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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 수보리가 법을 청함

기자명 진우 스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머무는바 없어야 머물게 되고 항복받을 것 없어야 항복받아
수보리와 같은 최상근기는 생각 이전에 저절로 행동부터 나와
대승근기는 생각을 거쳐 마음 머물지 않게 되기에 미세한 차이

인도 바라나시에 있는 초전법륜지 사르나트에 세워진 다메크 대탑.
인도 바라나시에 있는 초전법륜지 사르나트에 세워진 다메크 대탑.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 善女人 發阿縟多羅三貘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염려하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당부하고 부촉하느니라. 너희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말해 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면 마땅히 이러히 머물지 말며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 시킬지니라.”

유연 세존 원요욕문(唯然 世尊 願樂欲聞)“예, 세존이시여 자세히 듣고자 원하옵니다.”

세존(世尊)께서 수보리의 물음을 들으시고 수보리의 마음 씀씀이를 잘 파악하시니 부처님의 뜻과 같은지라 착하고 착하다고 칭찬을 하신 것이다. 그럼 무엇이 부처님의 뜻과 같다고 하시는 것일까? 이미 설명한대로,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깨닫게 하였고,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길이길이 보리심을 갖게 하였으며, 앞으로 오는 중생들에게 길이길이 잘 전승되도록 하신 것이다”라고 한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써 “과연 내가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護念)하고 부촉(咐囑)하느니라”고 하시어 수보리의 말을 완전히 인가(印可)하신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말씀하시되 “네가 물은 바에 있어서는 내 마땅히 너를 위하여 말할 것이니, 너희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깨끗이 하여 자세히 들으라”하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시었다. 다시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을 불러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을진댄 곧, 망령된 집착과 삿된 지견(知見)을 여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참된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이니 너희의 경계가 나의 경계와 둘이 아니요, 또 그렇다고 집착하지도 않을 터이니,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에 주(住), 즉 머문다느니 항복 받는다느니하는 생각조차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면 이미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한다.

즉, 이와 반대되는 인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가 아닌 것이 생기게 되고, 또 머문다 하는 즉시 머물지 않는 것이 생기는 까닭에 머무는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 머무는 것이 없으면 또한 항복 받을 것조차도 없을 것이니, 항복이라는 것도 없게 된다.

따라서 만약 머문다고 말할 것 같으면, 머무는 것이 없음에 머물러야 할지니, “마땅히 머물지 않는 것에 머무르라”고 하신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누구든지 이를 아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곧 주인이면서 손님 노릇을 자처하는 꼴이 된다.

그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에 머물지 않는 것이 진정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신 것이고, 이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하고, 곧 금강삼매(金剛三昧)라 하며, 즉,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한다. 이렇듯 주(住-머무름)함이 없어야 진짜 주(住)함이 되는 것이고, 항복 받을 것이 없어야 진정 항복을 받는 것이 된다는 것을 일러 주심이다.

이를 제일의제법문(第一義諦法門)이라 하는 것이니, ‘금강경’ 머리에 “이러히 내가 들었다”고 한 대목에서 최상승(最上乘)의 근기(根器)를 가진 사람은, ‘이러히’에서 벌써 제일구(第一句)를 깨닫게 되고, 다음 “이러히 머물고 이러히 항복 받으라”고 한 ‘이러히’에서는 대승근기(大乘根器)가 제일구(第一句)를 깨달을 것이며, 다음 “보살마하살은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 받으라”고 한 문장에서는 중근기(中根器)가 제일구(第一句)를 깨달을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라’고 한 것 이외의 허다한 말을 덧붙이는 것은 달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이 달인 줄 알고 보는 격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이고,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내어라” 라고 하는 것이 진짜 달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이다.

이러한 뜻을 안 수보리 존자가 ‘유연세존(唯然世尊)(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원요욕문(願樂欲聞-원하옵건데 즐겨듣고자 하옵니다)’라고 하신 것이고, ‘이러히’라고 하는 최상승의 제일의제법문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수보리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손가락만 보는 사람을 위해서 부처님께 묻고 또 물었던 것이다. 진정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이다.

‘금강경’의 첫 경문에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들은 내용인 즉, 여시(如是-이러히) 라고 한 대목을 그대로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의 소유자라고 했다. 바로 수보리 존자와 같이 마음을 깨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히’라는 의미 속에는 이미 공(空)의 진리와 반야(般若) 지혜의 제일의제법문(第一義諦法門)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러히 머물고 이러히 항복 받으라”고 한 대목에서 이를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 다음으로 대승의 큰 근기(大乘根器)를 가진 사람이다. “머물지 않으면서 마음을 써라”라고 하는 뜻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다음 “보살마하살은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 받으라”고 한 대목에서, 머물지 않으니, 항복 받을 대상도 없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항복을 받는 것이라는 뜻을 여실히 잘 아는 사람을 중근기(中根器)라고도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못마땅한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또, 무슨 말을 하던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더라도 마음이 절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좋고 싫은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니 청정하다는 까닭이다.

또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촉감을 느끼거나 머리로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좋다 싫다는 분별(分別)에 걸리지 않는다.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냄새, 맛, 촉감,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를 육근(六根)에 마음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에 대한 욕심이 끊어지고,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끊어지고, 무엇을 가져야 하겠다는 욕심이 끊어지고, 이성에 대한 색욕이 끊어지고, 자존심이나 권력욕, 지배욕, 등의 명예욕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그 어느 하나라도 마음이 그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오욕락(五慾樂)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는 마음 가운데 업(業)이 하나도 없으니, 그 무엇에 다다르더라도 저절로 마음이 머물지 않는데 비해, 대승근기(大乘根器)는 마음이 머물지 않아야 마음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뜻을 알고 행하기 때문에,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의 생각하기 이전에 벌써 저절로 행동이 나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즉, 대승근기(大乘根器)는 삼업(三業)과 육근(六根)과 오욕락(五慾樂)에 있어서 여기에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된다라고 하는 생각을 거쳐서 마음을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와는 백지장 같은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할 때나, 말을 할 때나, 생각을 할 때의 삼업(三業)에 있어서, 마음을 끄달리지 않게 하려는 마음의 노력이 따르게 되니,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의 저절로 완전하게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하겠다.

또 중근기(中根器)는, 삼업(三業)과 육근(六根)과 오욕락(五慾樂)에 빠지는 마음에 대해, 즉시 항복을 받아서 다시는 끄달리지 않게 하는 마음을 말한다. 만약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면, ‘내가 괜한 것에 대해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통해 욕심에 대한 항복을 받는 것을 말한다. 또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욕심과 성냄,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잡생각의 탐진치(貪嗔痴-탐심, 성냄, 분별) 삼독심(三毒心)을 즉시 멈추고, 그러한 마음에 대해 항복을 받는 것을 중근기(中根器)라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통해 말씀한 내용에 대해, 그 자체로만 이해하기 보다는, 실생활에 있어서 나의 문제로 보고 적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의 마음 또한 ‘금강경’ 속의 1250인의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행동과 말과 생각의 삼업(三業)을 청정히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 강의를 듣는 동안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함께 해 나간다면 업장(業障) 소멸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1619호 / 2022년 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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