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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하]

기자명 윤청광

법당에 앉은 채 “이제 불을 지르시게”

<사진설명>한암 스님이 아니었다면 상원사는 불타버렸을 것이다. 사진은 손재식씨가 촬영한 <오대산>/대원사 에서 발췌.

1925년 오대산으로 들어가 ‘천고에 자취 감춘 학(鶴)’이 되어버린 한암 큰스님은 1951년 3월 22일 세수 75세, 법랍 54세로 좌탈입망에 드실 때까지 당신의 말씀 그대로 장장 27년 동안 불출동구(不出洞口), 결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산문 밖으로 나오신 일이 없었다.

1941년 일본불교와 차별화하기 위해 뜻있는 우리 스님들에 의해 창종된 불교교단이 바로 ‘조선불교조계종’이었는데 이때 한암 스님이 초대 종정이 되셨다. 오대산 그대로 들어앉아 계시면서도 초대종정에 추대된 것이었다.


“적멸보궁 참배나 다녀오게”

그러자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이 한암 종정 스님을 총독부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한암 큰스님은 불출동구를 접지 않고 일언지하에 미나미 총독의 초청을 거절했다.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미나미 총독은 부총독격인 정무총감 오오노를 오대산으로 보내 배알케 했다. 이때 오오노가 한암 큰스님께 법문을 간청하자 스님은 묵묵히 백지 위에 ‘정심(正心) 두 글자만 써주셨다.

그후 경성제대(京城帝大) 교수로 와있던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명승 사또오가 월정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큰 절 월정사에서는 급히 한암 스님이 계시는 상원사(上院寺)로 사람을 보내어 한암 스님으로 하여금 월정사로 내려와 사또오 교수를 만나라고 전했다. 그러나 대중들과 김장준비 울력을 하고 있던 한암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사또오 교수가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뵈었다.

사또오 교수가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나서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입니까?” 스님은 묵묵히 놓여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은 일대장경과 모든 조사어록을 보아오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스님은 사또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시면서 한말씀 하셨다. “적멸보궁에 참배나 다녀오게.”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 입산하여 지금까지 수도해 오셨으니,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스님은 한마디로 잘라 답했다.“모르겠노라.” 사또오가 일어나 절을 올리며 말했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에 스님께서는 사또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마디 하셨다. “활구라고 말하여 버렸으니 이미 사구(死句)가 되어버렸군.”

사또오는 이때 상원사에서 3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한암이야말로 일본에서도 찾을 수 없는 큰스님”이라고 극구 칭송하고 다녔다.

그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한암 큰스님의 도(道)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을 전해들은 일본정부의 경무국장 이께다(池田淸)가 오대산으로 찾아와 한암 스님을 뵙고 한마디 물었다.

“이번 전쟁은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순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다. 스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일본의 경무국장. 만일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이긴다고 대답하면 길길이 날뛸 것이 아닌가? 스님께서는 과연 뭐라고 대답하실 것인가? 그러나 스님은 태연히 말씀하셨다.


“전쟁은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긴다”

“그야 물론 덕(德)이 있는 나라가 이길 것이오.”
스님의 이 대답을 들은 일본의 경무국장 이께다는 더 이상 아뭇소리도 못한채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오대산을 떠났다.

한암스님은 중국의 한산(寒山)이 한산 깊숙히 들어가 산문 밖으로 평생 나오지 않은 채 저 유명한『한산시』를 남긴 한산처럼 여전히 오대산 깊숙히 들어앉아 불출동구하며 틈나면 좋아하는 ‘한산시’를 읊조리곤 하셨다.
1943년 봄, 전주 청류동 관음선원의 묵담선사가 한암스님께 실참법문을 내려주십사 간청하자 한암스님께서는 한산시 24편을 손수 써서 보내주셨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시도 들어있다.

“남을 속이는 자 살펴보니/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가는 격/단숨에 집으로 돌아온들/ 바구니 속에 무엇이 있을꼬.”

그렇다.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여가며 직위를 탐내고, 부(富)를 탐내며, 천하의 부귀영화를 향해 미친 듯 달려가지만, 그것들 모두 ‘바구니에 물을 담고’달려 가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암 스님은 이 한산시를 통해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에게 큰 가르침을 내리신 셈이다. 과연, 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간들, 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스님 법력이 상원사 살려

1951년. 6.25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밀고 올라갔다가, 밀려 내려왔다를 거듭하고 있던 1월. 느닷없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까지 겪어야 했지만, 바로 이 무렵 오대산에서는 밤낮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국군장교가 한 무리의 병력을 이끌고 한암스님과 수좌들이 수행하고 있던 상원사에 들이닥쳤다. 모든 스님들을 절마당으로 모이게 한 뒤, 그 국군장교가 선언했다.

<사진설명>한암 대종사의 부도와 탑.

“공비들이 절을 거점으로 암약하므로 오대산에 있는 모든 사찰은 다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이 절도 불태워야겠으니 스님들은 모두 짐을 챙겨 속히 떠나시오!”
이때 한암 스님은 잠시만 말미를 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는 법당으로 들어가 정좌하고 앉으신 채 국군장교를 불렀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불을 지르시게.”
국군장교가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어서 나가시오!”
그러나 스님은 법당 앞에 정좌한채 요지부동이셨다.
“그대는 군인이니 명령을 따르는게 본분이요. 나는 출가수행자니 법당을 지키는게 본분, 둘 다 본분을 지키는 일이니 어서 불을 지르시게.”
국군장교는 범접할 수 없는 한암 큰 스님의 법력 앞에 어쩌지 못한채 부하들에게 기상천외의 명령을 내렸다.
“이 절의 문짝들을 뜯어다 마당에 쌓아라!”
그리고 그 국군장교는 문짝만을 뜯어다 마당에 쌓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뒤, 총총히 산속으로 사라졌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찰, 상원사가 불타지 않은채 오늘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바로 저 한암 큰스님의 법력 덕분이었다.


윤청광/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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