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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소중한 인연들 덕분이죠”

‘한국영화계 레전드’ 차승재 동국대 영상대학원 교수

대학졸업 후 동네 형 소개로 옷장사 시작
탁월한 안목·사업수완으로 큰 돈도 모아
부동산 투자했다 전 재산 한꺼번에 날려

대학친구 김태균 감독 권유로 영화계 입문
제작부장서 2년만에 제작실장으로 도약
1995년 ‘우노필름’ 설립…제작자로 나서
봉준호·허진호·장준환 등 신인감독 발굴
‘살인의 추억’ ‘타짜’ 등 수많은 명작 제작 

차승재 교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영화제작자로서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냈다. 이 기간 그가 제작한 작품만 70여편에 이른다. 시나리오를 파악하는 탁월한 안목으로 그가 제작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흥행몰이를 이어갔다. 사진=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차승재 교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영화제작자로서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냈다. 이 기간 그가 제작한 작품만 70여편에 이른다. 시나리오를 파악하는 탁월한 안목으로 그가 제작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흥행몰이를 이어갔다. 사진=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요즘 흔히 쓰는 말 중에 ‘레전드’가 있다. 특정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이룬 이를 칭하는 말이다. 오랜 기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으며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에게 붙이는 찬사이기도 하다. 

차승재(63, 송하) 동국대 영상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는 한국영화계의 레전드다. 한국영화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명작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돈을 갖고 튀어라’(김상진 감독, 1995년) ‘비트’(김성수, 1997)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 ‘처녀들의 저녁식사’(임상수, 1998) ‘플란다스의 개’(봉준호, 2000)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 ‘화산고’(김태균, 2001) ‘결혼은 미친 짓이다’(유하, 2002)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 ‘말죽거리 잔혹사’(유하, 2004)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2004) ‘연애의 목적’(한재림, 2005) ‘타짜’(최동훈, 2006) 등이 모두 그가 제작자로 참여한 작품이다. 이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 된 봉준호, 허진호, 최동훈, 김성수, 임상수, 장준환 등도 모두 그가 발굴하고, 밀어준 ‘차승재 키즈’들이다. 그들이 오늘에 이르게 된 데는 차승재라는 제작자 없이 설명이 어려울 정도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을 거쳐 동국대 교수로 ‘인생 2막’을 열어가고 있는 그는 대학교수가 돼서야 불교와 인연을 맺은 ‘늦깎이 불자’다. 그럼에도 누구 못지않게 신심이 깊다. 서울 봉은사 수미산원정대를 1기로 졸업했고, 불교지도자네트워크인 불교리더스포럼(상임대표 이기흥)의 문화예술계 공동대표를 맡아 불교문화 선양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국제불교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차승재라는 인물에게서 영화를 뺄 수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영화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 학창시절 연극반이나 영화동아리 활동 등의 ‘끼’를 보인 것도 아니었고, 간혹 영화관을 찾았지만 ‘영화광’은 아니었다. 대학에서도 불어교육학을 전공해 자신이 평생 영화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때까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만 학창시절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독서광이었던 점은 그를 영화와 연결시킬 수 있는 인연 고리였다.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86세대’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깊이 빠졌다. 정치 민주화와는 물론 사회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봤다. 강압적인 조직문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이런 성향은 그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졸업 무렵 교사자격을 취득했고, 잘 나가는 대기업에 취업자리도 마련됐지만 이를 모두 마다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사업은 옷 장사였다. 

“대학시절부터 누구에게 구속받는 걸 싫어했다. 넥타이를 매고 평생 직장생활만 하는 삶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동네 형이 보세의류를 파는 장사를 했다. 돈을 많이 번다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조금 떼주겠다고 해서 시작했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 무렵 한국은 외국 유명 의류회사의 제품을 대행 제작하는 주된 생산지였다. 한국인들의 제작 솜씨가 좋고 인건비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의류회사는 제작과정에서의 불량 등을 염두에 두고 제작물량의 103~105%가량의 원단을 보내왔다. 불량이 난 것은 고치고, 남은 원단으로는 옷을 만들어 파는 경우가 많았다. 보세 의류시장은 주로 이런 물건들을 싼값에 구입해 소비자에게 재판매하는 방식이었다. 도매시장은 박스 단위로 판매되고, 경쟁이 치열해 게눈 감추듯 물건들이 소진되다 보니 짧은 시간에 잘 팔릴만한 물건을 찾는 안목이 없으면 손해 보기 십상이었다. 그는 지게꾼 박스에서 옷 한 장을 빼내 잠깐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지 금세 알아봤다. 그가 도매상에서 떼온 옷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옷 장사를 할 때 4000만원을 가지고 시작했다. 당시 대학등록금이 50~60만원 정도였으니 꽤 많은 금액이었다. 집에서 결혼자금으로 쓸 2000만원을 가불받고, 여기저기서 빌렸다. 그 돈을 1년도 되지 않아 모두 갚고도 남았으니 장사가 잘된 편이었다. 한 달에 순수익 800만원을 찍은 적도 있었다.”

첫 사업은 순조로웠다. 서울 반포의 작은 가게에서 시작했지만, 곧 잠실에도 2호점을 냈다. 그렇게 몇 년 만에 2억이 넘는 돈을 모았다. 누구 부럽지 않을 만큼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둘째 형님에게서 연락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형님은 부동산에 밝았다. 개발 호재를 미리 알아내 투자를 하고 큰 수익을 올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형님이 “속초에 있는 땅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면서 투자를 권유했다. 형님 말씀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옷 장사로 모은 돈과 가게까지 몽땅 처분해 전 재산 2억4000여만원을 투자했다. 희망이 절망이 되는 건 찰나였다. 형님을 끌어들인 업자들은 일종의 ‘기획부동산업자들’이었다. 거짓 정보를 흘려 터무니없는 값을 받고 튀는 전문 사기꾼들이었다. 

“앞이 캄캄했고 허무했다.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원형탈모증까지 생기더라. 한동안 방황하다 ‘내가 잘하는 옷 장사를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하며 툴툴 털어버리려 노력했다.”

워낙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 가운데 ‘박봉곤 가출사건(1996)’ ‘화산고’(2001) 등을 연출한 김태균 감독도 있었다. 김 감독과는 대학시절부터 돈독한 술친구였고, 옷 장사를 할 때도 자신의 가게 근처에서 종종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이 무렵 김 감독은 영화감독의 등용문이라 불리던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를 나와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영화인이었다. 투자 실패로 방황하던 어느 날, 김 감독이 영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영화엔 문외한이었기에 처음에는 농담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예쁜 여배우들을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웃음) 분위기도 바꿀 겸해서 1~2년 정도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1991년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맡은 일은 영화 제작부였다. 영화제작은 제작자를 중심으로 크게 연출, 촬영, 제작, 음향, 미술 등의 분야로 나뉜다. 각 파트의 협업을 통해 한 편의 영화가 제작된다. 제작부 막내는 촬영계획에 따라 배우들의 스케줄 확인은 물론 장비운반, 도로통제, 식사준비 등을 담당한다. 말이 좋아 제작부이지, 실상은 공사현장의 일용직과 다를 바 없었다. 영화제작 현장에서의 궂은일들은 모두 제작부 막내들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대우는 각박했다. 제작부 막내들은 영화 1편을 찍는 동안 500만원 정도 받는 게 전부였다. 영화 1편 제작을 위해 고용되다 보니 월급의 개념은 없었고, 제작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이 겪어야 할 생활고는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제작부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 가운데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흔치 않았던 때라 그는 처음부터 제작부장 직함을 달았지만, 당시 제작부 막내들의 근무환경은 그로서도 큰 충격이었다. 훗날 한국 영화제작자협회장이자 영화회사 대표로서 제작부 막내들이 중심이 된 영화노조의 뒷배가 되고, 그들의 처우 개선에 적극 나선 것도 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 장사로 다져진 사업수완과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는 털털한 성격으로 그는 제작부에서도 짧은 시간에 두각을 드러냈다. 제작부장에서 2년여 만에 제작실장으로 올라섰다. 제작부 막내와 부장이 영화제작 현장을 지원하는 업무라면 제작실장은 예산관리는 물론 영화제작의 전체 스케줄을 관리한다. 영화제작을 총괄하는 전문 프로듀서인 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영화제작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영화제작으로 진로를 굳혔다. 

“뭘 특별히 잘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선배들이 잘한다, 잘한다고 하니까 진짜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일도 일이지만 사람들이 좋았다. 영화제작 현장은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끈끈한 의리도 있었고 사람 사는 향기가 났다.”

‘미스터 맘마’(강우석, 1992)로 처음 제작실장에 이름을 올린 그는 ‘101번째 프로포즈’(오석근, 1993)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장길수, 1994) ‘너에게 나를 보낸다’(장선우, 1994) 등 7편의 작품에 잇따라 참여했다. ‘제작현장의 공기만으로도 영화제작이 잘 되고 있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던 그였기에 영화제작은 빈틈이 없었다. 차츰 제작자로서의 가능성도 드러냈다. 장정일 작가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제작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청소년 관람불가 작품임에도 서울에서만 38만명이 관람하는 흥행을 이뤘다. 기대 이상의 수익을 거머쥔 제작사 대표는 그에게 두둑한 사례금도 건넸다. 

이 무렵 대기업들이 속속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작품성을 갖춘 한국영화들이 흥행을 이어가자 대기업들이 ‘돈 되는 일’을 놓칠 리 없었다.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한 대기업에서 “제작비 3억원을 줄 테니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1995년 그가 제작자로 나서면서 만든 첫 회사 ‘우노필름’은 그렇게 설립됐다.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를 설립하는 것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는 사람을 믿었다.

“옷 장사를 시작할 때도 영화제작에 첫발을 내디딜 때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일들이었다. 영화사 대표도 마찬가지라고 봤다. 어차피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이고, 그 관계가 진솔하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차승재 교수는 지나온 삶을 돌이키면서 늘 사람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그래서 사람향기가 듬뿍 묻어나는 세상’은 그가 오랜 기간 꿈꿔온 세상이기도 하다. 
차승재 교수는 지나온 삶을 돌이키면서 늘 사람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그래서 사람향기가 듬뿍 묻어나는 세상’은 그가 오랜 기간 꿈꿔온 세상이기도 하다. 

“걸음마 뗀 국제불교영화제 대중화가 내 인생의 남은 목표”

동국대 교수하며 불교와 인연…불교서적 등 읽으며 불교에 심취
수미산 원정대 1기·불교리더스포럼 문화예술 공동대표로 활동
자승 스님 권유로 국제불교영화제 시작…불교영화 가능성 기대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화계에서 탄탄하게 쌓아놓은 인맥은 첫 작품부터 효과를 발휘했다. 그가 제작실장을 맡아 찍었던 첫 영화 ‘미스터 맘마’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김상진 감독을 영입해 첫 작품 ‘돈을 갖고 튀어라’를 촬영했다. 훗날 ‘투캅스3’(1998) ‘주유소 습격사건’(1999) ‘광복절 특사’(2002)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2007) 등 한국 코미디영화의 한 획을 그은 김상진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이 영화는 거액의 돈이 세탁되는 사회 부조리를 코믹하게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맞물리며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관객수 16만명을 기록하며 데뷔작으로서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는 평가를 얻었다. 

‘우노필름’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은 김성수 감독과 함께한 ‘비트’(1997)였다. 허영만 만화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정우성, 유오성, 임창정, 고소영 등을 당대 최고 스타반열에 오르게 한 히트작이기도 했다. 폭력성이 짙어 청소년 관람불가였지만 서울에서만 35만명 가까운 흥행을 가져왔다. 그는 이 영화로 ‘황금카메라상’ 제작공로상을 수상하는 등 전문 영화제작자로서 명성도 얻게 됐다. 

승승장구했다. 이후 ‘8월의 크리스마스’ ‘처녀들의 저녁식사’ ‘유령’ ‘킬리만자로’ ‘지구를 지켜라’ ‘역도산’ ‘남극일기’ ‘플란다스의 개’ ‘봄날은 간다’ ‘화산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 ‘살인의 추억’ ‘말죽거리 잔혹사’ ‘범죄의 재구성’ ‘연애의 목적’ ‘타짜’ 등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 그가 제작한 작품은 총 70여편. 내놓는 작품마다 줄줄이 ‘흥행몰이’를 이어갔다. 그렇기에 그는 ‘손만 대면 황금으로 바꿨다’는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 손’에 비유되기도 했다. 

“영화는 활자화된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1차적으로 시나리오가 중요한데, 제작자는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눈이 필요하다. 어릴 때 시와 소설을 많이 읽었던 게 그때 도움이 되더라.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다른 제작자들과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때론 직접 스토리를 구상해 영화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임창정이 주연한 ‘행복한 장의사’(장문일, 2000)는 내가 만든 스토리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신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허진호, 임상수, 민병천, 오승욱, 박흥식, 봉준호, 장준환, 한재림 감독 등은 모두 ‘제작자 차승재’를 통해 자신의 첫 영화를 제작했다. 대다수 제작자들이 검증된 감독들을 선호했지만, 그는 신인 감독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줬다. 

“좁은 영화시장에서 실력이 검증된 감독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설령 어렵게 모셔와도 그런 감독들은 자기 색이 지나치게 강했다. 영화는 다양한 파트에서 협업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감독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 젊은 신인 감독들은 대중의 눈높이와 교감할 수 있고, 기존의 성공한 사례를 답습한다거나 안주하지 않았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 ‘8월의 크리스마스’ ‘살인의 추억’ ‘타짜’ 포스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 ‘8월의 크리스마스’ ‘살인의 추억’ ‘타짜’ 포스터.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참신한 소재와 실험적인 성향의 작품이 많았다. 때론 흥행참패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젊은 신인 감독들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기생충’(2019)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이 대표적이다. 1997년 ‘모텔 선인장’의 조감독을 했던 봉 감독을 눈 여겨 본 그는 함께 작품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봉 감독이 가지고 온 시나리오는 ‘플란다스의 개’(2000)였다. 제작자로서 ‘이거 하면 망한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워낙 실험정신이 강했던 봉 감독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참패였다. 그럼에도 그는 봉 감독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작품을 바로 구상했다. 그렇게 해서 발표된 것이 ‘살인의 추억’(2003)이었다. 이 작품은 원래 연극을 위해 제작된 희곡이었다. 대본을 보는 순간 “되겠다”는 감이 왔고, 연극 극단대표를 설득해 공동 제작을 이끌어 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송강호, 김상경 배우의 열연에 힘입어 ‘살인의 추억’은 525만명의 관객이 영화관을 찾게 했다. 전작의 실패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그를 회생시킨 ‘효자’이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영화 산업의 선두주자였던 ㈜싸이더스의 대표였다. 직원 수만 300여명에 이르는 몇 안 되는 중견기업이었다. 영화산업은 1편의 영화제작을 위해 연출, 촬영, 미술 등의 인력들을 채용한 뒤 제작이 끝나면 흩어지는 구조여서, 별도의 직원을 둔 영화회사가 많지 않았다. 영화 1편의 흥행여부에 따라 회사의 경영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상황에서 300명의 직원을 둔다는 건 무모한 일일 수 있었다. 

“영화 1편을 찍는 전 과정은 그 회사의 자산이다. 영화 1편을 찍은 뒤 모두 흩어지면 자산은 남지 않는다. 한국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봤다. 무엇보다 열악한 고용환경에 있는 제작진에게 생계 안정은 중요한 일이었다.”

동국대에서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2004년 어느 날 황종연 동국대 국문과 교수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교수직을 추천했다. 홍기삼 총장도 그의 영화제작 경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대학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오랜 기간 쌓아온 인연 관계 덕분이었다. 

“황 교수도 오랜 술친구였다. (웃음) 그 무렵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수습 좀 해달라고 했다. 학위도 없었고, 영화사 대표를 맡고 있는데 가능할까 싶었지만, 동국대가 교육부에까지 질의해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받아왔다. ‘교수님 아들’을 두고 싶었던 어머니가 ‘1년만이라도 해보라’고 해서 엉겁결에 교수가 됐다.”

2008년 우리 사회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문제로 큰 파동을 겪었다. 이른바 ‘광우병 사태’는 MB정부 퇴진 운동으로 번졌다. 그 역시 길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이 그가 영화제작자의 길에서 물러나게 되는 빌미가 됐다. MB정부는 광우병 사태 직후 집회에 참여한 영화예술인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고, 그도 사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싸이더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영화제작자에서 물러난 그는 대학교수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동국대가 조계종립이라는 점은 그가 불교를 접한 인연이 됐다. 학창시절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던 그는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학교에서 동료 교수들과 수련대회도 가고 여러 스님을 만나면서 차츰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경전과 불교서적을 접하는 기회가 늘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처님 가르침이 삶의 지혜로 다가왔다. 불교에 대한 배움의 욕구도 커졌다. 지난해 5월 아내와 함께 봉은사 수미산원정대 1기에 입학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더불어 ‘세계일화국제불교영화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불교를 소재로 세계에서 제작된 다큐 및 영화를 한 자리에 모으는 작업이다. 국내에서 불교를 주제로 영화제가 열린 것은 ‘세계일화국제불교영화제’가 처음이었다. 

“상월선원 회주 자승 스님이 어느 날 부르더니, ‘이웃종교는 유치원 어린이부터 청소년, 장년층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선교하고 있는데 뭐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뒤늦게 불교를 알고, 배운 뒤, 내 주변을 부처님 세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고 발원했었다. 첫 시작은 이것이라고 봤다.”

지난해 8월26~30일 서울 대한극장에서 열린 ‘세계일화국제불교영화제’는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15개국에서 62편의 작품이 출품됐고, 매 작품은 모두 만원을 이뤘다. 

“지난해 영화제에서 어떤 분은 모든 작품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와 극장 앞에서 노숙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일지 몰랐다. 불교영화에 대한 가능성이 느껴졌다. 사찰 창건설화나 스님들의 수행일화 등 한국 불교문화에는 스토리텔링 할 수 있는 소재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불교영화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제 걸음마를 뗀 ‘세계일화국제불교영화제’를 대중화하는 게 남은 목표라면 목표다.”

세계일화국제불교영화제는 올해 8월에도 예정돼 있다. 현재 출품 예정작들에 대한 심사가 진행 중이며 지난해보다 참가국과 작품 수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의류판매 사업가에서 영화제작자로, 대학교수로 이어진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사람’이다. 그가 거쳐온 그 다양한 일들이 모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렇기에 그는 ‘진중한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인연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늘 발원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를 알아가는 삶, 그래서 사람 향기가 듬뿍 묻어나는 세상’은 그가 오랜 기간 꿈꿔온 세상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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