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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23)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6)

원효 손자 설중업, 금강삼매경론 읽고 감동한 일본 진인에게서 송시 받아

일본에 사절단 일원으로 방일…현지서 일본의 원효 스님 존숭 확인
삼국사기·속일본기·서당화상비에 기록…오오미 미후네와 조우 추정
함께 일본 간 김암은 김유신 후손…태종무열왕 핏줄 후대까지 인연

설중업 등 신라 사신은 당시 일본 수도였던 나라 헤이조교 궁궐에서 당 사신과 일본 오오미 미후네 등과 만나 환담하며 시문을 나눴다. 사진은 폐허가 된 헤이조교 궁궐터에 2010년 복원한 태극전 모습.     사진 출처=663highland
설중업 등 신라 사신은 당시 일본 수도였던 나라 헤이조교 궁궐에서 당 사신과 일본 오오미 미후네 등과 만나 환담하며 시문을 나눴다. 사진은 폐허가 된 헤이조교 궁궐터에 2010년 복원한 태극전 모습.     사진 출처=663highland

원효 자손 가운데 이름이 전하는 인물은 아들 설총(薛聰)과 손자 설중업(薛仲業)이다. 그 가운데 설중업은 36대 혜공왕 15~16년(779~780) 일본에 사절단 일원으로 다녀왔으며, 40대 애장왕대(800~809)에 원효 유문(遺文)을 수집하고 고선사에 원효 소조상과 서당화상비를 조성하는 등 현창사업을 추진하였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런데 ‘삼국사기’권46, 설총전 말미에는 설중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일본국 진인(眞人, 제1급의 성씨로 일본어 발음은 마히토)이 신라 사신 설판관(薛判官)에게 주는 시의 서문에서 ‘일찍이 원효거사가 저술한 ‘금강삼매경론’을 열람하고, 그 사람을 보지 못했음을 깊이 한스럽게 여겼는데, 듣자니 신라 사신 설(薛)이 곧 거사의 포손(抱孫)이라고 하니, 조부를 보지 못했지만 그 손자를 만난 것이 기쁜 일이기에 시를 지어준다’고 하였다. 그 시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 자손의 이름자만은 알지 못한다.” 이상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원효 손자가 사절단 일원인 판관으로 일본에 갔다가 원효를 존숭하는 한 일본인으로부터 송시를 받아 왔는데,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까지 그 시가 전해지고 있었지만, 그 손자의 이름은 물론 시를 지어준 일본인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원효 손자인 설중업이 일본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녀온 사실은 ‘삼국사기’ 설총전 외에 일본 측 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속일본기’ 권35・36, 고닌천황(光仁天皇) 10・11년조에, 설중업 일행의 일본 동정에 관한 기록 내용을 종합하면, 호키(寶龜) 10년(779) 10월 을사(9일)에 일본 조정은 신라와의 교섭 창구인 다이자후(大宰府)에 칙지를 내려 항례에 따라서 신라 사신 김난손 등을 입경시키도록 지시하였고, 계축(17일)과 11월 기사(3일)에는 다이자후에 거듭된 입경 지시와 입조의 이유를 확인토록 하였으며, 12월에는 나라의 헤이조교(平城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780) 정월 기사(3일)에 당의 사신 판관 고학림(高鶴林)과 함께 궁중의 정전인 태극전(太極殿)에서 고닌천황을 알현하였고, 2일 뒤인 신미(5일)에 일왕에게 방물을 바치고 새해를 축하하였다. 이에 대한 답례로 일왕은 태극전 옆에 있는 조당(朝堂)에서 신라 사신과 당 사신 일행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다음 날인 임신(6일)에 신라 사절단의 고위 간부 5인에게 정5품상 이하의 관위를 각각 내려주었는데, 설중업이 받은 관품은 종5품하였다. 궁중 연회는 그 다음날인 계유(7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열렸는데, 일본의 위계 5위 이상의 관리들도 참석함으로서 신라 사신과 당 사신, 그리고 일본 고위 관리들 사이에 환담과 시문을 교환하는 기회가 되었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동한 일본의 한 진인(마히토)이 설중업을 반기면서 시를 지어준 것도 이 자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왕은 임오(16일)에도 당과 신라 사신을 위하여 활쏘기와 답가(踏歌) 행사를 베풀어 주는 등 환대하였다. 신라 사절단 일행은 그로부터 한 달간 더 도성에 머물다가 2월 경술(15일)에 일왕이 신라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편 설중업이 일본에 사절단 일원으로 가서 그 곳 진인(마히토)으로부터 환대를 받고 시를 증여받았다는 사실은 고선사의 ‘서당화상비’에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당화상비’는 설중업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지 20여 년 뒤인 애장왕대(800~809)에 원효 유문(遺文)을 수집하고, 고선사에 원효 소조상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원효현창사업의 일환으로서 수립된 것인데, 그 ‘서당화상비’에서 서(序)와 사(詞) 두 부분에 걸쳐 설중업과 일본인과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 먼저 비문의 서에서는, “대력 연간(766~780)의 어느 해 봄에 대사의 후손인 한림(翰林) 설중업이 사행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갔다. 그 나라의 상재(上宰)가 이야기를 하다가 대사의 어진 손자임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멸) 여러 사람들이 정토왕생을 기약하면서 대사의 영험스러운 저술(靈章)을 머리에 이고서 잠시도 놓는 적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 손자를 만나봄에 미쳐 ‘금강삼매경론’을 우러러 사모하면서 3일 밤이나 와서 칭송하는 글(頌文)을 얻었다”고 하여 설중업을 일본의 상재가 반기었고, 또한 일본인들이 원효 저술을 존숭하여 칭송하는 글을 지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비문의 사에서는 4언구의 시로, “환위거사 담해지□ 명동상부 광국광가 윤문윤무 (6자결락) 기조부□□□욕□불승수무추창(還爲居士 淡海之□ 溟東相府 匡國匡家 允文允武 (6자결락) 其祖父□□□欲□不勝手舞惆悵)”이라 한 구절이 보이는데, 결락된 글자가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위 시구 가운데 환위거사(還爲居士)는 출가하였다가 환속하여 거사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이어 담해지□(淡海之□)의 담해는 일본의 ‘오오미’라는 성씨의 인물, 명동상부(溟東相府)는 일본 상부에 출입하는 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특히 상부(相府)는 앞의 서에서 설중업을 환대한 인물인 상재(上宰)에 대응되는 표현이다. 이어 광국광가(匡國匡家)와 윤문윤무(允文允武)는 천자가 국가를 바로잡고 문무의 덕을 겸비하였다는 의미로서 오오미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의 재상을 찬양하는 표현으로 보이며, 결락이 심한 후반부 구절의 대체적인 내용은 그 손자를 반기면서 조부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상 ‘삼국사기’ ‘속일본기’ ‘서당화상비’ 등의 자료에서 열거된 사실 내용을 종합하면, 원효를 존숭한 나머지 손자인 설중업을 만나서 반기고 송시를 증여한 인물은 한때 출가한 전력이 있으며, 오오미 마히토(淡海眞人)라는 성씨를 가진 상재(재상)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서 설중업과 환담한 일본인 상대 인물을 추적하면, 우선 오오미 마히토(淡海眞人)라는 성씨를 가진 인물로서 당대 관료이자 문인학자인 ‘오오미 미후네(淡海三船, 722~785)’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오미는 황족 출신으로 38대 덴지천황(天智天皇)의 적장자였던 오오도모황자(大友皇子, 메이지유신 이후 39대 弘文天皇으로 追諡)의 증손자였다. 그런데 오오도모황자가 부왕 말년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서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였으나, 부왕이 죽은 다음 해에 숙부의 반란으로 패사하여 왕위를 찬탈당함으로서 그 증손자인 오오미 미후네는 불운한 성장기를 보내었다. 오오미는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원개(元開)라고 칭해졌었는데, 30세가 되던 751년 환속하여 ‘오오미 마히토(淡海眞人)’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는 환속 후 관직에서 여러 번 좌절과 불운을 겪은 끝에 770년 덴지천황의 손자 고닌천황(光仁天皇)이 즉위하면서 출세길이 열리어 승승장구, 772년 마침내 대학두(大學頭)에 문장박사(文章博士)를 겸직하고 종4위하 형부경(刑部卿)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시문에 능하여 동년배의 고급관료인 이시노가미 세가즈구(石上宅嗣, 729~781))와 더불어 나라시대 한문학을 대표하는 일대의 석유(碩儒)로 존숭되었다. 그는 779년 일본에 계율을 전해온 당나라 승려 감진(鑑眞)의 전기(‘唐大和上東征傳’)를 찬술하였고, 진무(神武)부터 지토(持統)에 이르는 역대 천황의 시호를 찬진하는 등 대표적인 문인학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오오미 미후네의 최종 위계는 종4위하 형부경에 그치어 실제 재상 위계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였음에도 ‘서당화상비’에서 ‘상재(上宰)’ 또는 ‘상부(相府)’라고 표현한 것은 황족의 일원으로서 마히토(眞人)이라는 제1급의 성을 소유한 고귀한 혈통,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서의 높은 명성 등으로 설중업을 비롯한 신라 사신들에게 재상급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초년에 출가하였다가 환속하여 거사가 되었다는 경력 역시 환속하여 거사가 된 원효에 대해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또한 한때 승려생활을 한 인연으로 ‘금강삼매경론’ 등 원효의 저술들을 열독하고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인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한 나머지 원효를 칭송하는 한시를 지어주게 되었던 것 같다.

한편 혜공왕 15~16년(779~780)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의 고위직 임원인 정사 사찬 김난손(金蘭孫)・부사 급찬 김암(金巖)・대판관 한나마 설중업(薛仲業)・소판관 나마 김정락(金貞樂)・대통사(首譯) 한나마 김소충(金蘇忠) 등 5인 가운데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삼국사기’ 열전에도 보이는 대판관 설중업과 부사 김암이었다. 먼저 설중업은 원효의 손자로 표기되어 있으나, 연대상으로 4대손이나 5대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서당화상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일본에 출발할 당시 관직은 한림(翰林)이었고, 사절단에서는 대판관의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보아 최고 문인학자로서 문서 제작과 학문 교류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림은 원래 상문사(詳文師)였는데, 성덕왕 13년(714)에 통문박사(通文博士), 경덕왕 때 한림으로 개칭된 문한직(文翰職)이었다. 다음 김암은 김유신의 적손(嫡孫)으로 성덕왕 때 당의 요청을 받아 발해 원정군을 지휘한 적이 있던 김윤중(金允中)의 손자로 김유신의 5세손에 해당되었으나, 서손(庶孫)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분은 진골에서 강등된 6두품에 속하였다. 그는 일찍이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을 때에 음양가의 술법을 배워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지었다고 하며, 대력 연간(766~779) 귀국한 뒤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지방 군태수를 역임하고 집사시랑과 패강진의 두상대감(頭上大監, 뒤의 都護)이 되었다. 

혜공왕 15년(779) 설중업 등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삼국사기’ 김유신전(하) 말미 부분에 의하면, 일본의 국왕이 김암의 현명함을 알고 강제로 일본에 머무르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 당 사신으로 일본에 온 고학림(高鶴林)이 김암을 만나보고 즐거워하였으며, 이를 목격한 일본인들은 김암이 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인정하고 감히 머물러두지 못하여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당의 사신 고학림 등 5명이 나라의 헤이조교(平城京)에 입경한 것은 신라 사절단보다 8일 뒤였는데, 이듬해(780) 정월 3일에 신라 사신단과 함께 궁중의 태극전에서 고닌천황(光仁天皇)을 알현하였다. 그 뒤 5일・7일・16일 연이어 신라 사절단과 당 사신 일행을 위해 베푼 연회에서 신라와 당 사신, 그리고 일본 관리들 사이에서 환담과 시문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김암은 당에 유학하였던 경험과 음양학 대가로서, 설중업은 원효 손자이자 문인학자로서 당 사신단 및 일본 관료들과 국제적인 학문교류를 전개하였는데, 특히 당의 고학림과 일본의 오오미 미후네 같은 문인학자에게 높이 평가받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결국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과 결혼한 김유신, 둘째 딸로 추정되는 요석공주와 결혼한 원효, 이 두 거인 사이의 인연은 자손들인 김암과 설중업에게까지 이어져서 진골 왕족의 후예면서도 신분은 6두품이었고,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일본 사절단의 일원으로 동행하여 당과 일본 지식인들에게 크게 주목받았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16호 / 2022년 1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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