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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시대의 불교] 4. 불교 의례로 본 구제활동

죽은 자만이 아니라 죄책감 시달리는 생존자 마음까지 살펴 

고려 때 수륙재 설행 기록 드물지만 조선서 사회 통합 매체로
트라우마 전문가 허먼, “집단 의례는 치유에 매우 중요한 요소”
대만은 대중성 띤 민속 음률에 치유 메시지 담아 승속이 합송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국행수륙재는 조선 초기부터 설행돼 왔다. 서울 진관사가 2013년 12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는 모습. [법보신문DB]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국행수륙재는 조선 초기부터 설행돼 왔다. 서울 진관사가 2013년 12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는 모습. [법보신문DB]

동아시아의 종교의식을 살펴보면 재난을 대비하거나, 피해입은 개인과 사회를 치유하려는 종교의 노력이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까지도 포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의의 재난으로 죽은 영혼, 원한을 안고 죽은 망혼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종교의례는 교단을 불문하고 어느 종교나 자체적인 교의에 기반한 절차와 형식을 가지고 거행되며, 이러한 의례는 또한 사회에서 종교를 필요로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불교 역시 사십구재, 영산재, 생전예수재, 수륙재 등의 의례가 유주·무주고혼들을 위해 설행되어 왔다. 유교 또한 가뭄 발생을 원한을 품고 죽은 여귀(厲鬼)의 탓으로 여겨 ‘엄격매자(掩骼埋胔)’를, 역병이 유행할 때는 ‘여제(厲祭)’와 같은 구휼적 기양의례를 설행했다. 

수륙재가 한국에서 설행된 것은 기록상 고려 태조 때부터이지만, 고려시대의 수륙재는 다른 소재(消災)도량이나, 재(齋), 법석(法席), 법회(法會)에 비해 그 설행의 기록이 드물게 등장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다양한 호국법회와 소재도량이 거의 폐지되고 수륙재만이 ‘육전(六典)’에 법제화된 유일한 불교의례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고려왕실의 원혼들을 천도하고, 혼란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설행된 조선시대 수륙재가 조상을 위한 천도재의 일환으로 간주되어 유교상례와 결합되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전기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수륙재가 거행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여귀를 달래고 눌러서 재앙을 없애는 여제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던 것에 있다. 

결국 조선 전기에는 왕조가 바뀜으로써 야기되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종교적 대안으로 국행수륙재가 실행됨으로써 당시의 사회적 불안이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비록 법령으로는 범패와 불교의례를 금지했지만,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적합한 사회적 치유의 대안이 부재했던 것이다.

수륙회의 공덕으로는 ‘명양양리(冥陽兩利; 이승과 저승 모두 이롭게 한다)’라는 표어가 자주 사용된다. 업의 과보가 아닌 죽음을 당한 자, 전쟁으로 인해 죽은 자, 죄 없이 형을 당해 죽은 자, 역병이나 자연재해로 죽은 자, 자살자 등에 대해 차별 없이 평등한 공양을 통해서 시주 본인이나 그 가족의 현세적 안녕과 망혼의 극락왕생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다른 사자공양의례나 우란분회(盂蘭盆會)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산 자까지도 구제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한국불교, 나아가 동아시아불교 천도의식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차원에서 ‘산 자’까지 구제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재난으로 인한 사망자 외에 사망자의 가족이나, 생존자 역시도 그에 버금가는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에 따라, 망자를 천도하는 의식에서는 사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과 동시에 생존자의 다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의례적 배려를 교의와 절차 안에 포함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이나, 재난 상황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갖는 피해 중에 생존자 죄책감(survivor’s guilt) 혹은 생존자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 ‘생존자 죄책감’은 전쟁, 자연재해, 대형사고 등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외에 자살자 유가족도 갖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생존자 죄책감은 그에 해당되는 체험을 겪지 않은 이들이 사는 이 세상과의 ‘단절’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피해자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시 이 세상에 ‘재통합’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게 된다. 수륙재 같은 천도의식을 포함하는 여러 종교의식들이 그러한 재통합 작업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사건이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분단의 상황 속에서 해소되지 못한 채, 국민과 지역을 분열시키며 무거운 구름처럼 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이 트라우마는 한국전쟁의 경험자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의식 또는 무의식 차원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역과 세대를 분열시키는 부정적인 현상의 중심에는 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휴전 이후 제대로 전쟁 트라우마를 해소할만한 사회적 기제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기저에서 부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트라우마 전문가인 주디스 허먼(J. Herman)은 트라우마의 치유 과정으로 신뢰를 통한 안정감 회복, 기억과 애도, 사회관계의 복원이라는 단계를 제시한다.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이 ‘상처의 증상을 고백하고, 사건·사고를 ‘고통스럽게’ 기억해내며, 그 아픔을 치유동반자와 함께 공감하고 애도한 후, 마침내 이웃이나 직장, 사회 등과 긍정적인 관계 맺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트라우마 치유 역시 기본적으로 이와 유사한 맥락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사회적 승인과정이다. 치유의 첫 단계는 광범위한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사고로 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이 공식적으로 인지되어야 하고, 트라우마 희생자의 치유에 대한 공감이 형성되어야 한다. 둘째는 기억과 집단의례 과정이다. 이는 망각되었거나, 혹은 망각되기를 강요당했던 사건의 전말, 그리고 일차적 희생자 집단의 삶과 고통을 현재화하고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공감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트라우마 치유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인 ‘공감’ ‘기억’ ‘집단의례’를 확보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피해자와 주변사람들 간에 합의를 거친 종교의식인 것이다.

트라우마 체험을 다른 이들과 공감하는 것은 피해자가 세상에서의 존재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 과정에서 생존자는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보다 넓은 공동체에게서 도움을 찾게 된다. 피해자들은 공동체로부터 인정(recognition)과 배상(restitution)이라는 두 가지 반응이 있을 때라야 세계에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사회를 재통합할 수 있다. 종교인들이 정성 들여 거행하는 의례와 기도는 이들 피해자에게 해줄 수 있는 공동체 차원의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재난의 경우처럼 책임을 물을 대상이 명확치 않을 때 종교의례는 피해자들에게 강력한 회복의 기제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례는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를 종교적인 차원으로 표출할 수 있는 행위절차인 동시에 그 의례가 표상하는 종교적·주술적인 힘의 효과를 공유하게 하기도 한다. 즉, 의례는 교의적 상징의 동작과 언어에 힘입어 고통스러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주술이기도 한 것이다. 대중은 종교의례가 주는 이러한 효과를 통해 정서적인 위안을 얻고, 다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회복하게 되기도 한다.

일본의 쓰나미 지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재난 대비 매뉴얼에서 준비되지 않았거나, 미처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을 종교단체에서 의례와 봉사활동을 통해 보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대형재난의 사후처리에 국가와 종교교단이 협력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따라 2016년 9월 동해안지역 지진 이후 대형 자연재난의 가능성이 커진 한국사회에서 수륙재와 같은 불교의식이 앞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설행하고 있는-공연문화에 가까운-수륙재의 절차나 형식을 재난현장이나 피해자들을 위무하는 장(場)에서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수륙재라는 의례의 본질은 망혼을 천도함으로써 산 자들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그야말로 산자와 망자 모두에 대한 ‘위로’이다. 전체 수륙재 절차 중에서도 양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알갱이’들만을 설행하는 약식의 의례 프로그램과 인적 구성을 미리 정리·준비해두었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탄력성을 기대해본다. 

거기에 더하여, 대만불교의식의 경우처럼 스님과 대중이 함께 재의식의 범패를 함께 부르는 절차를 제안하고 싶다. 불보살께 고하거나 청하는 내용은 스님이 노래하지만, 그 외 불보살을 찬탄하거나 기도를 올리는 진언과 같은 범패는 대부분 스님과 대중이 함께 노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승속이 합송하는 범패는 일반인들이 부르기에도 어렵지 않고 반복적인 음률로 구성된다.

한국불교의식에서도 한글가사 화청(和請)과 같이 재의 공식적인 절차 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범패승[魚山]의 재량에 따라 재의 성격에 맞추어 임시로 가사를 바꾸어 부르거나 하는 식으로 의식현장에 모인 대중들과의 소통을 도모하는 형식이 존재한다. 대중성을 띤 민속 음률인 화청에 사회적 치유를 위한 교의를 담아서 대중들로 하여금 후렴구를 합창하게 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교단 측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다면,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수륙재가 무형문화재 내지 공연문화의 입지를 넘어서서, 불의의 죽음들을 기억하고, 망자들의 존엄성을 의식을 통해 실현시키는 장(場)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대형 자연재난과 사회적 사고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현대사회에서 수륙재와 같은 불교의식이 수행할 수 있는 공공적 역할에 대해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방법론에 대해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김성순 전남대 연구교수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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