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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시대의 불교] 1. 누가 무엇을 구제하는가

기자명 이혜숙

그물망처럼 얽힌 우리 삶에서 서로 구제하는 게 보살의 길

부처님은 갖가지 설법으로 중생이 고통서 벗어나는 길 제시
불자라면 부처님이 선도한 ‘중생구제’ 잘 따라가는지 살펴야
‘내’ 고통 덜기 위해서라도 ‘너’의 고통 줄이는 게 연기의 이치

이혜숙 박사는 ‘코로나 보살’이라는 용어가 있듯 코로나가 오든지 가든지, 오직 서로가 서로를 구제할 수 있음도 알아차려야 할 기회라고 말한다. 사진은 화엄사 스님들이 수해지역을 찾아 복구활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 [법보신문 DB]
이혜숙 박사는 ‘코로나 보살’이라는 용어가 있듯 코로나가 오든지 가든지, 오직 서로가 서로를 구제할 수 있음도 알아차려야 할 기회라고 말한다. 사진은 화엄사 스님들이 수해지역을 찾아 복구활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 [법보신문 DB]

온 지구촌의 COVID-19와 전쟁들과 이런저런 난리통 가운데서도 바야흐로 불기 2566년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온다. 누구라도 이런 생각 들겠으나, 지금 여기에 부처님이 계신다면 당장 무엇을 하고 계실지가 몹시 궁금하다. 봉축 기념특집으로 하필이면 ‘재난’과 ‘구제’를 논하게 된 것이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 역시 인연법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과연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는 무엇이 재난이고, 무엇이 구제인가.

지난 2년여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코로나의 기습에 목숨을 건 불안감이 매우 컸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예방주사를 빨리 놓으라고 성화 부리고, 또 누군가는 강제 주사를 맞으란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어디 그것뿐인가, 도시는 경제활동이 활발치 않으니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이 늘어났고, 산촌에서는 큰 불까지 겹쳐 수많은 이재민이 거처를 잃었다. 설상가상 근래 선거판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극렬한 편싸움이 벌어졌고, 국민들 심경에 피로감이 작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심각한 자연재해나 불안한 정국만이 우리네 괴로움의 전부인가. 이쯤에서 혹시 우리에게도, 부처님이 설하신 근본교의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좀 더 깊이 알아차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시다시피 종교는 본인 자신의 복리(福利)와 안락을 추구함은 물론이고,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널리 여러 가지의 실천덕목을 가르쳐주고 있다. 수많은 불교경설도 그런 이타행을 말해 왔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구제사상을 돌아보는 까닭은 지금 바로 불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상기하자는 취지일 터이다. 어쩌면 종교인들에게 습관적인 말씀의 잔치 즉 주어가 없는 ‘바람직성’ 언설에 그치지 않고, 각자 주체로서 진정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것을 목표로 한다면 찬찬히 원점에서부터 돌아보자. 구제해야 할 우리들의 괴로움, 무엇이 그 괴로움인지를 알아야 서로 올바르게 도울 것이 아닌가.

부처님으로 오시기 전에 청년 싯달타가 주목하기 시작한 괴로움의 근본이 무엇이던가. 불교종립대학에서 필자가 기초교리를 가르치던 청년들에게 ‘고제(苦諦)’의 개념만 이해시키기도 쉽지가 않았었는데, 실은 부처님 당시부터 쉽지 않았던 일인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경전에서 ‘고(苦, 괴로움)를 알기 위해 출가하여 범행(梵行)을 닦는다’(잡아함경 권6, 知苦經 199쪽,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고 강조하였을 것이다. 이른바 비상시국에 특별재난이 닥치기 전에도 이미 우리는 불타는 집[火宅]처럼 괴로운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전적으로 수행하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다. 무엇이 진정 괴로움인가.

“색은 괴로움이다. 만일 색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면, 응당 색에 병이 있거나 괴로움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 것이요,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색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색에서 병이 생기고, 또한 색에 대해서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수·상·행·식에 있어서도 그와 같으니라… 존재하는 모든 색(色)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일체는 모두 나가 아니요,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사실 그대로 관찰해야 하느니라. 수(受)·상(想)·행(行)·식(識)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거룩한 제자들은 색에서 해탈하고, 수·상·행·식에서 해탈하나니, 그러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의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에서 해탈하였다’고 나는 말하느니라.”
(잡아함경 권3, 無常經 114쪽, 苦經 115-117쪽,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우리의 일상사로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를 겪으면서도 그 괴로움의 진실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불교에서 탐구할 문제의 출발점이다. 왕자인 싯달타가 굳이 출가수행을 하고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하고서도 잠시 설법하시기를 망설였다는 것도, 중생이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법[진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결국 부처님은 가지가지 설법으로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도하셨다.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전법과 구제를 결심하신 배경이 여러 경전들에서 보이지만 특히 대승경전에서는 아예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자체가 중생을 구제하려는 것이라는 뜻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강조하고 있다.

“사리불아…. 부처님들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청정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려는[示]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려는[悟]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의 도에 들게 하려는[入]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부처님들께서 일대사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이라 하느니라.”
(묘법연화경 2. 방편품, 41쪽,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중생구제’라는 일대사인연으로 오신[오신다는] 부처님이시니, 우리가 그 부처님을 진심으로 믿는 불자라고 하면, 부처님이 선도하신 그 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만 살펴보면 될 일이다. 초기경전에서는 각자가 삼법인(三法印)·사제(四諦)·팔정도(八正道)·연기법(緣起法) 등을 통찰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자력구제(自力救濟)의 신행이 가르침의 핵심이다. 지금 여기의 논리로 다시 말하자면, 당면한 재난으로 코로나·병사(病死)·궁핍·정쟁(政諍)·폭력전쟁 등등 세간사의 직간접적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기본과목은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수행이고, 수행을 통해서 자기를 스스로 구제한다. 수시로 여러 가지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마치 처음 당한 일처럼 온통 휘둘리지 않고, 본래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데까지 통찰수행을 함으로써 오히려 괴로움의 근원에 대처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에서는 불보살의 원력과 가피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타력 신행이 좀 더 부각된 것이지만, 기실(其實)은 누구나 수행으로 불보살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과 함께 누구나 보살행으로 중생구제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새삼 중요하다. 세상만사에서 자타의 독자성이 없고[無我]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관됨[相依相關]을 발견한 초기불교가 자리즉이타(自利卽利他)의 대승적 이치로 통하는 것은 당연하다. 요컨대 대승(大乘)은 나와 너의 차별 없는 평등구제·동시(同時)구제를 강조하는 의미이고, 바꿔 말하자면 나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도 너의 고통을 줄이도록 내가 나서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지금 우리가 스스로 대승불자라고 생각한다면 더욱이 이타적 의미에서 타력구제(他力救濟)를 도외시하지 말아야 한다. 아래 구절은 보살이 예컨대 육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어떻게 구제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선혜(善慧)라는 선인이 있었는데… 중생들이 애욕에 빠지고 괴로움의 바다에 잠기어 헤매고 있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자비심을 일으키어 구제하려 하였다… 모든 중생들이 나고 죽는 데 빠져 스스로 나오지를 못하나니, 모두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탓이요, 빛깔·소리·냄새·맛·감촉·법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평등한 보시(布施)로써 가난한 이를 거두어 주고, 지계(持戒)로써 무너짐을 거두어 주고, 인욕(忍辱)으로써 성냄을 거두어 주고, 정진(精進)으로써 게으름을 거두어 주고, 선정(禪定)으로써 어지러운 뜻을 거두어 주며, 지혜(智慧)로써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일체를 위해서 귀의케 하였다.”
(과거현재인과경 제1권 4쪽,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이혜숙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연전에 대개는 코로나의 괴로움을 지적할 때 어느 불자가 ‘코로나 보살’이라는 용어를 썼던데, 코로나가 마치 보살처럼 우리로 하여금 삶의 실상을 깨우치게 한다는 점에서 공감이 된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전해주신 말씀처럼 우리의 삶이란 그물망처럼 서로가 서로를 조건으로만 성립하므로, 코로나가 오든지 가든지, 오직 서로가 서로를 구제할 수 있음도 알아차려야 할 기회인 것이다. 마침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거듭 공부되기를 발원해본다.

이혜숙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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