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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몽고족과 대설산

기자명 이재형

정복자의 말에서 내린 소박한 몽고인의 초상

짐을 꾸려 숙소 밖으로 나왔다. 새벽공기가 꽤나 쌀쌀하다. 어둠이 채 걷어드리지 못한 별들이 희뿌연 하늘에 걸려 있다. 2600년 전 카필라국의 젊은 왕자 싯타르타도 저 별을 보고 깨달았다지. 오랜 고행에 야위고 뼈만 남았을 그 젊은이에게 저 별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진설명>둔황에서 300여km 떨어진 대설산. 해발 5555m의 이 산은 몽고인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갈수록 낯설어지는 중국음식들. 간단히 아침식사를 떼운 후 차의 시동을 걸었다. 오늘 목적지는 간쑤성(甘肅省) 몽고족자치현의 대설산이다. 둔황의 상징 막고굴보다 대설산을 먼저 간다니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몽고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차는 숙소를 빠져나와 고향길 같은 도로를 세차게 나아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길가 옆 드넓은 목화밭에는 벌써 목화를 따는 농부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인다. 도로도 그런대로 괜찮은데다 차량이 별로 없어서인지 차의 속력은 140~160킬로미터를 넘나든다. 그렇게 두 시간 여 달린 뒤 안시(安西) 앞에서 대설산으로 난 좁은 길로 방향을 돌렸다. 조금 더 달리니 도로가 끊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이 험악하다.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황무지 구릉들. 차는 곡예를 하듯 점프를 하고 덩달아 우리의 엉덩이도 들썩인다. 풀풀 날리는 먼지들을 헤치며 한참을 나아갔다. 그 때 뽀얀 먼지들 사이로 멀리 지평선에 길게 늘어선 산들이 그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치롄산맥이다.


해발 5555m의 대설산으로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구릉들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고 마침내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하늘이 어찌 저리도 파랄까. 마치 푸른 물감을 꾸~욱 눌러 짜놓은 듯 하다. 굽이진 길을 얼마간 오르니 멀리 백양나무 숲이 보인다. 큰 나무가 귀한 이 곳에 저리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니 사람들이 사는 곳일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몽고족 마을이다. 마을을 처음 건설할 때 마을 주변에 돌을 둥그렇게 쌓았다고 마을 이름도 석포(石包)다. 마을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젊은 남녀가 거리에서 당구를 치고 있는 모습도 띄었다.


한국-몽고는 형제국가(?)

차는 마을을 지나 대설산을 향했다. 사방이 온통 눈이다. 하늘에서 원을 그리던 독수리가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고도계는 2500미터를 넘어 3000미터에 이르렀다. 한라산은 물론 백두산보다도 훨씬 높이 올라온 것이다. 갑자기 2호차에서 운전을 하던 한 스님이 어지러움증을 호소했다. 고산병이다. 운전자를 바꾸고 속도를 줄여 천천히 올라갔다. 3400미터 쯤 올라가니 축구장 크기의 공터가 있고, 멀리 얼음으로 꽁꽁 언 대설산이 보였다. 이 산의 최고 높이는 5555미터로 그 규모도 54만3000평방키로미터의 거대한 산이다. 특히 44개의 빙하천이 흐르는데 그 중에서도 토밍몽커(透明夢柯)라는 빙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진설명>빡빡 깍은 머리의 아이 모습, 특히 엉덩이가 이채롭다.

우리는 3400미터에서 오르기를 멈췄다. 때가 겨울이니만큼 빙판 때문에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것이 현지인의 설명이다. 사막만 보다가 눈을 만난 일행들은 가만히 걸어야 어지럽지 않다는 몽고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눈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곳에서 우리는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고 다시 산 아랫마을로 향했다.

몽고족 안내인은 마을로 내려오는 내내 한국과 몽고는 형제국임을 강조했다.

“몽고말로 한국을 솔롱거스라고 합니다.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이죠. 또 비슷한 말도 많습니다. 아빠가 몽고말로 ‘아브’고 말(馬)은 ‘멀’이라고 합니다. 또 인두는 똑같이 ‘인두’라고 부르고 아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니네’라는 말도 있습니다. 형제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몽고인의 말이 맞을 수 있지만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몽고와 만난 것은 13세기초다. 몽고군이 거란의 유민들을 추격해 고려에 들어옴에 따라 몽고와 고려가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친 후 한 때 ‘형제의 나라’로 칭했다. 그러나 1218년부터 이후 40여 년간 7차례 걸친 몽고의 침입은 한반도를 초토화시켰고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물론 이 때문에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조성되기도 했지만 경주 황룡사 구층탑이나 대구 부인사 등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사라진 원인이 되기도 하다. 또 무신정권이 막을 내린 후 몽고는 매년 수십에서 수백 명의 고려여인들을 공녀로 끌고 갔다. 고려시대 문인 이곡에 따르면 당시 공녀로 뽑힌 가족들의 통곡이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고, 비통함으로 목을 매거나 우물에 몸을 던지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진설명>중국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구대, 이 오지마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 몽고는 세계 최강이었다. 60만 민족으로 8000만 한족을 눌렀으며, 아시아와 유럽 양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 깃발을 꽂는 그곳이 곧 몽고의 영토가 됐으며,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몰살시켰다. 이런 몽고군에 맞선 고려의 40년 항쟁이 얼마나 처절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인 기황후와 몽고의 멸망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몽고가 막을 내리는데 고려출신의 공녀가 단단히 한 몫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려인 기황후. 그녀는 고려에서 착출돼 간 공녀로 뛰어난 미모와 지략으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몄으며 이로 인해 심각한 몽고의 내분을 가져왔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 주원장이 몽고를 치게 되고 결국 쇄락의 길을 걷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사진설명>몽고인들은 외부인이 올 경우 환영잔치를 열곤 하는데 손님이 술을 마실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 게 특징이다.

어쨌든 고려는 80여 년간 몽고의 정치적 영향 아래 있으면서 여인의 족두리나 신부가 빰에 연지를 찍는 것, 옷고름에 차는 장도(粧刀), 머리를 땋을 때 넣는 다리 등 몽고문화가 한국에 정착됐다. 몽고 현지인이 말하는 이런 비슷한 언어도 그 시대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마을 안쪽은 밖에서 본 것보다는 커 보인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영락없는 우리의 시골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며 잔치를 열었다. 재미있는 것은 각 사람에게 술잔을 따르며 노래를 부른다는 점이다. 술잔을 받아 마실 때까지 노래는 끊이질 않는다. 남도의 육자배기를 닮은 듯한 몽고 여인들의 구슬픈 노랫소리에 두어 잔 연거푸 들이키니 곧 취기가 오른다. 슬쩍 빠져 나왔다. 문밖에서 한 소녀가 열심히 제기를 차고 있는데 민첩한 발놀림이 신기에 가깝다. 환영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와 차에 오르려 할 때 갑자기 전통복장으로 갈아입은 한 몽고여인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웃는 모습이 해맑다.

몽고인들에게 옛 영화는 과거일 뿐이다. 말 탄 정복자의 자리에서 내려 온 그들은 오히려 외몽고와 내몽고라는 민족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 특히 내몽고는 독립국가가 아닌 중국의 한 자치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오히려 낫다 싶을 정도다.

몽고인들의 정겨운 인사를 뒤로 하고 다시 둔황으로 향했다. 파란하늘에 언제 나타났는지 봉황새 모양을 띤 거대한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 이 오지에도 곧 핸드폰 개통되죠”

이웨이현 관광국(旅遊局) 밍지꺼 국장


“몽고와 한국은 모두 우랄알타이어족으로 문화와 언어에 있어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생긴 모습도 비슷하고요.”

간쑤성 쑤베이(肅北)현 관광국[旅遊局] 밍지꺼(明吉格) 국장은 “이곳 대설산은 중국 내에서도 보긴 드문 천혜의 경관을 갖춘 곳”이라며 “외국인들이 이곳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편의시설을 확충하겠다”고 말했다. 또 그는 “우리가 방문한 석포마을 사람들도 올 8월이면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밍 국장의 말을 듣다보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중국의 성장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오지마을까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는 것이, 심지어 이 곳 사람들에게 핸드폰이 그렇게 필요한 것일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 평화스런 마을이 ‘편리’와 ‘이익’을 얻는 대신 자칫 더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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