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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곰보이야기

기자명 이제열

동일한 소리라도 상반된 반응

우리집에 놀러왔던 곰보 할머니
“고모부”를 “곰보”로 들어 분노
원주 법문 갔을 때 만난 보살은
선뜻 자신을 “곰보보살”로 소개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적지 않게 신경을 쓴다. 잘 생기고 아름다웠으면 하는 욕구는 누구나 동일하다. 지나치게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 정신적으로도 위축감이 드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속칭 마마라고 불리는 병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정식 명칭은 천연두이다. 앓고 나면 얼굴에 팥알처럼 작은 상처들이 잔뜩 생겨나 평생 없어지지 않는, 흔한 말로 ‘곰보’가 되는 저주스러운 병이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과거 어렸을 적 초등학고 5학년쯤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우리 집에 할머니 한 분이 찾아 오셨는데 얼굴이 곰보였다. 곰보 할머니, 그런데 때마침 그날따라 시집간 고모님하고 고모부도 우리 집에 오셨다. 시간이 지나 저녁때가 되어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머니께서 나에게 고모부가 집안에 안보이니 밖에 나가 고모부를 불러오라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에 나는 문밖을 나와 동네를 향해서 “고모부! 고모부!”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이에 고모부는 내 소리를 듣고 동네 어귀에서 대답을 하고는 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고모부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안방에서 그 곰보 할머니가 나오시더니 “난 가야겠다. 애를 저렇게 버릇없이 키우다니 속이 상해서 밥이고 뭐고 먹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이를 본 어머니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난처한 표정으로 할머니에게 왜 그렇게 노하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곰보 할머니는 “방금 저 애가 동네에 들어가 곰보~ 곰보~ 하고 날 놀래대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때 나는 너무도 황당하고 억울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먹이기까지 하였다. 그 할머니는 나의 고모부 소리를 곰보 소리로 알아들은 것이다. 다행히 고모부가 당시의 일을 잘 설명해 주어 오해가 풀렸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일이다. 어느 때 강원도 원주 소재의 한 사찰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법회에서 법문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전화한 사람은 사찰에서 총무 일을 맡은 보살님이었다. 그 보살님은 나에게 고속버스를 타고 오시면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보살님을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이 걸작이다. “알아보기 쉬우셔요. 제 얼굴이 곰보입니다. 제가 곰보보살이거든요.”

당일 원주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그 보살님을 찾기 위해 두리번대고 있는데 한 여자 분 음성이 뒤에서 들려 왔다. “법사님! 저 곰보보살 여기 있어요.”

나는 그 보살님의 이런 행동을 보고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흠결 있는 외모를 감추거나 피하려하려는 기색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가 물었다. “보살님은 이런 얼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곰보라고 부르시면서 걸림이 없으시니 대단하십니다. 성격도 쾌활하시네요.” 그러자 그 보살님의 대답이 매우 감동적이다.

“과거에 저는 제 얼굴이 곰보라는 사실에 원망과 부끄러움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이런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상을 없애라고 하셨잖아요. 제 인생에 어쩌면 가장 크게 저를 억누르고 있던 그 생각을 버리고 세상 그대로 인정 하니까 모든 것이 즐겁더라고요. 곰보를 곰보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향한 남들의 눈과 입에 신경을 쓰고 산다. 만약 그것들이 나의 콤플렉스와 관련한 일이라면 감정이 상하게 된다. 두 분의 경우 할머니는 곰보 소리를 상처로 받아들인 반면 원주 보살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삼아 받아들였다. “고모부” 부르는 소리를 잘못 알아듣고 노여워한 할머니의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오히려 “곰보”를 평상의 호칭으로 삼고 살아가는 원주 보살님이 일반적이지 않다. ‘유마경’에 “세상의 소리를 들을 때에 메아리처럼 듣고 집착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이 있다. 참으로 보살도를 닦지 않고서는 행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608호 / 2021년 11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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