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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선원 선원장 효담 스님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끊임없이 욕심 부려서 괴로움 자초
만족할 줄 알아야 괴로움·권태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어
자신의 본성 깨닫고 욕망·근심·걱정에 휘둘리지 않는 게 선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를 고슴도치에 비유했습니다. 인간관계는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돋아있어서 서로에게 가까이 가면 상처를 준다는 겁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게 부부인데 이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제일 많이, 끊임없이 주지 않습니까? 쇼펜하우어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를 두어 상처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거리 두기가 바로 예의이고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쇼펜하우어는 오늘날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시계추는 욕망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욕심을 부립니다. 욕망이 충족된다면 약간의 만족감과 행복 이후 권태가 찾아옵니다. 권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욕망을 만들게 되고, 욕망이 충족되면 또다시 약간의 행복과 권태가 반복됩니다. 행복은 욕망에 기생합니다. 결핍을 메꾸고자 하는 이런 욕망은 행복과 권태의 반복 속에 결국 괴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욕망을 없애고 만족할 줄 안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탐욕을 버리고 현재에 만족해 행복해지려면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욕망이 어떻게 탐욕으로 변하고 자신을 괴롭히는지 알아채야 합니다. 욕망을 갖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공부를 통해 잘 다스려 탐욕에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육조단경’ 제일 앞에는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중에서도 무념이라는 것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을 가리키는 겁니다. 거울로 비유해보겠습니다. 거울에는 여러 형상, 그림자들이 많이 비칩니다. 거울에 비친 형상과 그림자는 우리의 ‘생각’이고, 거울은 ‘생각 이전’입니다.

우리는 생각 이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처님 이전 인도 사람들은 이를 알고 생각을 멈추면 탐욕에 빠지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생각 때문에 모든 걱정, 근심, 욕망,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부처님도 출가 후 두 번째 스승으로부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평상시의 마음으로 돌아와 여전히 고뇌가 존재함을 알아채고 더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찾아 떠났습니다. 일종의 진통제와 같았던 겁니다. 진통제를 맞으면 그 순간은 괜찮습니다. 여러 고통의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이 생겨버리면 수행 이전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생각에 끌려다니는 마음을 떼놓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지금도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이고 한낱 형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거울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 집에서 자기 집을 찾는다’,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꿈을 꾼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지금 꿈속에 ‘나’라는 주인공이 하나 있습니다. 꿈 안에 있는 ‘나’는 내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지금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꿈속에 있는 주인공이 아무리 꿈속을 돌아다녀도 꿈꾸고 있는 이 본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다 돌아다녀도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 역시 지금 꿈꾸는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꿈 안에서 용맹정진 하고 있는 겁니다. 찾기 위해선 꿈을 깨야 합니다.

영화관에 방문했습니다. 표를 끊고 들어간 상영관에서 스크린이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크린은 영화에 포함돼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크린 위에서 영화가 상영되며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이지 영화 안에 스크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가 끝나 꺼져버리면 텅 빈 스크린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끊임없는 생각이 눈앞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선불교 공안집 ‘무문관’을 보면 백장야호(百丈野狐)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장은 중국 백장산에서 첫 선종 사찰을 창건한 백장회해 선사이고, 야호는 약삭빠른 여우를 뜻합니다. 백장 스님이 설법할 때마다, 어떤 노인이 항상 대중들과 함께 법문을 들었습니다. 하루는 노인이 법문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자 백장 스님은 노인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저는 과거 500년 전에 이 산에 살았는데 한 수행자가 제게 ‘도인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하여 500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습니다. 부디 선사께서 여우 몸을 벗겨주십시오.”

그러자 백장 스님은 자신에게 그 질문을 다시 해보라고 했습니다. 노인이 ‘도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라고 다시 묻자 백장 스님은 “인과에 매하지 않는다(不昧因果)”고 답했습니다. 노인은 이 말에 크게 깨닫고 여우 몸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인과에 매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에 휘둘리고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욕망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생각도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생각을 끊는 게 아닌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한 선정을 합니다. 생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프지 않지만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암이라고 진단받는 겁니다. 그 순간 근심과 걱정이 들고 온갖 고통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괴로움은 암 초기 때 이미 찾아왔어야 합니다. 상황을 알고 나서 아프다는 생각이 일어난 겁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괴로움이란 감정이 따라옵니다. 생각을 떼어버리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 생각에 휘둘리며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불교에는 육조혜능 선사가 설한 돈교(頓敎)의 불이(不二)가 있습니다. 불이란 ‘파도와 물이 둘이 아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현상 세계는 파도입니다. 거울이 물이라고 하면 거울에 비친 영상이 파도입니다. 이 물과 파도는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파도만 보이고 본성인 물은 안 보이는 겁니다. 우리는 물이 보이지 않아 파도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물을 인식한다면 파도를 타며 윈드서핑을 할 수 있습니다.

파도가 물인지 알게 된다면 집채 같은 파도가 와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파도가 물인지 모른다면 빠져버린다는 생각과 감정에 휘둘려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감정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 감정과 생각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탐욕을 알아차리는 순간 만족이 찾아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재작년에 중국 양쯔강에서 물이 너무 많이 내려와 제주도 바닷물의 소금 농도가 떨어져 생태계에 큰 영향을 준 일이 있습니다. 소금 농도가 너무 떨어져 바다에 생명체가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선 양쯔강의 많은 물이 욕망입니다. 이처럼 욕망이 너무 커 탐욕이 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겁니다. 바다에 염분이 없으면 바다가 아닙니다. 죽은 바다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요르단 옆에 그 죽음의 바다라고 불리는 사해가 있습니다. 사해는 소금 농도가 엄청나게 높아 생명이 살지 않습니다. 요르단강의 물이 적게 들어오는 겁니다. 물을 탐욕에 비유했는데, 욕망을 전혀 충족하지 않아도 생명은 살 수 없습니다. 죽은 바다입니다. 살아가려면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합니다. 사람은 이런 긍정적이고 순수한 욕망이 있어야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순수한 욕망이 엄청나게 심해져 탐욕이 되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만약 금욕 수행을 하면서 욕망을 다 제거해 버린다면 이스라엘에 있는 죽은 바다 사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욕망하고 감정을 가지는 것은 괜찮다는 말입니다. 슬퍼야 할 때 슬퍼해야 하고, 기쁠 때 기뻐해야 하지 않는다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 이런 욕망과 감정이 격해져 휘둘린다면 고통이 찾아오기에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선불교는 이런 감정들을 제거하지 않고 오직 견성(見性)만 이야기합니다. ‘육조단경’에도 ‘오직 견성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견성하려면 생각과 분별을 멈춰야 합니다. 견성이라는 것이 바로 그 자리, 본성입니다. ‘견성하면 성불한다’ ‘견성하면 본성을 본다’ 이러는 순간부터 이미 본성을 잃은 것입니다. 견성, 있는 그대로 보아야합니다. 글자 그대로 ‘성’이 곧 ‘본성’이고 ‘불성’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순간들과 근심 걱정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에 불과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내가 곧 바다임을 확인하고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정리=고민규 기자 mingg@beopbo.com

이 법문은 3월2일 목동 가야산선원에서 선원장 효담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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