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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부단한 채찍질로 지식 무르익어야 명저 탄생”

  • 새해특집
  • 입력 2021.12.29 19:09
  • 수정 2021.12.30 22:34
  • 호수 1615
  • 댓글 3

[새해에 만난 인물] 윤창화 민족사 대표

1980년 5월 도서출판 민족사 설립…42년간 학술서 등 1000여종 불서 펴내
월정사로 동진 출가해 대강백 탄허 스님 곁에서 시봉하면서 출판 원력 세워
‘깨달음총서’ ‘민족사 학술총서’ 등 학술시리즈 간행으로 불교학계 저변 확대

오랜 세월 불교학자들에게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지음(知音)이었다. 그 옛날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었듯 그는 연구 성과에 담긴 학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었다. 사진=정주연 기자
오랜 세월 불교학자들에게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지음(知音)이었다. 그 옛날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었듯 그는 연구 성과에 담긴 학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었다. 사진=정주연 기자

“설봉선사는 현사사비를 일컬어 재래인(再來人)이라고 했다. 불보살이 중생제도를 위해 다시 온 사람이라는 의미다. 윤창화 대표가 꼭 그렇다. 그는 자신의 서원과 불보살님의 가피로 일생을 불교출판을 위해 산 재래인이다.”(시인·선어록 번역가 석지현 스님)
“나의 외우(畏友)인 그는 출판인으로서 불자로서 인간으로서 참으로 성실하고 진지하고 선한 사람이다.”(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단순히 책을 펴내는 수준을 넘어 뛰어난 안목으로 필자들 저술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근대 불교출판인의 모범이 안진호 스님이라면 이후 현대 불교출판인의 넘버원은 단연 윤창화 대표일 것이다.”(김광식 동국대 교수)
“윤창화 선생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출판인 윤창화’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학자 윤창화’가 있다. 우리 풍토에서는 보기 드물게 논문을 쓰는 재야학자의 모습을 정립했다. 그의 전공은 선종문화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분야에서 독보적 성과를 이루었다.”(김호성 동국대 교수)

윤창화(69) 대표는 불교 출판계의 장인이다. 1980년 5월9일 도서출판 민족사를 설립해 42년째 출판인의 길을 걸어오고 있으며, 펴낸 책도 1000여종에 이른다. 굳이 불교학자가 아니더라도 불교를 깊이 공부하려 했었다면 그가 만든 책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는 드물다. 불서 자체가 귀하고 간혹 있더라도 시, 소설, 에세이가 주류이던 시절 윤 대표는 “출판사는 문화기업”이라는 신념으로 오랜 세월 학술서적 출판을 고집했다.

해방 이후 선불교가 흥하면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은 교학을 버리고 선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부처님 언설과 문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 앞에 깨달음의 걸림돌로 치부됐다. 경전이 스님들에 의해 외면당하고, 선어록마저 선객들의 바랑에서 점차 밀려났다. 불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부처님이 어떤 삶을 사셨고 어떤 말을 하셨는지, 제자들은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 법을 전하기 위해 어떤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부처님은 그저 복을 주시는 분이었고, 불자라면 무조건 기도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수십 년 절에 다녔다는 불자들조차 누군가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세간의 불교는 기복의 늪에 빠져있었고, 출세간의 불교에서는 막행막식과 기행이 깨달음으로 미화됐다.

출판인의 길을 걷겠다는 윤 대표의 결연한 다짐도 여기서 비롯됐다. 맹목이 아니라 폭넓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 믿음, 자신의 깨달음과 가족 안위에만 매몰되지 않고 대중들과 정토로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실천행, 불교가 전근대적인 낡은 사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이끌 위대한 사상임을 드러내는 것, 그 모든 변화의 단초가 ‘책’에 달렸다고 보았다. 책을 통해 불교를 향상·발전시키겠다는 서원은 개인을 넘어 불교가 맞닥뜨린 시대적 당면과제이기도 했다.

윤 대표가 처음 기획한 불서는 여익구(1946~2012) 전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이 편역한 ‘불교의 사회사상’(1981.4)이다. 이 책은 일본학자들의 불교사회주의 이론과 동남아불교국가의 불교사회주의 운동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실천과 사회참여를 요구받는 한국불교계에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사회주의를 다루기도 했지만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출소한 편역자의 이력도 불순의 낙인이 찍히는 요인이 됐다. 초판 인쇄한 3000권의 책이 당장 창고에 빼곡히 쌓인 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불교의 사회사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금 먼저 출간한 학교교사들의 이야기가 실린 ‘교단일기’까지 판금 됐었기에 그의 충격은 더욱 컸다.

참담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마저 박탈된 현실이 새삼 뼈저리게 와 닿았다. 의욕적으로 착수한 출판 일이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하루하루 고민이 깊어질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성문, 원혜 스님 등이었다. 한 달에 두세 차례 모여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같이 논의하던 이들 스님이 판금된 책을 직접 팔겠다고 나섰다. 책을 잔뜩 짊어지고 전통강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책을 홍보했다. 근대 이후 ‘불교계 최초의 금서’라는 사실에 스님들과 불자들이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불과 보름 만에 1000여권의 책이 팔렸고 나머지 책도 입소문을 타면서 몇 달 만에 모두 판매됐다. 첫 불서의 신고식은 혹독했지만 오히려 불교계에 민족사라는 출판사를 각인시키는 반전으로 작용했다.

이후로도 불교와 사회과학을 접목한 책들의 출판을 고려했다. 허나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순수불교학술서 분야에 집중했다. 당시는 불교학자들이 많지 않았고 불교 전문서적을 펴낼 불교계의 역량에도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모두들 기피하는 학술서적을 펴낼 곳이 필요했고 윤 대표는 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만드는 선택 기준은 얼마나 많이 팔릴 내용인지에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주목했다. 영세 자본으로 출발한 신생 출판사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무모함에 가까운 용기였다. 이는 좋은 책에 대한 열망이었으며, 일생의 스승인 탄허 스님(1913~1983)을 모시며 배운 신념이기도 했다.
 

1970년 삼척 축서루. 왼쪽 세 번째가 윤 대표, 그 오른쪽이 탄허 스님.
1970년 삼척 축서루. 왼쪽 세 번째가 윤 대표, 그 오른쪽이 탄허 스님.

윤 대표는 동진 출가한 스님이었다. 강릉이 고향으로 어린 시절 목수였던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월정사 복원불사에 참여하면서 진부로 이사 왔다. 아침저녁으로 월정사의 범종 소리가 들려오는 마을에서 자라 초등학교까지 졸업했다. 6남매 중 둘째였던 그는 주문진 친척집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형이 몹시 부러웠다. 오랜 가난은 부모의 성실함으로도 그까지 중학교에 보내기 버거웠다.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그도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야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까 싶었지만 답답함은 더해 갔다. 무작정 서울로 떠나야겠다는 충동의 날들도 늘어갔다.

이를 알아챈 것은 어머니였다. 초가을쯤이었을까. 어머니는 절에 가서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어머니도 유·불·도에 능통한 탄허 스님이라는 도인이 월정사에 머물고 있음은 알았을 터였다. 바쁠 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가난하고 분주한 농가임에도 어떻게든 아들의 길을 열어주려는 어머니의 속 깊은 배려였다. 처음에 흘려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두 달쯤 됐을까. 출가 결심을 털어놓자 가족들도 선뜻 받아들였다.

그해 12월4일 오전 8시, 14살의 어린 그는 아버지와 집을 나섰다. 떠나가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난 뒤였다.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을 지나 월정사 경내에 들어섰고 그렇게 절 생활이 시작됐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하고, 4시부터 6시까지 염불 익힌 뒤 아침공양, 사시불공 참여, 오전 11시30분 점심공양, 오후에는 온갖 잡무 처리, 저녁공양, 저녁예불이 이어졌다. 그렇게 오후 9시 취침에 이르기까지 바쁜 날들이 반복됐다.

탄허 스님의 시봉을 담당하게 된 것은 1968년 가을 17살 때로 사미계를 받고 6개월쯤 지나서였다. 탄허 스님은 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낸 한암 스님의 전법제자로 20세기 한국불교 지성사를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윤 대표는 해인사강원에서 공부한 4년을 제외하고 출가생활의 대부분을 탄허 스님과 지냈다. 그의 눈에 비친 탄허 스님은 늘 한결같았다. 낮이고 밤이고 시간이 날 때면 경전을 현토·역해했다. 승속을 초월한 인재양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미래 사회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스님 곁에는 항상 문인, 기자, 학자 등 지식인들이 끊이질 않았다. 탄허 스님을 모시면서 윤 대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불교경전을 비롯해 동서양의 고전과 인문학 서적을 두루 읽어나갔다. 탄허 스님의 ‘화엄경’을 펴내는 실무를 담당하면서 활자의 세계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향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듯 점차 탄허 스님의 향훈에 물들어갔다.
 

당송시대 선종사원 연구의 일환으로 일본 선종사찰을 답사하고 있는 모습.
당송시대 선종사원 연구의 일환으로 일본 선종사찰을 답사하고 있는 모습.
2000년대 이후 그는 출판인인 동시에 학자로도 두각을 드러냈다.
2000년대 이후 그는 출판인인 동시에 학자로도 두각을 드러냈다.

윤 대표가 다시 세간으로 돌아온 것은 1979년 늦가을이었다. 몸은 세속에 두기로 했지만 절에서 익힌 성실함과 절제는 더 엄격해졌다. 이듬해 5월 시작한 출판 사업은 여러 난관과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두고두고 읽힐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더 굳건해졌다. 1986년 윤 대표는 국내 불교학계에 일본과 서양에서 출간된 우수한 불교연구서를 본격적으로 번역해 소개하는 ‘깨달음총서’ 발간에 착수했다. 판금조치 이후 몇 년 동안 외국 연구서적을 영인해 판매하면서 쌓은 경험과 안목도 있었다. 그는 해외 학계의 불교연구서 중 우리 불교계에 꼭 필요한 책들을 꼼꼼히 선별했다. 교리, 사상, 역사, 종파, 인물 등 한 권으로도 각 분야의 개괄적인 이해가 가능해야 했다. 이는 불교학의 저변을 크게 확대하는 일로 불교학계로서도 대단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번역을 담당한 석·박사과정 연구자나 강사들도 해당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윤 대표는 한국불교학계의 연구 성과를 축적할 ‘민족사 학술총서’ 발간도 시작했다. “학술총서를 만들기 위해 민족사가 존재한다”는 각오였기에 선정 기준이 까다로웠다. ‘새로운 주제’ ‘기존 성과를 뛰어넘는 연구’ ‘전거의 타당성과 정확성’ ‘논문 구성과 체제의 완성도’ ‘문장의 정확성’ 등이 충족돼야 했다. 이 같은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 ‘삼국사기 전거론’(이강래) ‘신라불교 여래장사상 연구’(이평래) ‘중국 선종의 성립사 연구’(정성본) ‘무아·윤회문제의 연구’(윤호진) ‘인도의 이원론과 불교’(정승석) ‘한국천태사상의 전개’(이영자) ‘의상화엄사상사연구’(전해주) ‘한국근대불교사연구’(김광식) ‘대승경전과 선’(김호성) 등 학술서가 꾸준히 선보였다.

 

“문명적 관점에서 선불교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게 꿈”

근대불교연구 활성화 위해 잡지·신문·사진·문건 등 자료집 편찬
2000년 이후 학술서 전문출판에서 외연 넓혀 다양한 불서 발간
직접 논문·저술 집필, ‘당송시대 선종사원…’으로 학술상도 수상

 

윤창화 대표는 그의 지인들이 밝히듯 불교출판을 위해 산 ‘재래인(再來人)’이며, 선종문화사의 독보적 성과를 이룬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다.사진=남수연 기자
윤창화 대표는 그의 지인들이 밝히듯 불교출판을 위해 산 ‘재래인(再來人)’이며, 선종문화사의 독보적 성과를 이룬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다.사진=남수연 기자

이렇게 시작된 ‘깨달음총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총 46종, ‘민족사 학술총서’는 지금까지 73종 째 이어지고 있다. 일반 책과 달리 학술서는 제작비, 제작기간, 인력 등 모든 분야에서 2~3배의 노력이 투입됐다. 하지만 대부분 책이 적자를 면치 못했다는 사실에서 학술서에 대한 윤 대표의 원력과 결기가 어떠했는지 읽혀진다.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은 ‘불교출판의 현황과 과제’(‘대각사상’ 9호, 2006년)에서 당시 민족사의 역할을 이렇게 평가했다.

“민족사의 활발한 출판활동은 불교학계는 물론 불교계 전체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일본과 서양의 현대적 연구 성과를 본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국내불교학계의 연구의욕을 자극한 점은 이 출판사가 한국불교에 기여한 보이지 않는 공로다. 한마디로 민족사는 1980년대 이후 한국불교출판계를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근현대불교사 연구에 있어서도 윤 대표의 공적은 뚜렷하다. 1990년대 초까지 근현대불교사는 미개척지였다. 축적된 자료도, 연구자도 드물었다. 그는 꾸준한 자료집 편찬 및 연구 서적 출간으로 근현대불교사 연구의 토대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6년 김광식·이철교 선생과 함께 1876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각종 불교잡지 26종과 신문류, 도서류, 문건류 등 불교자료를 영인해 전체 69권의 ‘한국 근현대불교 자료전집’을 펴냈다. 또 1900년을 전후해 1999년까지 불교계에서 있었던 주요사건, 희귀사진, 기념사진, 성명서, 문건, 기사 등 중요 사진 1100여장이 수록된 사진자료집인 ‘한국불교 100년’(2000)을 김광식 박사와 공동으로 발간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6개월간 카메라 기술을 배웠고, 꼬박 3년간 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관련 사진을 촬영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앞서 근현대불교사 연구의 기폭제가 됐던 임혜봉 스님의 ‘친일불교론’(1993년)도 윤 대표의 결단과 노력에 힘입어 출판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불교계 인사들의 친일행태를 담아내고 있는 이 책의 출간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불교계 내부를 향한 강한 비판이었고, 친일 인사들의 후손과 제자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친일문제에 관심이 있던 윤 대표는 성찰 없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보고 곧바로 출판을 결심했다. 책 한 권에 기꺼이 민족사의 명운을 건 것이다. 혜봉 스님의 초고에 본인이 모아왔던 자료들까지 적극 보탰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그렇게 책이 출판되자 불교계 안팎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칭찬과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다. 이 책을 계기로 친일불교에 대한 찬반 논란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무엇보다 근대불교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는 고무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동안 300여종의 학술서적을 펴냈던 윤 대표는 2000년을 전후해 심각한 고민에 직면했다. 학술서적을 고집하다가 더 이상 출판사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재정이 악화됐다. 빚이 억대를 넘어섰다. 학자나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책만 내는 게 최선인가에 대한 회의도 커졌다. 보다 많은 사람이 불서를 접하고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돕는 역할도 중요하지 않던가.

민족사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불교입문서, 불교교리, 불교신행 등을 속속 선보이며 초심불자들이 불교를 올바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펴냈다. 생활지침서, 불교명언, 명상언어, 수필 등을 통해 일반인들이 불교에 다가설 수 있는 불서도 만들어갔다. 참신한 원고 발굴을 위한 민족사 출판원고 공모를 비롯해 불자들의 신행생활 입문서를 만들기 위한 주제별 원고공모, 민족사 서평단 및 출판 기획자 모집, 왕초보 불자의 실수담 공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불자들의 불교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저자 강연회를 열고, 나중에는 아예 전통강원 방식으로 한문경전을 배울 수 있는 탄허강숙을 개원했다. 대중들이 불서를 읽고 공부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서기로 한 것이다.

출판사 활성화와 함께 윤 대표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연구·저술 작업이었다. ‘경허의 지음자 한암’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 ‘한암선사의 서간문 고찰’ ‘탄허의 경전번역의 의의와 강원교육에 끼친 영향’ ‘한암과 탄허의 동이점 고찰’ 등 자신이 한없이 존경하고 따르고자 했던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을 조명하는 논문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무자화두 십종병(十種病)에 대한 고찰’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 등 한국 선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문들도 발표했다. 특히 그의 논문으로 인해 그것이 실린 ‘불교평론’이 폐간 위기로 내몰리기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윤 대표의 문제의식과 강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술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다. ‘관음기도 공덕’ ‘악마, 부처님을 유혹하다’ ‘365일 부처님 말씀’ ‘왕초보 禪박사 되다’ ‘불자생활백서’ 등 일반 불서를 비롯해 ‘한암선사 연구’ ‘미래를 향한 100년, 탄허’ 등 학술서에도 공동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근현대기 100년 동안 발간된 1만2000여권의 불교관련 서적 중 58권을 선정해 평가·리뷰를 한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8선’, 선종의 여러 청규와 선문헌을 바탕으로 선의 전성기인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각종 제도, 가람구성, 생활문화 전반을 탐구한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등 묵직한 책들도 직접 집필했다. 특히 ‘당송시대 선종사원…’에는 좌선의 정례화와 횟수, 방장의 납자지도 방법, 선원총림의 소임, 법어와 형식, 선문답 방식과 기능 등 당시 선원총림의 ‘오도(悟道)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학계는 물론 선원 수좌들 사이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2017년 세종도서 학술부문에 선정됐으며, 그해 불교평론 학술상도 수상했다. 이 책의 집필을 위해 국내외 선종사찰을 답사하고, 7~8년간 매일 밤잠을 줄여가며 밤 1~2시까지 선문헌 연구에 매진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근래에도 법보신문에 ‘전등록 1000여 선승 중 좌선하다 깨달았다는 이가 있나’ ‘한국 선은 지금 지독한 좌선병에 걸려 있다’ ‘한국선불교는 불립문자 곡해해 무지 정당화했다’ ‘선원에서 자취 감춘 법거량…지금 한국선이 위험하다’ 등 기고를 통해 한국선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랜 세월 불교학자들에게 윤 대표는 지음(知音)이었다. 그 옛날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었듯 그는 연구 성과에 담긴 학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었다. 그것은 책과 학문을 사랑하고 학자를 존중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윤 대표가 생각하는 학자란 무엇일까.

“학자의 생명은 탐구정신입니다. 탐구정신이 없으면 학문적으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에서 ‘이것으로 완결이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또한 학자라면 학문적 업적을 남겨야 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자신을 대표하는 책 하나 없다면 그는 매우 게으른 학자입니다. 어영부영 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자기 자신을 부단히 채찍질하여 지식이 무르익어야 명저가 탄생하고, 학문과 불교발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정년을 했든 그렇지 않든 학자라면 비록 육체는 늙어도 정신을 늙지 말아야 합니다.”

서재의 메모들은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함과 치열함을 잘 보여준다.
서재의 메모들은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함과 치열함을 잘 보여준다.

곧 칠순을 앞둔 윤 대표는 출판인으로서 불자들의 가슴에 남는 보석 같은 책을 내고 싶다. 언젠가는 불교와 선을 문명적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작업도 진행하려 한다. 민족사 사무실 내 그의 서재에는 빼곡히 들어선 책들과 함께 스스로를 경책하는 메모와 글귀들에서도 이러한 그의 결연함이 읽혀진다. ‘제행무상, 이제 남은 인생 고작해야 10년, 이제 할 것은 공부밖에 없다’ ‘인생의 지침, 금언이 될 만한 글만 쓰자’ ‘빡세게 공부하자,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부처의 일을 논하면 부처가 되고 세상사를 논하면 중생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러져 가는 것,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라.’

옛 성인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해 크게 성취하는 것보다 더 신명나고 행복한 일은 없다(莫神一好)’고 했다. 일평생 불교와 책과 학문의 길에서 부단히 탐구·정진하고 있는 윤 대표는 행복한 출판인이자 일심의 구도자다. 또한 그의 지인들이 밝히듯 불교출판을 위해 산 ‘재래인’이며, 선종문화사의 독보적 성과를 이룬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다. 한국불교는 그로인해 더 풍성하고 깊어지고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15호 / 2022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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