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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조실 보선 스님

오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결과가 내일의 나를 창조

불법을 깨치려 공부하는 게 불자…지금 바로 시작해야
자기 근기 맞게 참선‧염불‧간경‧진언‧육바라밀행 실천
불생불멸을 증득할 때까지 ‘이뭐꼬’ 참구하고 수행하길

대흥사 조실 보선 스님은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처님을 의지하고 가르침을 따라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대흥사 조실 보선 스님은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처님을 의지하고 가르침을 따라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나와 같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제자라도 나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불자가 바로 부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이 화엄법회 역시 사부대중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법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디서부터 하느냐? 공부는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무엇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내가 날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것은 무엇에 의해서 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월은 쉬는 법이 없습니다.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흐르는 게 세월입니다. 어느새 보면 내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 그 말씀입니다. 이러다가 부처님이 그렇게 고구정녕 우리 모두를 위해서 가르치신 열반의 세계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한시도 쉬지 않고 공부해야만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어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결과가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그것이 바로 내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결과가 바로 내일을, 그리고 내일의 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쌓여서 좋은 업을 지으면 부처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고 성내고 욕심내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업을 지으면 그에 걸 맞는 내일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고구정녕 말씀을 하셨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욕심내고 성질내고 어리석음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내가 아닌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어떻게 공부하라고 가르치셨는가를 보아서 자기 근기에 맞게 염불을 하던, 참선‧간경‧진언‧육바라밀 등을 행하든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옛 조사들이 수행하고 깨달으신 다음에 어떻게 하셨는가를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조계종은 참선을 공부의 근간으로 삼아 수행해가는 종단입니다. 물론 경도 공부하고 진언도 공부하고 염불도 공부하고 모든 것을 다 통합하고 있지만, 주된 공부는 참선입니다. 선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둘로 나누면 교법과 선법입니다. 경전을 깊이 탐구해서 그것을 깊이 알아 깨달아 들어가는 교법이 있고,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마음을 바로해서 ‘직지인심 견성성불’하는 참선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법회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입니다. 이 뜻을 바로 아십니까? 내 몸과 마음이 공하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여기 분명히 땀을 흘리면서 숨 쉬고 있는데 이것이 공하다고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옛날에는 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저것을 깊이 탐구한 결과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지구가 돈다고 생각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숨 쉬고 땀 흘리고 앉아 있는 이 몸과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입으로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하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은 그것을 알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때문에 ‘사교입선’, 교를 버리고 선에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경을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경을 알고 가라는 뜻입니다. 모르면 그것을 알 때까지 참구하라는 말이고, 참구하는 방법으로 선에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깊이 참구해서 그 관문을 뚫고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고? 거기에 공부의 주목표가 정해진 겁니다. 이것이 뭐냐? 도대체. 지금 숨 쉬고 말하고 땀 흘리고 앉아 있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 뭐꼬?’ 이것을 깊이깊이 참구하는 것을 참선이라 하는 것이고 ‘이 뭐꼬’한 이 문제를 화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계종은 간화선, 화두를 탐구하는 선법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종단입니다. 

‘이 뭐꼬?’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이것이 타파되어야 밥도 먹을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으니 참구하고 또 참구해야 이것을 타파하고,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부해 가는 것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또 모르면 다시 돌아와서 오온이 공한가?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제라 하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바로 들어가는 것을 화두라 합니다. 

그래서 화두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화두를 타파하겠다는 용맹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 의심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 힘을 키워야 그것을 타파하는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공부가 잘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면 염불하면 됩니다. 부처님께 의지해야 됩니다. 

옛날에 중국의 덕산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경전에 해박했던 스님은 용담숭신 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선승으로 거듭났습니다. 용담숭신 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81세가 됐을 무렵입니다. 덕산 스님이 어느 날 밥이 늦으니까 손수 바리때를 들고 법당을 내려갔는데, 이를 보고 설봉 스님이 “저 노장이 종도 치지 않았고 북도 울리지 않았거늘 바리때를 들고 어디로 가는가?”하니까, 덕산 스님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설봉 스님이 이 일을 암두 스님에게 말하자 암두 스님이 말하기를 “천하의 덕산이 말후구(末後句)를 모르는구나”라고 했습니다. 

덕산 스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시자로 하여금 암두 스님을 불러오게 하고는 말하기를 “너는 스승인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하였습니다. 이에 암두 스님이 덕산 스님의 귀에 몰래 뭔가를 말하자 덕산 스님은 바로 그만두었는데, 다음날 덕산 스님이 법좌에 오르자 평소와 모습이 달랐습니다. 암두 스님이 법당 앞에 이르러 그 모습을 보고는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옳거니, 이 늙은이가 드디어 말후구를 알았구나. 후에 어떤 사람도 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말후구’. 그러니까 여기서 마지막 이야기를 몰랐다, 즉 마지막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가, 법당에 선 덕산 스님의 모습을 보고는 ‘이제야 우리스님이 최후의 한 마디를 알았구나’ 하면서 기뻐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문에서는 과연 암두 스님이 덕산 스님 귀에 대고 뭐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뭐라고 했기에 덕산 스님이 그렇게 성질을 냈다가 확 풀어져서 달라졌을까,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갖는데 그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이 제일 걱정되십니까? 우리 중생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생로병사입니다. 부처님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셨고,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생로병사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혹시 스님들에게 한번이라도 물어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인가 참구를 해야 합니다. 알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경전에 보면 ‘너희들이 이 세상에 와서 흘린 눈물이 저 갠지스강의 물보다 더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이 세상을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것입니다. 겉모양만 생로병사일 뿐, 그 본체는 불생불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경에 ‘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량없는 세월을 겁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겉모양은 생로병사에 있지만 실체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중생이 흘린 눈물을 갠지스강의 물과 비유하고 겁을 통해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지금 여기서 불생불멸이 증득될 때까지 ‘반야심경’을 외우고 또 외워야 하고, 그 중에서 통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참구하고 참구하는 수행을 이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많은 걱정을 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로병사는 여러분들이 푹신한 침대에 누워 악몽을 꾸는 것과 똑같습니다. 본체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의 나는 물에 빠져 물에서 나오려고 허우적거리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꿈을 깨고 나면 물속에 빠져 있는 나는 꿈속의 그림자였고, 나는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있는 본체로 있게 됩니다. 사실이 이런데 어디에 생로병사가 있으며, 어디에 고해나 고통이 있겠습니까. 고통이 없는 곳인데 내가 꿈꾸듯이 고통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생로병사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처님 가르침을 깊이 새겨서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처님을 의지하고 믿고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또 화엄사를 의지하고, 화엄사 주지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해 가면 큰 고통에서 다 벗어나 정토, 열반적정의 세계에서 항상 노닐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신용훈 기자 boori13@beopbo.com

이 법문은 7월2일 화엄사에서 열린 7월 화엄법회 초청법사 대흥사 조실 보선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1641호 / 2022년 7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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