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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개운사 주지 보림 스님

“전법, 방석·목탁 그리고 냄비 하나 있으면 시작하는 겁니다!”

‘허리 디스크’ 의가 제대
‘도통’하겠다 6년 방황

성중 스님과 은사 인연 
굴 법당서 지장기도 3년

‘삼천배 100일 기도’ 
허리 자연스레 ‘치유’

빚 얻어 보문선원 개원
6년만에 신도 1천 가구

노인잔치‧이주노동자 지원
안산 지역에 불교 ‘새바람’

“행복 만끽 자원봉사는 복전
불교 역할‧가치 강렬히 전해

“목탁 소리 안 끊어지면
불자 발길 계속 이어져!”

서울 대표 도량 개운사
옛 명성 다시 찾을 터

개운사 주지 보림 스님은 “누구로부터 내가 무엇을 받으면 기분은 좋지만 빚을 지는 것”이라며 “반면 자원봉사는 내가 무엇을 주는 것이지만 만족과 보람을 느끼니 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속리산(俗離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상고암(上庫庵‧930m)에 30대 초반의 행자가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주석하고 있던 성중 스님과 은사 인연을 맺은 후 굴 법당에 들어가서는 매일매일 지장기도를 올렸다. “내 시봉 그만해도 좋으니 큰 절로 내려가라”는 은사 스님의 당부에도 암자를 떠나지 않다가 3년여의 정진 끝에서야 법주사로 가 행자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보림(寶林) 스님이다.

고향은 남해 용문사에서 가까운 남면 죽전(竹田)이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던 할아버지는 집안일 돕던 사람이 결혼하면 작은 땅이라도 떼어 주었을 정도로 덕이 높았다. 용문사는 물론이고 구례 화엄사에서도 스님들이 찾아와 시주를 청했을 정도로 불심도 깊었다. 하여 ‘사랑방’에서는 할아버지와 스님들이 나누는 법담이 그치질 않았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7세의 어린 손자를 보고 일렀다.

“너는 ‘중’ 팔자다.”

사랑방에 앉아 있던 스님에게 당부했다.

“이 아이, 절로 데리고 가세요!”

그때 손자는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했다.

“제가 가면 가는 거지, 왜 할아버지가 보내요?”

동해안경비사령부로 자대 배치되어 유류를 관리하는 행정병 업무를 맡았는데 수송차에 휘발유 가득 담긴 드럼통을 옮기던 중 디스크가 터졌다. 부산 통합 병원으로 후송되어서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으면서도 법당을 찾았다. 군종병은 아니었지만 ‘법선’이라는 법명과 함께 ‘포교 부장’ 직책을 얻었다. 법회 집전 중 ‘반야심경’ 독송하며 목탁을 칠 때면 마냥 좋았다. 그러나 허리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상병 의가 제대했다.(1984)

허리가 아파서였을까? 직장 생활 등의 사회 적응이 녹록하지 않았다. 우연히 접한 ‘미륵 사상’에 심취한 후 도통하고 싶어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녔지만 올곧은 가르침을 줄 ‘도인’은 만나지 못했다. 양산의 절에도 머물렀는데 불자 친척들의 눈에 금방 띄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보낸 방황의 세월만도 6년. 
 

속리산 상고암 전경. [상고암]

부산의 한 지인에게 출가하고 싶다 털어놓으니 전기도 없어 호롱불 켜고 살아야 하는 속리산 상고암으로 가보라 했다. 친척이나 친구 그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는 암자로 향했다. 자신이 처했던 상황들을 성찰한 후 자신의 업장이 두텁다고 직감한 보림 스님은 ‘지장기도’를 올렸다.

‘시작 없는 옛날부터 내가 지은 모든 악업 크고 작은 잘못들은 탐진치로 이뤄졌고 몸과 입과 뜻을 따라 무명으로 지었기에 제가 이제 진심으로 모두 참회 하옵니다.’(‘지장예문’ 중)

2000년 10월 도심의 상가 포교당 ‘보문선원’을 개원하며 안산에 전법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어린이 포교 없이 미래 불교 담보할 수 없다고 확신, ‘어린이 여름‧겨울 불교 학교’를 열었다. 3000여명의 사람을 초청해 펼친 ‘노인잔치’는 지역민들에게도 나눔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2004년경부터 이주노동자 지원에 나섰다. 이주노동자만도 8만인 안산. 사찰을 쉼터로 제공하고 체불임금 등에 따른 어려움을 해소하려 법률자문의 길을 터주었다. 고려대 안산병원과 협약을 체결해 매월 1회 의료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그들만의 자부심이 위축되지 않도록 체육대회도 열었다. 서울 연등행렬에 이주노동자들이 첫선을 보인 단체도 보림 스님이 보듬었던 불자들이었다. 조계종 사회부와 교계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등이 연계해 이주민 지원을 담당하는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보문선원 개원 6년 만에 신도는 1000여 가구를 확보했다. 기도와 참선 그리고 활발한 자원봉사 활동을 펼치며 안산 지역 대표 도량으로 우뚝 선 보문선원은 지금도 포교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조계종 포교원력상을 수상(2008)한 보림 스님은 현재 보문선원 회주이다. 연미사(2011∼2014)와 덕주사(2015∼2021)에 이어 2021년 서울 개운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개운사 주지실에서 만난 보림 스님이 직접 우린 차의 향이 가을바람보다 더 청량하게 전해져 왔다.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만큼 개운사와의 인연이 깊을 법하다.

“중앙승가대 기숙사에 머물며 개운사의 공양미로 밥을 지었습니다. 법당에 쌀을 올리신 시주님의 은혜를 늘 새기곤 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찰진 쌀이 아니어서 공양하고도 돌아서면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작은 원을 하나 세웠습니다. ‘내가 훗날 주지를 맡으면 중앙승가대에 기름진 쌀을 보시하겠다.’ 보문선원 주지를 맡은 후 지금까지 매년 108포대(20Kg‧10Kg)를 보시하고 있습니다.”

전기조차 없던 암자에서의 행자 생활 자체가 고난이었을 싶다. 

“나무 한 짐 지고 내려오다가 벼랑 쪽으로 미끄러져 굴러떨어지곤 했습니다. 목숨 붙어 있고 팔, 다리 멀쩡하니 툭툭 털고 웃으며 일어섰습니다. 불보살님의 가피이자 ‘더 정진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새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강행한 게 ‘삼천배 100일 기도’였습니다. ‘절도 못 하면 중노릇 어찌한다는 거냐?’ 정말 죽을힘을 다해 일배 일배를 올렸습니다. 놀랍게도 회향 즈음부터 자연스레 허리가 편안해졌습니다. 그 덕에 ‘조계종 삼보사찰 천리순례길’에 동참하여 회향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쌓은 신심과 세운 원력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았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미계를 받은 후도 아닌데 상고암에서 3년 행자 시절을 보냈다. “암자에만 머물러도 스님 되는 줄 알았다”고 했지만, 그 어떤 울림과 끌림이 있었을 것이다.

“암자가 품은 풍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있었나?’ 감탄했습니다. 운무 속 풍경은 신비롭고, 운무 걷힌 풍광은 장관이었습니다. 깊은 산만이 줄 수 있는 고즈넉함은 정진의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처음 오를 때부터 ‘도통해 보자’ 각오했으니 소식을 듣지 않고는 내려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3년 정진 후의 ‘경지’ 물음에 미소만 보이며 “그때 참 맑았다”고 전했다.

동국대 대학원과 중앙승가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인이었을 때 5000여만원을 들여 안산 보문선원을 개원했다. 스님이 모아놓은 1300만원 외는 모두 빚이었다.

“5층 건물은 관리가 안 될 정도로 보기 흉했습니다. 부동산 업자가 소개해 준 공간은 양식집을 하던 곳이어서 여기저기 기름때가 엄청나 하수구조차 쓰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냥 돌아서려다 창문가 테이블에 앉아 보았는데 성포공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공원을 잘 활용하면 협소한 포교당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냄비 하나, 방석 하나, 목탁 하나만 있으면 된다. 라면을 끓여 먹더라도 끝까지 가보자!’ 불보살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계약했습니다.”

불자들과 함께 지장기도를 올렸다. 옷과 방석이 완전히 젖도록 절을 올리는 보림 스님의 모습을 본 불자들은 “고고한 학이 움직이는 듯하다”고 했다. 흐트러짐 없는 절에서 정성을,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독경 소리에서 전법의 원력을 보았을 터다. 그리고 방석에 배인 땀과 눈물에서 간절함을 보았을 터다. 

“옛 어른들께서 ‘행자 때 지은 복으로 평생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상고암에서 체득한 ‘절과 독경 실력’이 보문선원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보문선원 자원봉사단은 5만여 개의 돋보기를 나누어 주었다. [보문선원]

자원봉사단을 조직해 사회의 그늘진 곳을 품었다. 눈이 어두워 고생하는 어른들에게 광명을 보시하자고 시작한 ‘돋보기 나눠주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전해준 것만도 5만개가 넘는다. 

성포공원에서 펼친 ‘3000명 초청 노인잔치’는 안산 지역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지역 국회의원들도 손수 장갑 끼고 도왔을 정도다. 눈여겨볼 건 이 행사에 투입된 봉사 인원은 약 300명인데 보문선원 소속의 봉사자는 50명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안산 지역의 일반 봉사단까지 거들었단 얘기다.

“안산시가 주관하는 ‘작은 사랑 큰 보람 나누기’ ‘불우이웃 돕기 바자회’ 등에는 보문선원 자원봉사단뿐만 아니라 거사림회, 합창단, 어린이 법회 자모회는 물론 일반 신도님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러다 보니 보문선원이 진행하는 ‘김장 1만 포기 담그기’에도 일반 봉사단체들이 흔쾌히 도왔습니다.”

보문선원의 자원봉사 영역은 무료급식, 팥죽 나누기, 영정사진 제작, 다문화 가족 한글 교실, 여주교도소 교화활동 등으로까지 확대됐다. 

“돋보기를 나눠 주려 전국을 다녔습니다. 작은 물건이지만 그것으로 좀 더 맑고 밝은 세상을 보며 즐거워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저 역시 행복했습니다. 누구로부터 내가 무엇을 받으면 기분은 좋지만 빚을 지는 겁니다. 반면 자원봉사는 내가 무엇을 주는 것이지만 만족과 보람을 느끼니 받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원봉사는 일반인 즉 공공선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층(리더층)에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정당성, 그리고 이 시대의 불교 가치를 강렬하게 심어줍니다. 포교와 직결됩니다.”
 

개운사 전경. [개운사]

개운사는 특별 법회 때면 불자들을 태운 버스 5~7대가 밀려들 만큼 서울 성북지역 포교의 견인차를 담당했던 도량이다. 하지만 중앙승가대가 김포로 이전한 즈음부터 주춤하기 시작했다. 보림 스님은 개운사 주지 부임 직후부터 도량 정비에 나섰다. 도량을 좀 더 정갈하게 다듬고, 의자 하나라도 좋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에 놓아두었다. 절을 찾은 사람들이 잠시라도 세파에 지친 마음을 내려놓아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현재는 고려대불자교우회와 베트남불자회 등의 법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보문선원, 덕주사, 개운사 신도님들과 함께 매월 넷째 주 일요일 ‘법화경 독송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버스 7~8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호응이 좋습니다. 천은사, 직지사, 쌍계사에 이어 최근에는 법흥사에서 ‘법화경 독송 기도 법회’를 가졌습니다. 개운사를 이끌어 줄 신도회 조직을 좀 더 굳건히 재건하고 봉사단도 조직하려 합니다. 어린이‧청소년 법회를 열기 위한 다양한 방법도 강구 중입니다. ‘목탁‧염불 소리 끊이지 않으면 불자님들 발길은 계속 이어진다’고 은사스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저부터 열심히 하면 됩니다.” 

개운사 신도들과 함께 1000일 기도를 시작한 보림 스님은 명부전에서 지장기도를 올리고 있다. 상고암과 보문선원에서 올렸던 그 ‘간절한 기도’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서울 대표 도량으로써의 명성을 찾겠다는 숭고한 보림 스님의 원력과 개운사 불자들의 신심이 하나가 되면 개운사는 다시 명찰로 거듭날 게 분명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보림 스님은
성중 스님을 은사로 출가. 불국사승가대학 사집수료. 동국대 대학원(석사수료). 중앙승가대 대학원(석사학위‧박사 수료). 보문선원‧연미사‧덕주사 주지 역임. 조계종 제17대 중앙종회의원. 현재 개운사 주지이자 보문선원 회주이다.

[1651호 / 2022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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