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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승가대학장 보일 스님

원효 스님 무여열반은 육체·정신의 소멸 아닌 법신과 합일

메타버스는 안‧이‧비‧설‧신‧의가 새로운 가상성으로 드러난 것
포스트 휴니니즘을 주장하는 이들의 인간 탈신체와 불멸 추구
원효 스님 열반사덕 관점으로 보면 상견과 단견의 치우침일 뿐

보일 스님은 오늘날 거대한 기술변화에 대한 불교의 답을 화두 삼아 연구한 결과를 원효 스님의 가르침을 준거 삼아 제시했다.

다가오는 미래, 또는 현재의 인공지능에 대해서 어떠한 불교적 답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 개인적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학계에서 원효 스님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논할 날이 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펼쳐지는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뭔가 펼쳐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순간은 제게 있어서 비현실적인 메타버스 같은 상황입니다. 

저는 오늘 메타버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좀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는 엔디비아는 그래픽 카드를 만들어내는 컴퓨터 부품 회사로 전 세계 시가총액 상위 10위에 드는 아주 거대 기업인데, 이 기업의 성공은 최근 인공지능 빅데이터, 딥 러닝을 비롯한 메타버스 기술이 보편화되고 상용화되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12억 명 이상이 가입돼 있다고 하는 페이스북이라는 회사가 자신들의 기업 명칭을 바꿔가면서까지 가고자 하는 곳도 메타버스라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인공지능이라기보다도 이러한 거대한 기술 변화의 낙처가 어딘가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그 낙처에서 만난 지점이 바로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논의에 대해서 원효 스님이라면 이러한 변화에 대해 뭐라고 질문을 하실 것이며, 또 뭐라고 대답하셨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된 연구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눈 뜨면 맞이하게 되는 인공지능, 딥 러닝, 블록체인, 자율주행 자동차, 유전자 과학 기술 등으로 정신이 없는데, 이 모든 기술들을 다 알아야 하는가, 혹은 모르면 정말로 미래 사회는 물론 현대사회에서 도태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고 귀의한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도 원효 스님이 제시한 그 옛 규칙들을 준거 삼아 이러한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관점을 한번 펼쳐볼까 합니다. 

메타버스를 상상하면 마치 게임 속 세상 같은데, 진짜 메타버스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달리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안‧이‧비‧설‧신‧의, 눈‧귀‧코‧혀‧몸이 완전히 새로운 가상성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마치 내가 시내(물)에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 속에 들어갔을 때의 풍경들을 가상으로 눈‧귀‧코‧혀‧몸으로 구현하는 것입니다. 

메타버스의 속성 중 두 번째가 가상과 현실의 융합이라고 표현하는 데 단순히 대상화해 어떤 화면을 보고 게임을 하는 정도가 아닌 우리 일상이 가상과 현실로 중첩되는 것입니다. 마치 법계가 중첩돼 있다고 표현되듯이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완전히 그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입니다. 우리의 현실 경험 세계가 메타버스 또는 가상성의 세계에 항상 로그인된, 혹은 중첩된 그런 시대가 바로 메타버스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타버스의 속성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게 가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는 것 중 메타버스 공간이 가상성의 공간이고 가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종래에 인식하는 내용들로 따지면 사실상 헛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짜로 만들어진 상에다가 우리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제는 아예 가치를 매기고 돈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실제와 가상이라는 것을 메타버스 공간에서 우리가 식별해 내고 구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흐름의 내용을 보면 현실세계의 물리적 경험으로 쌓인 모든 데이터를 온라인 세상으로 바꿔 가는 그 한가운데에 지금 우리들이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라고 표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마 오늘도 눈 뜨고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알람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여러분이 남긴 모든 생각, 경험, 느낌,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한 기록들이 현실적 경험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스마트폰을 통해서 디지털 세계, 온라인 세계, 인터넷 세계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데이터가 현실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세계로 다 넘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의 계획, 자신도 모르는 내년에 어디로 휴가를 갈지 정도의 예측 가능성도 전부 인공지능에 쌓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글 신은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우리 신체와 유전자 정보까지 모두 디지털 데이터화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서 일부에서는 향후 사람들이 육체를 벗어던지고 아예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 등 기억하는 정보체계를 전부 디지털 데이터화시키는 그런 시도를 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포스트휴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포스트 휴머니즘 또는 트랜스 휴머니즘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될 것입니다. 트랜스 휴머니즘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 고유의 상태를 어떻게든 향상하고 증강하려는 형태의 철학, 또는 운동 문화적인 일련의 모든 움직임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전에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어서 발병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거나, 특정 운동능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스트 휴머니즘은 지금 굉장히 광범위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기술 가속의 법칙이 작동돼 모든 인간의 생체 정보와 생각‧느낌마저도 전부 디지털화 정보화 될 수 있다면 앞서도 말했듯 그것은 결국 탈신체로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닌가라면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본주의라고까지 말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형태의 변화들을 갖고 있는 낙처가 결국은 포스트 휴머니즘의 도래를 기대하는 데 있어서 불멸과 영생을 추구하겠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불교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 개입을 해 나름의 의견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효 스님이라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원효 스님이 열반사덕(涅槃四德, 상덕(常德)‧낙덕(樂德)‧아덕(我德)‧정덕(淨德))의 관점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원효 스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포스트 휴머니즘의 탈신체를 통한 불멸 추구는 상견과 단견에 치우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생사와 열반에 대해 필멸과 불멸을 이원적 대립적으로 보듯이 하지 않습니다. 즉 생사 속에서 열반을 보고 열반 속에서 생사를 본다는 것인데, 생사와 열반이 시공간적으로 구분되거나 차별적 개념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생사를 벗어나고자 탈신체를 시도하는 것은 단견이고, 그 탈신체를 통한 불멸 추구도 상견이 되기 때문이라는 입장입니다. 

다음은 상락에서 락인데, 원효 스님이 말하는 열반의 큰 즐거움은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세상의 무한 구현이나 신체 능력의 무한 증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세상과 변형된 신체를 이용해서 욕망을 증장하려는 번뇌의 제거와 절제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왜 지금 이 열반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실제로 지금 포스트 휴머니즘과 트랜스 휴머니즘 진영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하면서 인용하는 가장 큰 철학이 불교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교야말로 평범한 인간이 수행해서 붓다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 전환해 가는데 그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트랜스 휴머니즘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도 문제가 많지만 불교를 잘못 이해한 그 생각이 더 가관인 점은 포스트 휴머니즘이 인간의 육신을 벗어 던지면 그거야말로 고통의 근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열반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아’는 기술적 포스트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자아의 무한 확장, 혹은 양산이 아니라 화신과 응신을 통해 자유자재한 몸으로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살의 실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정’입니다. 원효 스님이 이해하는 무여 열반은 육체와 정신의 완전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신과의 합일을 의미합니다. 즉 원효 스님에게 있어서 세간 혹은 현실적 경험 세계, 그리고 신체는 혐오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과 보살행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훌륭한 방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원효 스님이 수행자들이 모여 열반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했듯이, 기술적 포스트 휴머니즘이 탈신체를 통한 불멸 추구도 초월에 대한 집착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결국 원효 스님은 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화를 통해 현실적 경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적극적 실천 행위, 즉 수행의 장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불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합니다. 인간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향상 가능성은 기술적 포스트 휴머니즘이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 향상’을 추구하고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한다는 구상 사이에는 균열(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적 포스트 휴머니즘이 견지하고 있는 궁극적인 ‘불멸’이라는 상태도, 육체로부터 해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아에 대한 또 다른 집착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디지털 세상에 기반한 메타버스 마인드 업로딩과 같이 탈신체를 추구하는 기술일지라도, 그것이 현실 경험 세계와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면서 현실 세계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서 그 기술 구현에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첨단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 또한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신체 그리고 현실 경험 세계는 기술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야만 하는 대상일까, 이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 혹은 인공지능(AI)시대가 되었던 디지털 대전환 시대가 되었든 간 현시대가 불교에 던지는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윤지홍 대구 지사장

이 강의는 8월 21일 제석사에서 개최한 ‘원효학술대회(부제 원효 一心사상과 AI융합)’에서 해인사 승가대학장 보일 스님이 ‘원효의 열반사덕과 메타버스 속의 자아’를 주제로 발표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1646호 / 2022년 8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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