라 평가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이란 그런 신의 역사하심이라고 믿고 부활의 그날을 준비한다.

위와 같은 기독교사관을 종교적이라고만 돌려놓을 일만은 아니다. 역사는 주체이다. 불교의 안목에서 세상을 재구성하여 역사를 정리서술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 지평 위에서 불교사를 자리매기고, 그렇게 자리매긴 불교사 속에서 위에서 말한 큰스님들의 삶과 수행을 조망해야 할 것이다. ‘일(一)’이 ‘다(多)’에 ‘즉(卽)’하는 것이고, ‘다’가 ‘일’에 ‘입(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역사관이다. 많은 사건들을 모았다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하는 행위를 통한 현재적 행위가 살아있어야 역사이다. 바로 이런 현재적 행위에 ‘종학의 안목’으로 세상을 구성하고 기술하는 학승(學僧)의 역할이 필요하다.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별세’를 계기로 지난 일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10·26 사태’ 이전 유신체제 당시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며 ‘아세아적 생산양식’ 관련 많은 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동경대 유학시절에는 중국 근대시기에 일었던 ‘혁명이냐 변화냐’ 관련 잡지를 많이 읽었다. 그랬던 필자 자신을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서양에서 재구성해놓은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역사 지평을, 또 모택동이 설계한 역사 해석을, 그것도 결국은 그들이 처한 역사 현실 속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현재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하지는 않았는가?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의 구상 속에서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시진핑의 구상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불교에서는 업(業)을 짓는 매개체로 신구의(身口意) 셋을 꼽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이글의 첫 부분에서 육체를 매개로 한 행위,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한 행위, 사유를 매개로 한 행위를 언급한 것이다. 가족을 단위로 했던 ‘마을공동체’를 벗어나 진리를 단위로 하는 ‘숲속공동체’로 들어온 스님들. 그 스님들이 3업을 던져 생을 살아내는 수행자의 ‘현재적 행위’로 세상을 기록한다면, 그것 또한 종학(宗學)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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