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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동용궁사 주지 연규 스님

“신행‧관광 두 축 굳건히 세워 한국대표 관음성지로 조성할 터!”

형의 죽음 목도 후 긴 방황
덕문 스님 은사로 삭발염의

영남권 화엄사 첫 말사에
최초 주지로 2021년 부임

‘99.9%는 관광객’ 선입관
천원 신권 보고 산산조각

부임 직후 은행서 급전
보수 시급한 곳에 집중

찻집 용궁선다에 온 정성
“절경 품은 번뇌없는 공간”

밀려오는 참배객 쉴만한
작은 쉼터 없어 ‘아쉬워’

증개축 대작불사는 필연
비경‧실용 조화 설계 절실

격려‧감사‧위로 한 마디
구업 단속 ‘복’짓는 일

해동 용궁사 주지 연규 스님은 “코로나19 여파에도 새해 일출을 보려 2만 명이 밀려 들어왔다”며 “비경을 간직한 데다 접근성도 수월하여 절의 발전 잠재력은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해동 용궁사 주지 연규 스님은 “코로나19 여파에도 새해 일출을 보려 2만 명이 밀려 들어왔다”며 “비경을 간직한 데다 접근성도 수월하여 절의 발전 잠재력은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파도는 발아래서 출렁이고 갯바위에 부딪힌 ‘철썩∼’ 소리 청명하게 들려온다. 푸른 바다 위를 걸어 고색창연한 절로 들어서는 것 같다. 

바다 위에 처음 절을 세운 스님은 고려의 고승 나옹 혜근(懶翁 慧勤·1320∼1376)이다. 해안가의 비경을 마주한 나옹 선사는 ‘뒤는 산이요 앞은 물이니, 아침에 불공 올리면 저녁에 복 받을 곳(背山臨水 朝誠暮福地)’이라 했다. 길지임을 확신한 나옹 선사는 토굴을 짓고 정진에 들어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화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 통도사 운강 스님이 보문사로 중창한 바 있고, 1970년대 초 주석한 정암(晸庵) 스님이 관음도량 복원 원력을 세웠다. 회향일 몽중에 백의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고 산 이름을 보타산(普陀山), 절 이름을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라 했다. 2000년대 들어서며 관광사찰로 급부상했고 ‘바다와 가장 가까운 절’, ‘제일 먼저 해 뜨는 절’이라는 입소문까지 더해져 국내외의 불자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정암 스님은 2021년 재적 본사인 조계종 제19교구 본사 지리산 화엄사의 말사로 등록했다. 

영남권 최초의 화엄사 말사로 기록된 해동용궁사의 첫 주지에는 연규 스님이 임명됐다.(2021.9.9.) 대구 가창 운흥사, 경기도 의왕 용화사 주지를 지낸 바 있고, 영천 은해사 기획국장, 여수 향일암 총무, 구례 화엄사 총무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종회의원이기도 한 연규 스님은 행정과 포교에 정평이 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해동용궁사’ 현판과 찻집 ‘용궁선다’.
‘대한불교조계종 해동용궁사’ 현판과 찻집 ‘용궁선다’.

동해의 수평선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궁선다(龍宮禪茶)는 전국의 사찰 찻집 중 으뜸으로 꼽힐만 하다. 연규 스님의 전언처럼 “번뇌 없는 공간”이다.

“새벽의 운무와 일출, 한낮의 만경창파, 노을과 달빛에 물드는 풍경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한 잔의 차가 비워지는 동안만은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사는 겁니다.”

주지 부임 직후 온 정성을 쏟은 곳이다. 리모델링이라 하지만 개축에 가까울 정도로 새롭게 변모했다.

“절이 확보한 면적은 9917m²(3천 평)이지만 마음 편히 앉을 곳이 없습니다. 좁은 통로로 인파가 밀려오니 안전상 벤치 하나 놓기 어렵습니다. 불자들은 법당 참배로 위안 삼을 수 있지만, 관광객은 걷고 서기를 반복하다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쉼표 하나쯤은 찍어 주고 싶었습니다.”
 

찻집과 탑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찻집과 탑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그러고 보니 영월당(迎月堂)‧해동선원 외 2층 이상의 요사채가 안 보인다. 종무실은 책상 3개가 실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협소하다. 부임 직후 한 달 넘게 절 밖에 방을 얻어 놓고 ‘출퇴근’ 했다고 한다. 누울 만한 방이 없어서다. 주지실도 여기저기 손보고 있지만 찬 바람 술술 들어온다. 용궁선다에서 담소 나누자고 한 연유를 알겠다. 여기 외에는 앉아서 이야기 나눌만한 쉼터가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진한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전각의 지붕과 벽의 작은 틈을 파고들었다. 철제난간은 부식되고, 염분에 강한 목재 전각도 한계를 넘어 힘을 잃어갔다. 입장료 없는 사찰이니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고 기본적인 보수‧유지만도 힘겨웠을 것이다. 주지 부임 직후만 해도 전깃불이 들어온 전각은 두 개였다.

“그 누구인들 불보살님 계신 도량 장중하게 보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 절을 중창하신 정암 스님을 비롯해 사찰 실무자와 신도님들의 마음고생이 참 컸으리라 사료됩니다.”

은행으로 달려가 급전해 왔다. 공양간을 비롯한 요사채의 낡은 벽을 뜯어내 새롭게 단장하고, 허물어져 가는 전각의 수미단을 손보았다. 볼품없어 보이는 오래된 인등(引燈)도 깔끔하게 교체했다. 저녁 늦게 참배하는 불자들의 안전을 위해 계단을 비추는 조명도 설치했다. 해동 용궁사의 야경도 일품인데 그것은 끊어진 전선을 모두 잇고 새 등을 달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공을 들이면 급한 보수는 마무리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참배‧관광객을 위한 공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장기적으로 증개축은 필연입니다. 그러나 불사를 섣불리 일으키지는 않으려 합니다. 천혜의 절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수용할 수 있는 실용성 높은 건축을 설계해야 합니다. 건축과 사찰 불사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의 연구와 지혜를 모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아직은 꿈같은 희망이지만 여건이 허락하면 자연학습관이나 박물관도 건립하여 참배객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로 내어주고 싶습니다.”

전각, 요사채 한두 개 더 세우려는 게 아니다. 해동용궁사 전체를 탈바꿈시킬 청사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부임 직후부터 고난의 연속이지만 기쁜 일도 있었다. 대웅전 불전에서 신권(新券)을 발견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절을 찾는 99.9%는 관광객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는 불전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1000원, 5000원, 10000원 지폐가 있었는데 너무 깨끗해 유심히 들여다보니 절반으로 딱 한 번 접혔습니다. 해동용궁사로 걸음 하기 전에 시주하려 은행을 다녀오셨다는 방증입니다. 그 신심에 저의 선입관은 깨졌고 이내 얼굴은 달아올랐습니다. 그 부끄러움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통해 초하루‧보름‧관음‧지장재일 등 4재일 법회 소식을 전했다. 대중 운집을 기대했던 게 아니다. 조계종 화엄사에서 임명한 새 주지와 함께 기도를 시작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첫 법회에는 10명이 참여했고 시간이 흐르며 동참 인원은 조금씩 늘고 있다. 향일암에서 행자 생활을 했고 총무도 맡은 바 있기에 해동용궁사의 발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을 듯싶다.

일출 전경. 올해는 2만명이 운집했다.
일출 전경. 올해는 2만명이 운집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준비했던 신년 행사를 모두 접었음에도 새해 일출을 보려 2만 명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평일인 오늘도 도량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해동용궁사의 최대 장점은 비경과 접근성입니다. 휠체어에 몸을 실은 노약자도 찾아오실 수 있는 도량입니다. 엄청난 발전 잠재력을 응축하고 있습니다.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한국 대표 기도도량‧관음성지로 조성할 자신 있습니다. 물론 관광지로서의 면모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관음성지의 특징을 함축한 ‘관음사’ ‘보문사’로 절이름을 바꿀 의사는 없는지 여쭈어보았다. “정암 스님께서 현몽 얻으시고 직접 지은 이름”이라며 “정감 느껴지는 절이름”이라고 전했다.

“불자들에게 용(龍), 용왕(龍王), 용궁(龍宮)은 친근합니다. 사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護法神將) 역할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덕이다. 야차, 건달바, 아수라 등도 악행을 일삼는 귀신에 해당되었지만 부처님 법에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으로 재배치됐는데 용도 마찬가지다.

“비를 내려 땅을 옥토로 만든다는 용왕도 신심 깊은 신인(神人)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명랑(明朗) 스님에게 황금 천량을 시주해 금광사(金光寺)를 창건케 했고, 진표(眞表) 율사에게 가사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바닷속 용궁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없어 어떤 환경을 조성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신성한 곳임은 틀림없습니다. 공(空)·중도 이론을 체계화한 인도의 용수(龍樹)와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전하며 엄청난 저술을 남긴 신라의 원효(元曉)도 용궁에서 ‘화엄경’과 ‘금강삼매경’을 얻어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법사를 초청해 법문을 듣고, 경전을 소장하고 있었던 용왕도 깨달음에 이르고 싶었을 겁니다.”
 

절은 바다와 산과 어우러져 비경을 빚었다.
절은 바다와 산과 어우러져 비경을 빚었다.

불자‧관광객 구분할 것 없이 이 절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하고 싶다는 뜻이다. 용궁선다에 정성을 들인 것도 ‘내려놓고, 쉬게 함’이다. 그 또한 부처님 법이다. 

일출을 보러 온 관광객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는 이유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해가 처음 떠오를 때 무량 백천만억 나유타의 지혜광명을 비추어 사견의 어둠을 없애신다고 하셨습니다. 새해의 첫해, 하루의 첫해를 보며 삶의 동력을 축적하고 희망을 품는 것도 부처님 가피입니다.”

대중에게 전하는 법문이 궁금했다.

“최근에는 구시화문(口是禍門)을 구시복문(口是福門)으로 바꾸어 보자고 했습니다.” 

사람의 입은 화의 근원이라는 뜻의 구시화문(口是禍門)은 중국 송나라 태종이 이방에게 칙명을 내려 편찬한 백과사전 격의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등장한다. ‘정신은 감정에 의해 발현되고 마음은 입을 통해 표출된다. 큰 강은 작은 개미구멍에 의해 터지고, 큰 산도 작은 함몰로 기울어진다. 병은 입으로 들어가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 입을 조심하라!’

“그 입으로 복을 지어가자고 당부합니다. ‘고마워’ ‘잘될 거야’ ‘당신은 멋진 사람이야’ 감사‧격려‧위로의 말 한마디가 상대의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되짚어 보면 내 복을 짓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三業) 중 하나인 구업(口業)을 확실하게 단속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3남 1녀의 막내였던 연규 스님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의 죽음을 목도한 후 방황하다 화엄사 일주문에 들어섰다. 은사 인연을 맺은 덕문(현 화엄사 주지) 스님을 만월당에서 처음 만났다.

“첫 말씀이 지금도 기억합니다. ‘친구합시다!’ 훗날에 이르러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제관계가 분명함에도 도반을 강조하신 건 ‘부처님 제자임을 명심하라!’는 말씀의 다름 아니라고 새기고 있습니다.”

해동 용궁사를 찾는 불자들에게 청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조계종 사찰로 거듭난 해동 용궁사의 신도회 출범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수희동참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덕 높은 스님만이 바닷속 용궁을 오가며 법문하고 경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푸른 바다에서 건져 올린 법(法)을 연규 스님은 이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풀어갈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617호 / 2022년 1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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