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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도반 아내와의 가슴 아픈 사별, 사홍서원 실천으로 승화

기자명 법보

중앙신도회장상 - 박종근

독실한 불자인 음악교사 아내를 만나 26년의 포교여정 함께 해
사찰과 학교에 불교모임 창립…아내는 찬불가 합창단 설립 주도
고생만하다 떠난 아내의 유지…경로당 및 어린이집 봉사로 회향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나는 올해 73살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남매는 2남5녀였다. 셋째 형님이 홍역으로 돌아가시면서 독자가 됐다. 첫 번째 누님은 출가 후 출산 후유증으로, 바로 위 누님은 어린 나이에 물 놀이터에서 불행을 당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무척 슬퍼했다. 어머니는 경북 상주에 있는 팔음사에서 먼저 간 자식들의 명복을 빌고 아들을 얻기 위해 많은 기도를 하셨다. 나는 그 간절한 기도 끝에 뒤늦게 얻은 외아들이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를 따라 팔음사에 다녔다. 절에 갈 때마다 주지스님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되는 훌륭한 불제자가 될 것”이라며 격려해 주셨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 상주중을 거쳐 김천의 명문 김천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1965년 부처님오신날 직지사에 가게 됐다. 어릴 적 다녔던 팔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직지사 사명의 시원인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뜻을 알게 됐고, 직지사로 출가했던 사명대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김천으로 가면서 잃어버렸던 불심이 되살아났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나는 성적우수생 60명과 함께 비구니 사찰인 청암사에서 합숙하며 대입을 준비했다. 비구니스님들의 청아한 염불 소리에 심취하게 됐다. 새벽마다 아침예불에 자청해서 동참했고, 틈틈이 법요집을 얻어와 기초교리, 부처님 생애, 스님들의 삶을 공부했다. 지나치게 불교공부에 심취해 졸기도 했고 수업 시간에 불교 책을 보다 들켜서 꾸중을 듣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집안이 가난해 대학 갈 형편이 안 되니, 스님이 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외아들이고 장손으로 대를 이어야 한다”며 완강히 반대했다. 다행히 선생님의 조언으로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 경북대 역사교육과로 진학해, 가정교사를 해가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발령을 받아 초임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그러다 모교의 요청으로 김천고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세계사와 국사를 가르치면서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의 고대 불교사 관련 책을 열심히 읽었다. 1976년 음악교사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독실한 불자였다. 결혼 후 함께 절에 다니며 보살계를 수계했다. 나는 ‘많은 사람을 교육자로 깨우쳐주라’라는 뜻의 보각(普覺)을, 아내는 ‘보배로운 연꽃처럼 살라’는 의미의 보련화(寶蓮華)를 법명으로 받았다. 주말엔 절에서 학생회를 지도했다. 나는 기초교리와 부처님 일대기, 한국불교사 등을 지도했고, 아내는 피아노로 찬불가를 가르쳤다.

1977년 김천불교청년회장을 맡아 젊은 직장인 포교에 나섰다. 모두 유마거사가 되자는 의미로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유마림’이라는 회지를 창간했고 개운사 학생회 창립 50주년 행사도 여법하게 치러냈다. 김천 최초 개운사 녹야유치원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아내도 개운사에서 주지 정광 스님의 원력으로 김천 최초 ‘김천불교 여성합창단’을 창단하여 지휘자로 찬불가 대중 보급에 나섰다.

1979년부터 경북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김천전문대학에서 3년간 교양국사 강의를 하면서 불교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을 모아 김천불교대학생회(정명회)를 개운사에서 창립해 아내와 함께 지도했다. 

1984년 ‘조계종 제1기 전법사 선발고시’에 합격했다. 1차 불교교리, 2차 염불실기, 3차 면접을 거쳐 전국에서 30여명이 선발되었다. 총무원장 석주 스님으로부터 임명장과 전법사 복장을 받았고, 1985년 직지사 주지 혜창 스님으로부터 제8교구 상임포교사로 임명받아 직지사 학생회, 신도회를 지도했다. 서의현 총무원장으로부터 1987년 ‘중앙포교사’로 재임명 받아 직지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70년대 직지사 신도로만 구성된 신도회를 넓혀 제8교구의 김천시, 구미시, 상주시, 문경시, 예천군 내의 50여 조계종 사찰 신도회 결성을 추진했다. 각 사찰 신도회 임원 200여명을 모아 1989년 3월 ‘제8교구 신도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사무국장 12년, 부회장 4년을 하면서 포교사로서 회칙과 조직정비, 직지사 상임이사회운영, ‘직지회보’ 발행, 전국명찰순례행적부 발간, 신행수첩 발간 등을 주도했다. 당시로서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대학신문 기자 활동 경력과 고등학교 신문반 지도교사 경험을 살려 문서포교에 주력할 수 있었다. ‘직지사의 노래’를 직접 작사했고, 아내는 지휘자로 직지사 관음회를 비롯한 많은 신행단체와 신도회 임원들에게 찬불가를 지도했다. 지역 유지들을 직지사 상임이사회로 추천해 직지사 불사에도 힘을 보탰다. 노력의 결과로 직지사 포교대상을 받았다.

자식 3남매는 초등학교 진학 후 직지사 어린이 자비학교에 입학시켰다. 여법한 불자로 살 수 있도록 인연의 고리를 맺어줬다.

2010년, 37년간의 교직 생활을 끝내고 퇴직기념으로 나의 활동과 작품들을 모아 문집 ‘참되고 알차게’를 발간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불자로 포교사로 살며 고락(苦樂)한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준비했다. 아내는 내조, 자녀 양육, 시부모 봉양을 위해 음악교사를 일찍 사직했다. 그리고 음악학원을 운영하며 개운사, 직지사, 금강사 합창단 지휘자로 찬불가 보급에 헌신했다. 학생회, 청년회, 직지사 제8교구 신도회 활동을 나와 같이 지도하면서 26년 포교여정을 함께했다. 

그러나 아내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암이 찾아 온 것이다. 1년간 힘든 투병생활 끝에 2011년 10월 이생과 인연을 접었다. 애통하면서도 한없이 미안했다. 또한 모든 상황이 너무나 황망했다. 부부이면서 도반으로 같은 길을 함께 걸었는데 이리 빨리 인연을 접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부처님도 원망스러워 절에 가기 싫었고, 포교활동도 의욕을 잃어 한동안 모든 것을 접었다. 

몇 년을 이렇게 보내다 사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오랜 옛집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불현 듯 아내가 못다 한 유지가 떠올랐다. ‘자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남은 여생은 삼보에 귀의하고 사홍서원을 실천하는 포교사로 매진하자’는 다짐이었다. 2017년 아파트 경로당창립 총회에서 나는 초대회장에 선출됐다. ‘내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신시설을 갖춘 경로당을 마련해 성대한 개소식을 했다. 

교육자의 삶과 포교사로서의 경험을 살려 거실에 게시판을 만들어 경로당 찬가, 당훈, 칠순·팔순 잔치, 문화탐방 사진 등을 게시했다. 이웃종교 신자들을 포함해 경로당 회원들과 함께 김천 불교유적지, 직지사 사명대사공원이나 청암사 인현왕후길을 탐방하며 화합을 도모했다. 

2018년부터는 예절사, 평생교육사, 노인상담사 자격을 바탕으로 ‘노인상담 재능나눔 활동’에 참여했다. 문제 학생 지도 경험을 자양분 삼아 경로당 노인들을 대상으로 참회, 참선, 자자, 화쟁 등 불교사상을 응용하여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활동 결과 노인들이 겪고 있던 문제점들이 개선되고, 가족 간 유대관계도 좋아졌다. 경로당 단체생활과 분위기가 매우 밝아졌다. 회원농장에 일손이 필요할 때는 서로 보시, 애어, 이행, 동사의 4섭법으로 도와주고, 노인 일자리사업에 적극 참여를 독려했다. 결국 부양받는 노인에서, 사회를 책임지는 노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개인별 소득도 높아져서 큰 보람을 느꼈다. 

또한 인근 어린이집 원아들, 초중고 학생들, 재소자, 예식장 신랑 신부 하객들, 노인대학생들에게는 원효 스님의 일심, 무애, 불국정토 사상과 원광법사의 세속5계를 바탕으로 화랑정신을 재미있게 들려줬다. 나아가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 정혜쌍수, 선교일치, 사명대사, 만해 스님의 호국 자주 독립사상을 중심으로 위인전 읽어주기, 동화구연 등을 수준에 맞게 설명하거나 읽어주면서 충·효·예라는 인성교육의 본래 목적을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발고여락, 자타불이, 원융회통, 수처작주 입처개진 등 어려운 불교 사상들을 쉽게 적재적소에 응용하여 강의했다.

아내의 왕생극락을 바라는 마음에서 2020년 조계종신행수기공모전 발원문 부문에 응모해 특별상을 받았다. 오랜만에 찾은 조계사에서 시상식은 포교사로서 새로운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 

최근 2년간 코로나로 사찰탐방과 대중 포교 활동이 어려워 집에서 불교방송이나 휴대전화 유튜브로 ‘무여 스님의 아름다운 사찰여행’을 즐겨보았다. 초파일을 전후하여 집과 가까운 상월사와 송학사를 찾아 신도들에게 특강을 했다. 

특히 사찰음식 전문가인 송학사 주지스님께 부탁드려 2021년 5월 나의 72세 생일법회를 법당에서 성스럽게 마치고, 우리 가족 3남매 자손들과 정갈한 사찰음식으로 점심 공양을 했다.

그동안의 나의 신행에 대한 보답인지 부처님 가피로 2021년 12월에 장남이 삼성전자 상무로, 며느리는 부장으로 승진했다. 두 딸도 부장교사로 근무하고, 손주들도 귀엽게 자라고 있어서 자손들에게 항상 부처님께 감사드리도록 당부했다.

이제 걸어 온 지난 삶들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발원을 해 본다.

“자비로우신 부처님! 지금 온 세계에 많은 고통을 주면서 생명을 빼앗아가는 코로나19와 대통령, 지방선거로 고통과 분열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불심으로 만나서 일심으로 정진하여 합심으로 더불어 살아간다면, 그곳에 바로 불국정토가 건설될 수 있음을 밝혀주시옵소서. 청정한 부처님 도량에서 참회, 참선, 기도, 염불, 보시를 통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지혜와 자비로운 보살행을 널리 펴도록 원력을 주시옵소서. 찬란한 불교문화와 호국불교의 전통을 이어 화해와 치유를 통한 화쟁 사상으로 다시 희망이 꽃피는 일상으로 하루속히 돌아가고, 국민화합과 남북통일의 길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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