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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수용

기자명 효림 스님

‘받아들임’은 ‘감내’와 달라
통제불능한 일 가득한 삶
내면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마음이 지혜로운 선택할 것

드디어 7일 간의 미국 연수가 끝났다. 이제 휴가다! 도대체 몇 년 만의 일인가. 휴가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하늘이 약간 흐렸지만, 무사히 교육을 마쳤다는 안도감과 여행에 대한 기대로 이미 내적 흥분은 최고조였다. 약간의 사치를 부려 애틀란타-보스턴행 티켓은 미리 업그레이드 해뒀다. 어느 순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가끔 천둥 번개도 쳤지만, 길에서 마주친 동료들은 날이 곧 좋아질 거라 말했다.

오후 5시, 공항 스피커에서 날씨로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오후 7시, 비행기 탑승은 가능하지만 업그레이드 좌석 이용은 다음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안내를 들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오후 11시15분, 기상악화로 모든 비행이 취소되었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뭐! 공항이 크게 한 번 술렁였을 뿐, 그게 다였다. 이쯤 되면 내 마음을 대신해 누군가 고성의 항의를 할 법도 한데,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마음을 추슬러 안내데스크를 향했건만 내 앞에 300명은 더 서 있는 것 같았다. 앞뒤로 끝이 안 보이는 줄에, 데스크 직원은 세상 느긋하게 일처리를 하는데도 새치기나 짜증 섞인 목소리 하나 없었다.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줄을 선채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눴다. 누적된 피로로 퉁퉁 부은 내 두 다리가 어리둥절했다.

명상 수업을 하다보면, 종종 사람들이 ‘받아들임’의 의미를 그저 ‘감내해야 함’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이유로 한 청년은 불교를 믿으면 경쟁사회에서 뒤쳐질 것 같다며 고민했다. 정말 그럴까? 삶은 불명확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기대가 실망으로, 선의가 배신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한다 해도, 삶이 주는 아픔과 스트레스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의 기본 값에 대한 반응과 선택은 수행의 크기만큼 온전히 우리에게 열려있다.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단호하게 건강한 의도로 마음을 돌릴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황을 ‘바로 보아야’ 한다. 과연 이 상황 또는 이 문제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만일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수많은 판단과 감정으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삶에는 그저 묵연히 잘 통과해 내는 것만이 최선인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이때 중요한 한 가지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들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꽤 용기가 필요하다. 요령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보편적인 것임을 아는 것이다. 좋은 친구가 해주듯(충고, 조언, 평가, 판단 없이) 내 자신의 감정을 부드럽게 인정해주면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머릿속의 시나리오가 잦아들면서, 가슴이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지만 그저 따뜻한 태도로 가슴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다. 그러면 마음은 스스로 일어나 지혜로운 선택을 한다. 진정한 수용이란 수동적이고 무력한 태도가 아닌 오히려 근본적 변화로 이끄는 평화로운 전사에 가깝다.

미국에서의 웃픈 사연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계속되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애틀란타 공항을 떠올렸다. 아마 그날 공항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비교적 흔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불평접수와 야무진 보상을 받는데 감정적 대응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효림 스님
효림 스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계획이 크고, 포부가 클수록 어쩌면 실망, 좌절, 낙담이라는 손님이 나를 자주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살고 있는 평화로운 전사와 만날 때임을 기억할 수 있길 바래본다.

효림 스님 자비명상지도법사
metta4rest@gmail.com

 

[1618호 / 2022년 1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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