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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24)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7)

원효는 동아시아 불교 전체를 아우르는 국제적 성격의 불교 지향

민간전승 행적에 천착하다 삼국통일과정에서의 원효 역할 간과
태종무열왕은 민중 저변에 파급력이 큰 원효를 통해 왕권 강화
현장의 신역 접하며 당 불교계 혼란 간파하고 해결책까지 제시 

중국 서안 자은사에 있는 대안탑. 652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상(經像)을 안치하기 위해서 조성한 것으로 중국의 대표적 전탑이다.
중국 서안 자은사에 있는 대안탑. 652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상(經像)을 안치하기 위해서 조성한 것으로 중국의 대표적 전탑이다.

원효의 행적과 불교대중화운동,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추적한데 이어 저술과 불교사상을 검토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이 장절의 제목을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로 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원효의 행적과 사상의 이해를 추구하는 역사학자나 불교학자들의 관점과 접근방법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째는 원효 행적에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오해로 이미 6회에 걸쳐 이것에 관한 자료들을 검토했다. 결과를 종합하면, 원효 행적 가운데 특히 불교대중화운동을 주목하고, 주된 교화 대상이 평민과 노비와 같은 피지배층의 인물들이 다수였던 점을 높이 평가한 반면 국왕과 관련된 사실은 간과해 왔다는 점이다. 이런 오류의 이유 하나로 근거 자료에 대한 이해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원효 행적의 이해는 주로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의거하였는데, 찬술자인 일연이 “그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크나큰 업적은 ‘당전(송고승전)’과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다.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할 수 없고,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 특이한 사적만을 서술한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일연은 원효의 행적을 온전히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고 민간에 전승되는 특이한 사적만으로 ‘원효불기조’를 구성했다. 그 결과 원효의 행적 가운데서 피지배층 사이에 가장 친근하게 전승되는 이야기들만이 남게 되었으며, 요석공주와의 인연 설화도 민간 사회의 취향에 맞는 내용으로 윤색됐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편명인 ‘원효불기’에서의 ‘굴레에 매이지 않다’ ‘구속을 받지 않다’의 의미도 피지배층과의 관계만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고, 승속의 차이, 신분의 고하, 왕궁・사찰과 저잣거리 등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무애행으로 넓혀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확대해 이해할 때 7세기 삼국통일이라는 국가적 위업의 달성, 통일전쟁으로 인한 대다수 구성원들의 희생과 고통을 치유하는데 기여한 원효의 역할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다.

원효와 태종무열왕, 원효와 김유신, 설총과 신문왕의 관계 등은 앞 회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특히 원효와 태종무열왕의 관계는 요석공주와의 혼인을 주선하기 이전부터 이루어져 왔던 것으로 추측되며, “말년에 혈사(穴寺)를 보수하고 왕궁을 길이 떠나 경행락도(經行樂道)하다가 입적하였다”는 ‘고선사서당화상비’의 내용으로 보아 원효는 말년에 은거하기 이전까지 왕궁에 거주하였거나 왕실과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와 태종무열왕의 관계는 현장(玄奘)과 당태종의 관계에 비교된다. 현장에 의한 대규모의 불경번역 사업은 전적으로 당태종의 협력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것이지만, 당태종이 기대했던 것은 불경의 번역이 아니었다. 정관 19년(645) 2월 낙양에서 현장을 처음 만나자 환속하여 정치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고, 심지어 고구려 원정에 동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현장은 경전 번역을 주장하였고, 전쟁을 참관하는 것은 계율에서 금지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뒤 번역사업을 적극 지원하면서도 서역에 관한 지식을 비롯하여 정치적 자문을 기대하고, 때때로 환속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현장의 확고한 의지를 꺾지 못하고 번역사업의 지원을 통해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하는데 만족하였다. 당시 현장의 번역사업에는 도교 측의 반발과 구역불교 측의 불만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으로 당태종은 ‘노자’를 범어로 번역할 것과 불교경전은 번역되지 않은 것만을 번역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당태종의 사상정책이 정치이념은 유교에 의거하고, 불교와 도교의 공적 지위는 도교를 우위에 두는 정책이었고, 현장에 거는 기대도 불경번역 자체보다는 정치적 효용성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태종 말년경(648~649) 현장 번역팀의 일원이었던 회창사의 변기(辯機)가 고양공주와 간통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바로 처형하였다. 변기는 현장의 번역사업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현양성교론송’(645) ‘육문다라니경’(645) ‘불지경’(645) ‘청천문경’(648) 등의 번역을 담당하였고, 특히 ‘대당서역기’(646)의 저술과정에서는 현장의 구술을 직접 받아썼을 정도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음에도 용서하지 않았다.

한편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즉위에 앞서 정관 22년(648) 당에 사신으로 가서 당태종을 만나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유교와 율령제, 의복제도 등 당의 문물을 수입해 정치와 문화개혁을 추진, 삼국통일의 길을 열었다. 태종무열왕이 당에 다녀온 2년 뒤(650)에 원효가 현장을 직접 만나보려고 당에 유학을 시도한 바 있었고, 유학이 실패한 뒤 현장이 번역한 경전들이 속속 전래됨으로서 구역경전에 이어 신역경전을 폭넓게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태종무열왕, 그리고 아들인 문무왕의 적극적 지원으로 가능했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은 유교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모색하면서도 당의 선진적인 불교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바꾸지 않았는데, 당태종의 불교정책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태종무열왕이 원효와 요석공주의 결혼을 주선하고, 거사로서의 활동을 지원하였던 것도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인데, 이 점에서는 당태종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원효는 국왕이 개최하는 백고좌법회에 참석을 거부당할 정도로 진골귀족 출신 중심의 중앙 불교계에서는 배척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원효가 이런 불교계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 바로 ‘금강삼매경’의 강의였다. 당시 신라 정치계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신문왕으로 이어지면서 율령을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압하는 한편, 불교사찰에의 토지 기진을 규제하는 등 불교교단의 경제력 확대를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국왕의 입장에서 계율을 중시하는 귀족 출신 승려들과 달리 기성교단에 소속되지 않고 ‘거사’라는 자유로운 신분으로 승속을 넘나들며, 평민이나 노비 같은 피지배층과도 거리낌 없이 소통하고 있는 원효 같은 인물들과 연계함으로서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도 지배기반을 사회 저변으로 확대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원효가 폭넓게 경전을 섭렵하고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 당의 선진문화 수입에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대를 이은 후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평민이나 노비 같은 피지배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대중화운동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둘째는 원효의 저술과 사상체계를 이해하는 관점과 접근방법에서 나타난 문제점인데, 앞으로 불교사상의 문제로서 몇 회로 나누어 다루려고 한다. 

지금까지 원효의 불교사상 연구는 그의 저술을 개별적으로 주석하는 작업에 치중해서 많은 성과를 내주었고, 또한 중국과 일본의 불교사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는 작업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내주었다. 그리고 원효 불교사상의 중심적 주제로서 ‘대승기신론’을 주축으로 한 여래장계 사상으로 보고, 그 사상을 나타내는 키워드로서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의 이해에 주력한 것은 평가할 만한 성과이다. 그런데 원효 불교의 성립과정이나 배경, 저술의 편년과 사상의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이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80여부 200여 권으로 확인된 저술 가운데 현재 전하는 것은 22종에 불과하며, 그것도 서문이나 일부의 내용만을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위에 저술 연대가 확인되는 것은 ‘판비량론’(671) 1권뿐이기 때문에 저술의 편년이나 사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원효가 당시 동아시아문화권의 중심지인 중국에 유학한 점이 없었다는 점을 의식한 나머지, 동아시아불교사의 맥락에서 7세기 당 불교계의 변화과정과 관련시켜 원효 불교의 성립과 그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거의 이루지지 못하였다. 원효의 불교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졌거나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었으며, 원효 개인의 독창적인 산물만도 아니고 신라불교만을 토대로 이루어진 성과도 아니다. 공인 이후의 100여 년간의 신라불교사의 전개, 백제・고구려 불교의 통합, 수・당 불교의 전래와 영향 등 동아시아문화권 전체의 불교를 배경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원효의 저술목록을 보면 그의 불교의 폭과 사상의 다양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당시 중국 불교계에서 유통되고 연구되었던 불교사상 가운데 밀교 계통의 경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대승경전에 대해 주석을 하였다. 즉 반야・삼론・섭론・열반・여래장・법화・천태・계율・정토・유식・화엄・인명 등이 망라되어 있다. 원효는 당시까지 동아시아에서 유통되었던 대부분의 대승불교 경전과 여러 학파의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 유학의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불교 전체를 아우르는 국제적인 규모와 성격의 불교를 지향한 것이었다. 그는 특히 당 불교계 조류의 변화에 극히 민감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실례가 진덕여왕 4년(650) 의상과 함께 현장을 만나려고 당에 가려던 사건이었다. 불행히 고구려의 길에 막혀 실패하였지만, 현장의 신역경전이 일으킨 당 불교계의 파동을 주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장은 645년 귀국 이후 당태종의 지원을 받으면서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648년 5월15일 ‘유가사지론’ 100권의 완역은 당태종도 큰 관심을 가져 직접 열람하고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라는 서문을 친히 지어 주었다. 그리고 비서성의 관원을 동원하여 9부를 필사케 하여 전국의 9주(州)에 배포하여 유통케 하였다. 이 경전은 그 해 윤 12월에 당에 사신으로 간 김춘추(뒷날의 태종무열왕)에 의해서 신라에 전해왔으며, 곧 원효가 읽게 되었다. 원효가 당 유학을 시도하기 이전 초기 저술인 ‘대승기신론별기’에 ‘유가사지론’이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술이라기보다 연구메모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별기’의 서문에서 용수 계통의 중관학파와 무착 계통의 유식학파 사이의 공(空)・유(有)대립 문제를 지적하고, ‘대승기신론’으로 종합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당 불교계는 현장의 신역으로 인하여 신・구역불교 사이의 대립이 발생하였고, 급기야 신・구유식간의 갈등, 중관・유식의 대립, 일승・삼승의 논쟁, 불성 유・무의 논란 등으로 확대되면서 다양한 논전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중관・유식의 공・유 대립은 가장 근본적인 사상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불교사까지 소급하는 역사적 문제였다. 원효는 ‘유가사지론’을 접하면서 당시 당 불교계의 사상논란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근본문제의 해결 방향을 일찍부터 모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원효는 당에 다녀온 적이 없었으면서도 먼저 현장의 신역경전을 섭렵하고 당 불교계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태종무열왕의 지원을 받은 결과였다. 또한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수립과정과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거시적으로 동아시아불교사의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접근방법이 요구되며, 나아가 원효는 동아시아불교계 문제의 근원을 인도불교사에까지 소급하는 생성발전과정으로 접근하는 역사의식을 가졌었기 때문에 인도불교사의 맥락에까지 고려하는 방향으로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18호 / 2022년 1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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