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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범’ 이야기

어머니는 ‘호랑이’라는 단어를 모르셨는지 ‘범’ 이야기만 해주셨다. 1910년대 생이니까, 어머니가 호랑이를 봤다는 말이나 전해준 에피소드들은 조금도 지어낸 말일 수 없다. 기록상으로도 경주지역에서 호랑이가 자취를 감춘 것이 그 후 수십 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격담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했다. 동네 언니들과 봄에 나물 캐러 산에 올랐다가 바위 굴 앞에서 장난치고 놀던 황색 고양이 새끼 두 마리를 봤다고 했다. 너무 귀여워 무심코 다가서려던 순간 묵직한 기운을 느끼고 뒤돌아봤더니 암컷 호랑이가 앞발로 땅을 긁으며 점잖게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소리 없이 초목을 흔드는 압도적인 전율과 위엄을 느꼈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호랑이는 그냥 깊은 산에 사는 영험한 동물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호환(虎患)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으며 어느 집 누가 호식(虎食) 당할 팔자라는 말도 공공연하게 회자되었다고 한다. 

열여덟 살에 등 떠밀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어머니는 새벽에도 혼자서 시오리길 읍내 어시장을 오가며 제사상을 준비해야 했다. 두렵고도 서러운 그 길을 종종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면서 에스코트해주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 다큐멘터리다. 덩치가 송아지보다 훨씬 더 컸고 누런 바탕에 굵은 줄무늬를 하고 있던 호랑이를 똑똑히 기억하셨다. 놀란 와중에도 무섭다기보다는 당신을 지켜준다는 안도감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밤에는 인(人) 짐승이 무섭지 산(山) 짐승은 무섭지 않다는 말씀도 보태셨다. 우리 어머니만 그런 경험을 한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에서 만난 다른 동네 친구도 자기 가족들 이야기를 똑같이 했으니까 말이다. 흔하지도 않았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친정은 바로 윗동네인 호동(虎洞)이었고, 우리 집의 택호는 호계댁(虎溪宅)이었다. 모두 ‘범’을 뜻하는 ‘호(虎)’자가 들어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밖 산비탈 중간에는 호랑이가 앉아 쉬고 갔다는 범바우(虎巖)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른 주먹만한 시퍼런 불을 뚝뚝 흘리고 지나가던 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해주셨다. 그럴 때마다 동네 개들은 똥오줌을 지리며 마루 밑으로 들어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이 되면 송아지를 잃은 집도 있고 어린아이가 없어진 집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전언들로 미루어 볼 때 어머니가 해주신 이야기 속 호랑이는 적어도 전설상의 동물만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호랑이 이야기는 거의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던 어머니 세대가 자식들에게 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특집방송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꾸밈말도 보탤 줄 몰랐던 어머니의 어눌한 범 목격담은 언제 들어도 진지했다. 다만 ‘범’은 ‘호랑이’로 바꿔서 들어야 했다.

세시(歲時)의 감상에 젖어 어머니를 떠올렸다가 뜬금없는 호랑이가 튀어나왔다. 올해가 호랑이해라고 하니 나도 모르게 어릴 때 이불 속에서 들었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졌던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 또래는 ‘범’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거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어느새 아버지의 ‘나이’를 지나 민화 속에나 나올법한 호랑이 이야기를 하는 ‘연세’가 들고 말았다. 

돌이켜보니 ‘범’이라는 말은 어머니에게서 들었고 ‘호랑이’라는 명사는 학교에서 배웠다. 범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호랑이는 몇 번 봤다. 범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만큼 어머니에 대한 추억도 점점 옅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만 하다. 호랑이가 아니라 범 이야기를 해주시던 젊은 어머니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본다.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막둥이는 아직도 늙지 않았다고 다독거려주시는 듯하다. 법보신문 독자들께 올릴 새해 인사를 어머니께 들은 범 이야기로 대신한 셈이 되었다. 호랑이처럼 무병장수하시고 범처럼 종횡무진하시길 빈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16호 / 2022년 1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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