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6.김법린 (1899∼1964)

기자명 안문옥

政敎 섭렵한 불교학계 거성

64년 3월 14일 사망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범어사에 모인 1만여 불자들은 참고 참았던 울분을 이 한마디로 토해냈다. 그리고 이들의 행렬 선두에 그가 있었다. 억눌려 있던 그의 가슴은 결의에 찬 용기로 뜨겁게 차올랐다.

일평생을 불교와 나라, 후학양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김법린 선생은 승려일 때는 선지식, 이후 학자로는 동서양의 깊은 천리를 꿰뚫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했다. 양휘허(揚揮虛)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한 이래 1917년 범어사 강원에서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하고, 20세가 되던 기미년에 불교계 만세운동을 지도하다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경으로 도피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간 김법린은 남경대학에서 영어·중국어를 습득하고, 다시 프랑스로 유학해 파리대학원에서 철학과정을 수학하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세계에 일본 만행 알려

그 시절 그는 벨기에에서 열린 ‘제 1회 세계 반제국주의 동맹회의’에 유일하게 조선대표로 참가해 유창한 불어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등 항일운동의 기치를 높였다.

조선불교의 혁신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卍당을 조직하고 만해 한용운 스님과 『불교』를 창간, 저술과 강연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은 그는 만당(卍黨)사건으로 3개월, 조선학회사건으로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문교장관-동대총장 역임

1945년 8월 15일. 가슴 벅찬 해방을 맞은 그는 각황사(지금의 조계사)에서 조선 승려대회를 열고 불교재건의 기치를 들었다. 조선불교 중앙 총무원장, 제 3대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각 방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뤄낸 그는 1963년, 모교 동국대학교로 돌아가 총장으로 후학양성에 온힘을 쏟았다.

쉴 틈 없이 과중한 업무를 보던 그는 1964년 3월 14일 총장 취임 후 8개월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해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사진설명>동대 총장시절 종단-학교관계자들과 자리를 함께한 김법린 선생. 사진 가운데가 김법린.

김법린의 제자 강혜원 스님은 자신의 조사에서 범산 김법린을 이렇게 회고한다. “세상에서는 그의 일생이 성실하였기에 그를 신뢰했고, 유능했기에 그를 기대했으며, 몸 바쳐 겨레를 사랑하였기에 그를 존경한다.”


안문옥 기자 moonok@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