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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기자명 허남결

모임이 끝나갈 무렵에는 으레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다음에는 제가 사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더러 ‘언제’ 대신 ‘조만간’이라고 시점을 못 박는 사람도 있다. 셀 수 없이 했고,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찜 맛없는 인사말이 되고 말았다. 그때뿐이지 대부분 공허한 헛말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와 정감도 날이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약속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불자들이 사소한 말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말은 상응하는 행동이 수반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인식에 둔감하거나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밥값을 낸 지인에게 엉겁결에 ‘다음에는 내가’라고 호기를 부렸던 것에 불과했다. 약속의 농도는 이튿날부터 급격하게 묽어지기 일쑤였다.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투적인 약속도 많았을 것이다. 약속을 하는 것과 약속을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자기가 한 약속에 불성실한 것은 불망어계를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그런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괜히 무시당하거나 하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세상에는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을 신중하게 하고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약속을 오남용하는 사람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굳이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빈말을 과소비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가져다 줄 뿐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명제를 인간관계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우리가 당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배제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뭇잎은 이미 떨어졌지만, 눈은 아직 오지 않는다. 어떤 가수는 이맘때쯤을 쓸쓸한 계절이라고 노래했다. 11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만 남겨놓았다. 가끔 까닭 모를 적막감이 밀려온다. 어쩌면 그것은 이유 없는 ‘11월’의 절대적 고독일지도 모르겠다. 12월을 건너뛸 수 없는 11월은 아주 새롭게 시작하는 1월보다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다. 늦은 밤 가을을 향해 작별 인사라도 건네듯 찬비가 내렸다. 비가 그친 뒤 바람은 한층 더 냉기를 뿜을 것이 분명하다. 아쉬움보다 신선함이 더욱 간절해지기를 꿈꾼다. 젊음도 좋지만 익어감을 더 사랑하라는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시간은 배고플 때 비빔밥 먹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간다. 나만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곧 연말연시다. 이런저런 빌미로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된다. 그때마다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다음에는 제가 사겠습니다’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밥값을 내지 않은 멋쩍음을 벗어나기 위해 말로만 하는 의례적인 약속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먹을 것을 찾아 민가를 어슬렁거리는 북극곰만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사소한 언어공해가 심각한 인공재해를 낳는다.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했으면 적어도 한 달은 넘기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건강한 사부대중이 될 수 있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작지만 소중한 몸짓들에도 불교적 향기가 깃들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작은 실천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맑고 밝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말과 처신에서 멋을 부리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처음엔 멋있어 보였으나 갈수록 맛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겉멋보다는 속맛이다. 겉멋이 있다는 말보다 속맛이 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일종의 사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뭐 꿈이야 꿀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자문자답해본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바람은 차고 안개는 잦다. 일기예보는 추운 겨울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한다. 어렵게 만들어낸 ‘코로나와 함께’의 시간이 중간에 멈춰서는 일은 없기를.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11호 / 2021년 12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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