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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명 민순의

조선 초 10명 중 3명이 스님…‘재승(齋僧)’도 다수

현재 우리나라 스님 수는 1000명 중 1명 미만으로 추정
여성·천민·어린이 등 제외한 정구 기준 스님 11만명 존재
불교 의례 집전해온 재승은 수도승·설법승보다 하급 인식

보물 제1731호 함양 법인사 감로왕도(1726). 확대된 그림에서는 재를 올리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보물 제1731호 함양 법인사 감로왕도(1726). 확대된 그림에서는 재를 올리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한 ‘2018 한국의 종교현황’에서는 대한민국 불교 종단 중 현황 파악이 가능한 116개 종단에 모두 3만9866명의 승려가 소속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 밖에 336개의 불교 종단이 추가로 거명되고 있지만 소속 승려에 대한 언급은 없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확인된 전국 총 인구수가 4858만293명인 것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승려 수는 넉넉히 보아도 전체 인구의 0.1%를 밑돈다고 할 수 있다. 인구 1,000명 중 승려는 1명 미만인 셈이다.

실제로도 일반인의 생활공간에서 삭발염의한 스님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다. 스님은 사찰을 찾아갔을 때 비로소 인지되는 존재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도심 속 포교당이나 개인 법당이 활성화되어 산중의 사찰이 아닌 바로 우리 동네, 우리 옆집에 스님을 이웃으로 두는 이들이 드물지 않을 수도 있겠다.

조선 초의 풍경은 크게 달랐다. 태조 4년(1395) 대사헌 박경(朴經, 1350~1414) 등이 왕에게 올린 상서(上書)에는 “승려가 백성 가운데 10분의3을 차지한다[僧之於民, 居十之三]”고 나온다.(‘태조실록’ 7권, 태조 4.2.19.계미.) 과거의 역사서에는 ‘승(僧)’ ‘승인(僧人)’ ‘승도(僧徒)’ ‘니(尼)’ ‘니승(尼僧)’ 등의 표현은 있어도 ‘승려’라는 표현은 없다. 아마 당시의 입말에서도 승려들은 ‘스님’이나 ‘중’ 등으로 혹은 그 고어적 형태로 불렸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승려’라는 표현이 드물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도 현대적 감각에 따라 이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태종 4년(1404) 4월에 집계된 전국 인구수는 경기 지역을 제외하고 32만2786명으로 보고되었고, 2년 뒤인 태종 6년(1406) 10월에는 경기 지역을 제외한 인구가 33만2227명, 경기 지역의 인구가 3만8138명으로 전국 도합 37만365명의 인구수가 보고되고 있다. 경기를 제외한 지역의 인구는 그 사이 거의 변화가 없어 전라도 16명 증가, 강원도 14명 감소, 동북면 10명 감소, 서북면 9449명 증가로, 전체 9441명이 증가된 양상을 보일 뿐이다. 한반도 서북지역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명과의 접경지대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태종실록’에 기재된 위 숫자의 단위가 태종 4년에는 ‘구(口)’로 표기된 데 비해 태종 6년에는 ‘정(丁)’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태종 대에 집계된 인구수가 모두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 남성 즉 정구(丁口)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상기 수치는 당시 조선 땅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 중 여성이 배제된 것이며, 천민 남성 그리고 16~59세의 나이 대를 벗어난 남성들도 위의 수치에는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상 전통시대 국가의 인구조사란 조세와 부역의 징발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던 까닭에 이러한 기록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가능한 한 세납을 줄이고자 했던 백성의 입장에서는 가구의 실상을 누락하여 보고하는 시도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조차도 생산능력이 있는 양인 남성의 실제 인구수보다 적게 조사되었을 가능성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또 현재로서는 정구 이외의 인구에 대해 상고할 자료가 마땅치 않으므로 여성과 천민 남성, 노인 및 유소년 남성의 존재 또한 감안하여 당시의 인구지도를 추정해야 할 것이다.

건국 초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고려할 때 태종 대 인구조사가 실시되기 10여 년 전 박경 등이 상서를 올릴 당시에도 인구 수치상의 차이는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종 6년의 전국 인구를 기준으로 하여 3/10을 추산하면 개국 초 전국의 승려 수는 대략 11만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백성[民]’이란 원칙적으로 성별, 계급, 연령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므로 오직 정구만을 기준으로 계산한 11만이라는 숫자는 분명 보수적인 결과이다. 그런데 박경 등이 승려 수를 거론했던 것도 당초 정부(丁夫) 즉 정구를 대신하여 부역할 수 있는 인력을 마련하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발언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크게 잘못된 결과는 아니며, 조선 초 적어도 16~59세 나이 대의 비구승이 11만명가량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1342~1398)도 ‘조선경국전 부전(賦典) 군자(軍資)’ 편에서 유수(遊手)의 존재 즉 부역하지 않는 존재로서 승려를 거론하며 그 수를 10만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어[去而爲浮圖者不下十萬] 비구승 11만명이라는 수치의 추정에 근거를 더한다.

이로 보아 조선 초의 풍경에서는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 열 명 중 (적어도) 세 명이 (비구)스님이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당시 인구 3할의 스님들 모두가 일반인과 삶의 현장을 공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고려시대에도 승려가 여염(閭閻) 즉 민간의 마을에 기거하는 것을 여러 차례 금지했었다. 뿐만 아니라 승속이 함께 어울리며 염불 독경하거나 모연 권화하는 행위도 엄히 금하였다.(‘고려사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

성 안의 여성들이 지위고하와 나이를 불문하고 무리지어 산사(山寺)에 가서 승려들과 어울린다는 개탄이 나오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에도 많은 사찰이 도시보다는 산중에 지어졌고, 승려들은 사찰에서 거주하는 것이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당연히 조선 개국 초에도 유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던 태조 4년 박경 등의 상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계속되어 국가 당국의 금령이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대개 승려의 품급[品]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먹는 것을 배부르게 하지 않으며 거주처가 일정하지 않고 승당(僧堂)에서 마음을 닦는 자가 상급입니다. 법문을 강설하면서 말을 타고 바삐 다니는 자가 중급입니다. 재(齋)를 바라며 상갓집에 가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얻는 자가 하급입니다. 하급의 승려들을 국가의 공사에 일하게 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재를 바라며 상갓집에 가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얻는 자’라 함은 단순히 상갓집에서 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불교 의례를 집전하는 재승(齋僧)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당시 스님들 중 설법으로 대중을 교화하는 설법승과 의례를 집전했던 재승들은 민간인과 접촉하는 기회가 지금보다 더 많았으리라는 것. 둘째, 재승은 수도승과 설법승보다 하급으로 인식되었으며 노역의 대체제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

첫 번째 사실은 고려시대 이래 국가의 오랜 금령에도 불구하고 승속 혼재의 양상이 일상적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과연 조선 초에는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 열 명 중 세 명이 스님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실은 보다 복잡한 문제의식을 남긴다. 당시 승려의 품급이 단순히 직능상의 구분만이 아니라 승단 내의 신분지도를 반영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승단 내 신분지도는 승단으로 유입되어 들어오는 이들의 속가 시절 신분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선 초에는 어떤 사람들이 승려가 되어 승단 내에서 어떠한 지위와 직능을 지니며 살았던 것일까.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장 nirvana1010@hanmail.net

[1616호 / 2022년 1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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