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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승과 출가

기자명 민순의

출가는 누구나 가능… ‘도승’ 기회는 양반에게만

부처님 당시 승단이 정한 기준에 따라 출가여부 결정
중국 거쳐 한국에 들어오면서 불교·승단 국가서 관리
조선 때는 양반이면서 자격시험 통과해야 도첩 발급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제공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제공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의 승려법은 승려(비구·비구니)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3가지 자격을 요한다. 20세 이상일 것, 고졸 이상일 것, 종단에서 설치하거나 지정한 승가대학 또는 기본선원 과정을 이수할 것. 승려가 될 수 없는 결격사유도 있다. 속세 관계를 끊지 못한 경우, 금치산 및 한정치산의 경우, 경제적 파산, 형법상 피의자이거나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 파렴치범의 전과, 난치병이나 전염병, 정신 또는 신체 조건이 부적당한 경우 등이다. 승려가 되려면 세속의 기준만으로도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성인으로서 경제적, 사법적, 신체적(정신 포함) 제한이 없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미성년자는 출가가 불가능한가? 승려법에서는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를 승려로 규정하지만, 그 전 단계인 사미와 사미니에게도(18세 이상의 사미니는 식차마나니) 승려의 권리, 의무, 포상, 징계 등 제반 사항이 적용되므로 이들 또한 넓은 의미에서 승려라 할 수 있다. 사미·사미니계를 받으려면 13세 이상의 출가 행자로서 행자교육을 이수하고 비구·비구니처럼 고졸의 자격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다시 말하면 13세 미만의 유소년일지라도 출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아직 계를 받지 못한 행자의 신분이므로 승려법이 보장하는 승려의 권리와 의무는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석가모니 당시 일국의 신하들은 임금의 허락 없이도 출가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마하승기율’ 24, ‘명잡송발거(明雜誦跋渠)’ 2) 막상 부처는 출가의 자격에 제한을 두어 결격사유가 있는 자를 승단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을 경우 구족계가 금지되었고, 노예신분, 범죄여부, 채무관계, 질병력 등을 확인할 것이 율장에도 명시되었다.(‘십송율’ 21, ‘칠법중수구족계법(七法中受具足戒法)’ 1) 즉 초기불교 시대에는 출가할 때 나라의 간섭은 크게 받지 않았지만, 오히려 승단 자체에서 그 기준을 엄격히 하여 국가권력의 규제나 사회적 평판으로부터 어긋나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조계종의 승려법에 보이는 출가 조건은 ‘율장’에도 남아있는 바로 그러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이어받은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부처께서도 출가의 조건으로 신분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이는 석가모니의 고국인 카필라국 이발사로서 낮은 신분이지만 석가족 귀족들과 나란히 부처의 제자가 되었던 우팔리의 존재에서 확인된다. 한편 부처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알려진 라훌라의 이야기는 초기 불교의 승단에서도 미성년 수행자가 존재했음을 알려 준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 후조(後趙, 319~351) 때 불교의 가르침이 크게 번성하여 백성들 대부분이 부처를 받들고 앞다투어 출가하자, 임금이었던 석호(石虎)는 벼슬과 지위가 있는 자들을 남기는 방식으로 일반인 출가의 길을 제한하기 시작했다.(혜교, ‘고승전’ 9, ‘신이(神異)’ 1, ‘축불도징(竺佛圖澄)’) 이는 국가권력이 개인의 출가에 개입하기 시작한 사건으로서, 출가의 기회가 특히 사회적 유력계층에게 주어지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

후조의 뒤를 이은 전진(前秦, 351~394)으로부터 372년 한국 최초로 불교를 소개받은 고구려의 소수림왕도 불교와 승단에 대해 일차적으로 국가가 육성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불교 전래 2년 뒤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중국 출신 승려 순도(順道)와 아도(阿道)를 머물게 했다. 384년 중국의 남조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 침류왕도 이듬해인 385년 “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을 출가시켰다[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김부식, ‘삼국사기’ 24, ‘백제본기’ 2) 승려를 위하여 절을 짓는 것을 넘어 아예 그 절에 거주할 승려를 왕이 직접 선발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도승(度僧)’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출가(出家)’가 승려가 된(또는 되려는) 사람의 입장에 서 있는 말이라면, ‘도승(度僧)’이란 다른 사람을 승려가 되도록 허락한다는 뜻으로 출가시키는 이의 입장을 반영하는 말이다. 본래 도승은 ‘득도위승(得度爲僧)’의 줄임말인데, 여기에서 ‘도(度)’란 인도어 ‘바라밀(波羅蜜 paramita)’을 한자식으로 번역한 글자로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고 도달하게 된 최상의 종교적 상태인 구경열반(究竟涅槃)을 가리킨다. 따라서 득도위승 또는 도승이란 글자 그대로는 ‘깨달음을 얻은 뒤 승려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국왕이 승려를 출가시키는 경우에 주로 쓰였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실린 ‘도승’ 조항은 바로 국가기관인 예조에서 승려 지원자에게 시취(試取, 자격시험)와 정전(丁錢, 군역을 대신하는 값)을 받고 승려의 자격증인 도첩(度牒)을 발급하는 절차를 규정한 것이었다.

조선 초 도승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은 자격시험과 정전납부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사회였으므로 지원자의 출신성분 또한 도승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세종 대에 논의된 도첩의 발급 요건 즉 도승의 요건에는 시종일관 양반의 자제[兩班子弟]여야 할 것이 전제되었다.(‘세종실록’ 10권, 2년(1420) 11월7일 신미 ; ‘세종실록’ 44권, 11년(1429) 4월16일 신묘 ; ‘세종실록’ 95권, 24년(1442) 2월 15일 병오. 세종 24년의 기록에는 양반 대신 양가의 자제[良家子弟]로 표현되고 있지만, 맥락으로 보아 양반 출신의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분 조건은 단지 규정상의 항목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종 1년(1419) 11월 비구니 사원인 정업원(淨業院)을 제외한 전국 모든 사찰의 노비 소유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바로 며칠 뒤인 12월 초 예조판서 허조(許稠)가 “서울의 사찰에 거주하는 승려들은 거의 모두가 양반의 자제인지라 나무를 지고 물을 긷는 데 반드시 원망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쯤 노비를 주어 그 마음을 위로하십시오”라고 건의한 바 있다.(‘세종실록’ 6권, 1년(1419) 11월28일 무진 ; ‘세종실록’ 6권, 1년(1419) 12월10일 경진.) 이로 보아 실제로 조선 초에는, 적어도 도성 내의 사찰에 관한 한 대부분 양반 출신의 승려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도승과 출가는 입장이 다른 말이었다. 국가의 허락을 받는 도승의 기회는 양반들에게만 주어졌을지 몰라도, 허락이 필요 없는 출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식한 승려들이 국가의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병역에 나간 군인이나 향리‧역리의 자식 또는 공노비와 사노비들까지도 제 마음대로 머리를 깎으니 몹시 잘못된 일입니다.[無識僧徒不畏國令, 不唯兩班子弟, 有役軍人、鄕吏驛子、公私隷, 擅自剃髮, 甚爲未便.]”(‘세종실록’ 10권, 2년(1420) 11월7일 신미.)

세종 2년의 이 기록은 출가라는 말 대신 체발(剃髮) 즉 머리를 깎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양반의 도승이 아닌 여타 일반인들의 자발적인 출가 사례를 잘 보여준다. 다음 글에서는 조선 전기 일반인 출가의 양상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겠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장 
nirvana1010@hanmail.net
 

[1618호 / 2022년 1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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