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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오채현의 ‘미륵불’ : 기층문화로서의 불교미술(끝)

민화적 미소엔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 담겨

민화, 사대부 그림 흉내 아닌 온 국민이 향유한 미술양식
한국조각의 익숙함 담아내면서도 작가만의 스타일 창조
조각 자체가 수행처럼 느껴져…진정한 행복으로 다가와

올해 봉선사에 전시된 오채현 작가의 ‘미륵불’. 높이 5m.
올해 봉선사에 전시된 오채현 작가의 ‘미륵불’. 높이 5m.
안성 국사암 석조삼존불상 중 본존 석불입상. 후삼국~고려초.
안성 국사암 석조삼존불상 중 본존 석불입상. 후삼국~고려초.

민화의 열풍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새롭다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대세라고 할만하다. 또한 그만큼 민화에 대한 이론적 연구도 착실히 다져졌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한다면 민화가 단순히 사대부의 그림을 어설프게 흉내 낸 아마추어의 그림이 아니라 왕실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향유했던 거대한 미술양식이었음을 한국미술사에 각인시켰다는 점이 아닐까. 그래서 민화의 ‘민(民)’은 민간이나 민속이 아니라 우리 민족기층에 깔린 감성을 대표하는 미술로 평가되기에 이른 것이다.

불교미술도 마찬가지로 인도, 중국과 교류하며 형성된 불교미술이 고전적 불교미술로서 주로 법당이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면, 들판에 그리고 깊은 산속에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조성된 불교미술은 민화적 불교미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민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 자유분방한 불교미술도 그저 고전적인 규범의 불교미술을 서툰 지방장인의 솜씨로 모방한 정도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기에 ‘은진미륵’으로 더 잘 알려진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조차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국보로 승격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은진미륵의 국보 승격은 그러한 미감이 이제 서서히 완연한 미술양식으로 인정받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식변화를 가져온 불교미술 중에 아마도 운주사 불상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운주사의 불상들은 만약 단독으로 하나만 존재했다면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많은 탑들과 불상들이 대규모로 조성된 덕분에 운주사는 단순한 지방 장인들의 서툰 작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버렸다. 덕분에 이러한 양식이 단지 기술력의 한계나 예술성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끔 만든 것이다.

만약 이런 양식이 이 시대에 다시 구현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더 재밌고 우리의 심연 깊은 곳까지 다가가는 불교미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화강암 조각가 오채현 작가의 불상 앞에서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이 작가를 모르더라도 환하게 살인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호랑이 조각이나 불상 조각을 보면 “아, 이 작품!”이라고 알아채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의 불상조각은 한편으로는 관촉사의 석조보살입상이나 ‘궁예미륵’으로도 불리는 안성 국사암 삼존불상 같은 고려 무렵의 불상을 닮았는가 하면 삼국시대의 고졸한 불상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마을어귀 조촐한 미륵당에 모셔진 조선시대의 미륵불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조각사의 저변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익숙함을 담아내면서도 그와는 분명히 달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오채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오채현, ‘해피 타이거’, 화강암.
오채현, ‘해피 타이거’, 화강암.

그는 ‘해피 타이거’로 불리는 호랑이 조각으로도 유명한데, 이 호랑이들을 보면 그의 조형성이 기본적으로 민화 속 호랑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피 타이거’와 민화 속 호랑이와의 유사성을 통해 그의 ‘미륵불’도 민화풍의 불상이자 ‘해피 붓다’라고 불러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듯하다.

그의 붓다와 호랑이는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행복해 보인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한 목적이 인생의 고(苦)로부터 벗어나 행복을 찾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행복이 어떤 것인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만 할 수 있을까. 또한 행복하겠다는 집착이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도 만들지 않는가. 그럼에도 오채현 작가의 불상이 보여주고자 하는 행복은 그런 표면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저 미소짓고 있는 불상은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오채현식 미소는 그와는 다르다.

우선 그의 조각은 단단한 화강암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돌만 화강암이고 그것을 기계로 깎아내었다면 화강암의 특징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조각들 앞에 서면 정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져 돌과 석공의 싸움을 치열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점차 덜어내어 드러낸 미소여서일까, 그의 불상과 호랑이의 ‘해피’는 집착이 아니라 덜어내는 가운데 생기는 것이며, 그렇게 얻어진 ‘해피’는 바위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화강암을 가장 화강암답게 표현하는 그의 거친 듯 부드러운 조각기법 자체가 마치 돌과 대화하는 듯한 그의 작업을 그대로 보여주는 덕분에 조각의 과정 자체가 수행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미소이기에 보는 이에게 더욱 진정한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의 불상들은 전국 사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야외에 있다. 돌이라서 비바람에 강한 덕분에 원래 돌부처는 야외에 많이 모셔졌지만, 석굴암 본존부처님처럼 굴 안에 모셔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오채현 작가의 불상이 법당에 주존으로 모셔진 곳은 접하지 못했다.

그의 불상을 많은 사찰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미술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고, 그의 불상이 아직 법당의 주존으로 모셔지지 않은 것은 불상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전통에 국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지금 현대 불교미술의 상황이다. 전통과 법식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다. 다만 지켜질 때도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바뀔 때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바꿔야만 좋은 것도 아니다. 오채현 작가의 불상이 지닌 민화적 미소는 아마 대승불교의 ‘대승(大乘)’을 곧 ‘민(民)’으로 보고자 하는 현대적 해석과 맞물려 있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운주사 불상과 같은 지극히 단순하고 추상적인 불상들이 존재했던 반면, 고려불화와 같은 지극히 화려하고 정교한 불화도 공존했다. 문화는 하나로 규정되기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닐 때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현대 불교미술의 스펙트럼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그간 ‘불교미술을 사랑한 예술가들’을 읽어주신 독자 제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연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의 관심이야말로 우리 불교미술의 발전에 가장 필요한 원천이라 믿는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613호 / 2021년 12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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