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2 새해에 만난 큰스님] 봉선사 조실 월운해룡 스님

  • 새해특집
  • 입력 2021.12.29 20:06
  • 수정 2023.06.17 13:58
  • 호수 1615
  • 댓글 2

시퍼런 계(戒)로 깎아낸 골필에 불학 열혈 적셔가며 70년 역경

헐벗고 굶주린 시대 태어나 잠못드는 약골에 잦은 병치레
유년 때 재당숙 사서오경 사사 스승 찾아 장단서 남으로 걸음
꿈에서 보았던 남해 화방사서 깨진 기왓장 고르며 행자 시작 

운허 스님과 사제인연은 숙연 “경학이 불교 일으킨다” 고언
최연소 동국역경위원 오르고 ‘한글대장경’ 완간에 평생 헌신
법정 스님에게 번역원고 ‘퇴짜’ 최현배·이희승·조지훈 큰 도움
‘무가보’ 창출 공로 인정받아 외솔상·대통령 은관문화훈장

“대마잡은 한 수 옆의 돌들 봐 318권 역경은 부처님의 가피!”
“이 시대 통용 수려한 언어로 의미 전달 쉽게 탈고해야 해”

월운 스님은 초기경전의 말씀을 전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자신의 옷을 만져보면서, 입을 지키고 뜻을 거두어들이고 몸으로 범하지 마라!” 사진=남수연 기자
월운 스님은 초기경전의 말씀을 전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자신의 옷을 만져보면서, 입을 지키고 뜻을 거두어들이고 몸으로 범하지 마라!” 사진=남수연 기자

역경(譯經) 대원칙 하나. ‘이해 못 하면 번역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오역은 만 사람의 사상을 왜곡시킬 수 있다. 원전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파악, 그에 따른 통찰이 이뤄졌을 때라야 한 문장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운악산 봉선사는 한국 역경사에 한 획을 그은 두 선지식을 품었다. “번역할 때 원전에 있는 말을 빼지도 말고, 없는 말을 보태지도 말라!” 했던 운허(耘虛·1892∼1980) 스님과 ‘한글대장경’ 완간의 주축이었던 제자 월운(月雲·1929∼현재) 스님이 주석한 도량이다.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은 다경실(茶經室)에 주석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차(茶)는 없고 경(經)만 있는 방이다. 차 마시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공부할 시간도 줄기에 그 흔한 다탁도 보이지 않는다. 하여, 월운 스님과 마주 앉아 세간 일 나누며 한적하게 차 마실 생각은 그 누구든 접어야 한다. 

이른 아침의 가벼운 산책 후에는 경전을 펼친다. 오른손의 중지가 움푹한데 펜을 너무 오래 잡아 패인 것이다. 역경의 상흔이자 신념의 징표다. 다경실 중앙의 작은 방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액자 하나 걸려 있다. 운허 스님이 직접 써 제자에게 내려 준 글귀다.

是非海裏橫身入(시비해리횡신입) 
豹虎羣中自在行(표호군중자재행) 
시비의 바다 속으로 몸을 던져 들어가라. 
표범과 호랑이 무리라도 무서워 말고 걸림없이 그 속을 헤쳐 나가라. 

친견할 때마다 월운 스님은 늘 이 액자 아래 앉았다. 오늘도 그러했다. 한겨울 오후의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담소를 나눈다.

장장 15년에 걸쳐 조성된 ‘고려대장경(1236∼1251)’은 강화도와 서울을 거쳐 1398년 5월 가야산에 자리 잡았다. 한문으로 새겨진 법음을 저변으로 전파하는 데 역경은 필연이었는데 한글이 창제되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고려대장경 완성 200년 후인 세조 당시의 간경도감(刊經都監·1461∼1471)이 언해(諺解·한문 문장을 한글로 직역)본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시 450여 년 후 용성(龍城·1864∼1940) 스님의 삼장역회(三藏譯會)가 ‘조선글 화엄경’을 출간했다.(1928) ‘80권 화엄경’을 우리말로 최초로 번역한 책이다. 그 직전, 역경에 힘을 보탤 또 한 명의 선지식이 출현했다. 세납 30살의 늦은 나이에 출가(1921)한 운허 스님은 청담 스님과 함께 ‘전국강원 학인대회(1928)’를 개최하더니 봉선사에 홍법원을 개설(1936) 한데 이어 광동중학교를 설립했다.(1946) 인재양성의 지중함을 통관했음이다.

운허 스님이 봉선사에 주석하며 교육·포교 불사를 시작할 즈음 경기도 파주 장단의 한 청년이 길을 떠났다. 

“내 나이 열일곱 살 때 해방됐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배고프고 헐벗었어. 남의 농사 부치며 살던 속가 살림은 더 어려웠지. 어려서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병치레가 잦았고. 약골에 먹지도 못했으니 죽을 지경이었지.” 

암울한 유년에 희망이 되어준 건 한학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한학자인 재당숙(再堂叔) 김계(金桂)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던 청년은 이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노년에 이른 당숙은 “가르칠 힘이 없다”고 했다. 배움의 길마저 막히자 절망감이 밀려왔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지. ‘이렇게 살다가는 굶어 죽겠다. 나가서 밥이라도 실컷 얻어먹겠다.’ 그러니 나 죽은 셈 치라고 했지.”

그 무렵 늘 같은 꿈을 꾸었다. 산, 돌다리, 그 너머의 둔덕 위 집. 1940년대 후반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니 특이해 보일 꿈은 아니었다.

“아니야. 그 집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가 있었어. 그리고 누군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어.”

가출 선언에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으나 어머니는 극구 만류했다. 

“좋은 선생 만나 공부하면 내 학문은 더 깊어질 것이라 자신했지. 머지않아 ‘한문의 시대’가 도래하면 내 실력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고, 귀한 대접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지. 검문소마다 ‘어디 가냐?’고 물어. 군 입대 기피자 아닌가? 의심하는 거지. ‘한문 공부하러 간다’고 당당히 말했어.” 

판문점 부근의 장단에서 뗀 걸음은 진주를 거쳐 남해에 닿았다. 화방사가 눈에 들어왔다. 꿈에 본 그곳임을 직감했다.

“꿈속의 냄새. 잡목 태우는 냄새였던 거야! 잊었던 고향에 당도한 듯 참 편안했지. 객실에 놓인 책을 집어 드니 ‘금강경오가해’였어. 처음 본 불서였지만 ‘참 멋지고 빼어나다’는 느낌을 받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사상(四相)을 무너뜨려 가는 힘과 담백하면서도 명징한 선시의 매력에 빠졌던 것 같아.”

3일 이상은 머물게 하지 않는 화방사 스님들은 한문 경전을 척척 넘기는 청년에게 며칠 더 묵으라 하고는 이내 출가를 권했다. 

“그전까지 불교가 뭔지도 몰랐고 절과는 작은 인연조차 없었어. 그래서 출가는 놔두고라도 일거리를 좀 달라 했지.”

화방사 스님들은 청년에게 도량 청소 등의 일을 맡겼다. 장작 패고, 깨진 기왓장 골라내고, 담장 고치고, 공양 짓고. 사실상의 행자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1947) 산사의 일상에 젖어가며 신심도 돈독해졌다.

“옛날 채소밭은 분뇨를 뿌려 일궜잖아. 어느 해 여름 시금치가 탐스럽게 자란 것을 보니 식욕이 확 돌아. 한창 먹을 나이이기도 하고. 시금치에 된장 얹어 먹으니 참 맛나. 스님들이 ‘채독을 조심해야 한다’며 말리시기에 내가 그랬지. ‘신심이 지극하면 채소밭의 벌레도 없어집니다.’ 며칠 후 눈이 노래지며 숨도 차더니 이내 한 걸음 옮기기도 어려워. 십이지장충에 감염된 거야. 이거, 몰라서 그렇지 중증으로도 발전한다고. 그 뒤로 회충약 꼭꼭 챙겨 먹었네.”

아무리 고되어도 경전 보는 것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유교와는 확연히 다른 심오한 진리에 천착해 갔다. 이따금 화방사를 찾아오던 스님들이 청년을 유심히 지켜보고는 정식 출가를 권했다. 

은사 운허 스님이 내린 글.
은사 운허 스님이 내린 글.

“덕 높으시고 교학에 밝은 봉선사 운허 큰스님 문하에 들어가면 ‘더 깊은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했어. 일단 삭발부터 하자고 해. 그러자 했지. 얼굴 한 번 못 뵙고 큰 스님의 제자가 된 거야.”(1949)

법명은 해룡(海龍). 한걸음에 봉선사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러는 사이 6·25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수년 후 운허 스님이 범어사에 당도한다는 전언을 듣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제자의 출중함을 익히 전해 들었던 은사는 따듯하게 제자를 맞아 주었다.(1952) 

“파주와 남해에 비하면 장단과 남양주는 이웃이나 다름없잖아. 집 나올 때 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걸음 했다면 우리 은사 스님 더 일찍 만나 시봉했을 텐데. 그 긴 세월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범어사에서 만났어!”

법의는 여러 생에 걸친 원력의 막중함과 일찍이 심어둔 지혜 종자가 익어야 입을 수 있다고 했다. 가사 입은 두 스님의 사제인연은 얼마나 오래고도 깊게 익어야 맺어지는 것인가! 숙연이다.

피난 시절에도 운허 스님은 범어사에서 ‘능엄경’을 강의했다. 어느 날 ‘능엄경’을 설한 동기에 대해 답하라는 과제를 칠판에 적어 놓았다. 제자는 한문으로 쓴 답을 내놓았다. 그날 저녁 월운 스님을 부르고는 일렀다.

“참선하는 사람은 많다. 경학에 더 힘써라. 경학이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제자에게 월운(月雲)이라는 당호를 내린(1959) 운허 스님은 평소 도반 스님들에게 “내 뒤를 이을 사람은 월운”이라고 했다. 

2001년 장충체육관에서 ‘한글대장경 완역 회향 법회’가 봉행됐다. 
2001년 장충체육관에서 ‘한글대장경 완역 회향 법회’가 봉행됐다. 

조계종은 역경·포교·도제양성을 종단 3대사업으로 결정(1962)하고는 동국역경원을 개설했다.(1964, 4) 초대 원장은 운허 스님이 맡았고 그해 12월부터 ‘한글대장경 완간 불사’ 대장정이 시작됐다. 월운 스님은 역경보조위원으로 참여했다.

“원문의 뜻을 읽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한글 문장 실력이 따라주지 않았어. 밤을 새워가다시피 쓴 원고를 편집부장이셨던 법정 스님한테 여러 번 퇴짜 맞았어. 다행스럽게도 최현배, 이희승, 조지훈, 서정주 선생 등 당대 내로라하는 최고의 학자·문인들과 교류하며 말과 문장을 배웠지.” 

2년 뒤 월운 스님은 최연소로 역경위원에 올랐다. 

1965년 6월 ‘장아함경’을 첫 권으로 펴냈고 2001년 4월 ‘장경음의수함록’을 선보이며 318권의 한글대장경이 완간됐다. 1500여 종의 경율론 삼장과 고승들의 저서를 우리 글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족유산인 고려대장경에 생명을 불어넣고, 진정한 불교 대중화의 초석을 다진 대작불사’로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역대 역경원장은 운허·용암·자운·월운 스님이다. 운허 스님이 역경원장(1964∼1980)을 역임한 1979년까지 101권, 월운 스님이 역경원장(1993∼2008)을 역임했던 2001년까지 185권을 간행했다. 운허·월운 두 스님의 원력으로 빚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글대장경’은 그야말로 무가보(無價寶)다. 이 공로로 한글학회 외솔상(2001년), 대통령 은관문화훈장(2005년) 등을 받았다.

“바둑에서 상대의 대마를 잡는 건 딱 한 수야. 하지만 판을 잘 보라구. 그 한 수를 지켜내려 이어지고 둘러싼 돌들을! 난 준비된 돌만 놓았어. 부처님 가피로 회향한 불사인거야! 옆 방에 진열된 ‘한글대장경’은 초고(礎稿)야. 완전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어. 이 시대에 통용되는 언어, 누구에게나 의미가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수려한 문장으로 탈고되어야 해! 경전은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자유와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이 걸어야 하는 길인 거야. 어느 길로 들어서도 한 지점에 도달해. 그러니 어느 경전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어. ‘한문’이라는 장막만 걷어 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길인 거야!”

 

다경실의 ‘한글대장경’과 운허 스님.
다경실의 ‘한글대장경’과 운허 스님.

“자유·행복 충만한 경전 한 장 넘길 때 진실로 평화롭고 행복해!”

봉선사 처음 도착해서는 움막 짓고 살아 … 청풍루 세워가며 본사사격 일신
사기(私記) 보아가며 이력식 전통강원 수업 … 분석·논리·사유가 ‘경안’ 열어
“운악산 변하고 인생도 유한…남에게 혜택 줄 수 있는 일 하나는 하라구!” 

한글대장경 간행에서 한발 물러선 적이 있다. 봉선사 주지를 맡았기 때문이다.(1976∼1994) 6·25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봉선사는 삼성각만 남고 모든 전각과 요사채가 쓰러져 피폐해졌다. 월운 스님이 은사 스님을 따라 봉선사에 들어선 건 1960년대 중반이다.  

“처음 절에 당도했을 때는 기거할 요사채도 마땅치 않았어. 움막 짓고 살았지.”

전각들을 하나씩 복원해 가며 교구본사로서의 사격을 공고히 다져갔다. 상좌들과 산책에 나설 때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긋이 바라보는 당우가 있다. ‘조약돌 모으기’로 지은 설법전이다. 시주금 넣는 봉투를 조약돌로 표현한 게 참 인상적이다. 가난한 절 살림에서는 작은 당우 하나 세우는 것만도 예삿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다른 절로 가서 편안히 살라”는 얘기까지 들었을까! 

“운하당 복원(1963)에 온 정성을 쏟으신 스님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영양실조였다고 해. 불법을 전하고 싶었던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봐! ”

월운 스님이 설립(1996)한 능엄학림(楞嚴學林·승가대학원)은 전통적인 ‘이력(履歷)’식 수업형태를 고수해 왔다. 스승과 제자, 도반들이 글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견을 검토하고 정리해 가는 수업형태다. 그리고 ‘사기(私記)’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본다. 

사기는 역대 수행자들이 경전을 공부하며 나름의 주석을 적어 놓은 학습 메모장이자 참고 노트다. 초서체로 쓰여 있어 웬만한 강주도 해석하기 어려운데 전국에 부분적으로 산재해 있었다. 이 사기들을 수집해 탈초(脫草)·배인(排印) 한 장본인이 월운 스님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사기를 탈초하는 작업이란, 한 장 읽어 내리는 어려움이 논문 일천 페이지 쓰는 것보다 더 난감한 일일 수도 있다. 그 구질구질한 옛 창호지에 쓰인 깨알 같은 초서들을 읽어 내어 현토까지 달아 다시 배인하는 과정이란 무한히 많은 집이 세워질 수 있는 튼튼한 기반공사를 다지는 작업이요, 학문의 가장 높은 경지에 간 사람의 총명한 예지와 밀찰(密札)의 명변(明辯)과 헌신적인 독행(篤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월운 스님은 그 몸뚱어리가 통째로 경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능엄학림 교육방식이 구식이라는 지적도 받았지. 하지만 교학의 자료가 한문으로 되어 있잖아. 옛사람들이 글을 배우고 풀던 방식을 익히고, 거기에 새로 축적한 지식과 혜안으로 문헌을 읽어가면 더 정확한 번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논리적으로 보고 사유하다 보면 경안(經眼)이 열린다고 했어! 어느 날, 은사 스님께서 찬주(纂註)를 보라 하신 적이 있어. 내 나름의 답을 써내면 은사 스님은 고개를 가로저으셨지. 해서 경학을 그만두고 싶다 하니 한 말씀 하셨지. ‘옛 어른들도 보고는 잊고, 잊고는 또 보고 그렇게 성취하셨다.’ 역경도 깨달음을 향해 걷는 여정인데 쉬울 리 있겠나!” 

학림의 스님들은 부처님오신날이나 ‘일요일 대중원력’ 외에는 학업에만 매진한다. 월운 스님의 ‘특명’이다.

“한 사람을 불자로 인도하는 것과 인재로 양성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야. 학림은 특정 교학을 연구하고 전문 역경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야. 경전 연구하며 체득한 사상·지식이 말과 글로 풀어지면 인문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문화의 지평을 넓히는 거야. 불교학만 풍성해지는 게 아니야. 전쟁, 차별, 갈등, 환경, 윤리 등의 시대적 문제들도 풀어낼 수 있어. 왜 그럴까? 생명을 말하기 때문이야. 인류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의 시대’는 사라지지 않아.”

‘한글대장경’을 완간한 후에도 월운 스님의 역경 열정은 식지 않았다. 명안종사들의 불꽃 튀는 선지를 응축한 ‘선문염송·염송설화’(동국역경원, 전 10권)를 8년간의 작업 끝에 출간했다.(2005년) 이 책을 토대로 국문·불교학과에서 10여 명의 박사가 배출됐다고 한다. 

“옛 어른들께서는 ‘사기(私記)가 생긴  뒤로 경학(經學)이 주저앉았고 설화(說話)가 나온 뒤로 선객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하셨지. 선교의 걸음마 단계인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은 아닐 거야.”

역경원장 직을 내려놓은 후에도 집필에 여념이 없었는데 ‘인본욕생경 주해(人本欲生經 註解)’를 선보였다.(2011) 인간의 애욕을 여덟 가지로 세분해 그것을 잘 관리하면 해탈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 짧은 골경(骨經)이지만 불교학계에서도 난해하기로 정평 났다.

“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경전이 ‘인본욕생경’이었어. 어려서 서당에 다니고, 출가해서 한평생 경전을 보았는데도 이 경의 원문만 보아서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어. 자존심 상했지. 한편으로는 내가 경학에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는 자책도 했어. 문의(文義)와 문맥(文脈)을 짚고 행간을 읽어가며 뜻을 새겨 나가는 일 자체가 그에 대한 참회라 여겼지. 3년 동안 푹 파묻혔어!”

10여 년 전 친견했을 때 고려대장경을 역경하며 새삼 인식한 ‘하나’를 여쭈었을 때  “‘멈춰라!’, ‘STOP’”이라고 했다. 월운 스님은 지금도 그러하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끓어오르는 내 감정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해. 상대방이 고의로 걸어오는 시비에 분노가 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그 분노를 빨리 멈춰야 해. 찰나의 분노도 업이지만, 멈출 수 없으면 그 업이 더 두터워지는 거야. 업습(業習)에 이끌리면 중생이고, 이끌리지 않으면 부처인 거지. 이끌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 수행자인 거야.”

운허 스님 따라 봉선사에 바랑 내려놓은 후 평생 이 도량을 떠나지 않았다. 유독 정이 든 전각이나 쉼터 하나는 있을 법하다.

“부처님께서 앉으신, 진실로 평화로운 숲을 그려보곤 해. 경전을 펼친 이 자리도 그 숲이야! 아직은 경전을 펼쳐 볼 수 있으니 다행이지. 부처님 가피야. 영원하다고 생각한 순간 집착하는 거야. 운악산도 어제의 운악산이 아니야. 그러니 특정한 곳에 마음 둘 일 아니지. 그대들 삶도 무한하지 않아. 얼마 안 남은 시간 허투루 쓰지 말고 부지런히 살아야 해. 한 사람이라도 혜택 받을 수 있는 일 하나쯤은 해 놓고 가야지!”

새해를 맞이한 출세간의 사부대중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청했다.

“봉선사에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언뜻 보면 나무 스스로 자라온 듯 보여도 아니야. 해와 달, 물과 바람이 키워 온 거야.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가르침처럼 누구든 악한 일 하지 말고 선한 일 두루두루 행하기를 바라. 초기경전에 이런 말씀 있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자신의 옷을 만져보면서, 입을 지키고 뜻을 거두어들이고 몸으로 범하지 마라.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능히 도(道)를 얻으리라.’ 산속의 노승을 만나려 시간 맞춰 왔으니, 가야 할 때도 정해 놓았을 거잖아. 아직 해 남았네. 어둡기 전에 길 나서야지.”

산을 넘어가는 노을빛이 ‘是非海裏橫身入 豹虎羣中自在行’ 글을 거쳐 월운 스님의 어깨에 내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본 월운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시퍼런 계(戒)의 칼날로 뼈를 깎아 만든 골필에 법납 73년의 불학 열혈(熱血)을 적셔가며 부처님 말씀을 새겨 온 역경보살의 미소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본 월운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사진=남수연 기자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본 월운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사진=남수연 기자

월운 해룡(月雲 海龍)
1929년 파주 장단 출생. 
1949년 운허 스님 은사로 득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1964∼현재).
동국역경원장‧능엄학림 학장 역임.
중앙승가대 교수 정년퇴임. 
현재 봉선사 조실.

[1615호 / 2022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