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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군사쿠데타 승인 앞장…박정희·전두환도 가톨릭 적극 비호

  • 기고
  • 입력 2022.10.07 19:17
  • 호수 1652
  • 댓글 6

[특별기고] 한국 가톨릭 역사의 민낯 - 하

한국인 최초주교 노기남 등 가톨릭지도자 친일 행적 논란 전무
서울교구가 운영한 경향신문사에서 장·차관 주요 인사 이뤄져
박정희 쿠데타에 “반공 위해 민주주의 희생시켜도 좋다” 강변

2006년 5월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조사 결과 ‘1995~2005년 천주교 신자는 295만명에서 516만6000명으로 크게 증가한 데 반해 개신교 신자는 876만명에서 861만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몇 달 뒤(2006년 11월30일) 개신교계 연구 모임 ‘목회사회학연구소’와 ‘일상과초월’ 공동 주최로 천주교 신자의 급증 원인을 분석하는 포럼이 서울 종로5가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열렸다. 개신교 목회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발표자와 논평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천주교의 교세 급등’ 배경과 원인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하였다. 

발표를 맡은 어느 개신교 신학자가 말문을 열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나 대중들에게 인기 높은 TV 드라마 등에서 천주교 신부나 수녀는 깨끗하고 점잖은 이미지로 나오는데 반해, 개신교 목사들은 겉모습과 언행이 지저분하고 못된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게 현실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신학자가 ‘농담’처럼 한 자조(自嘲) 섞인 이야기를 했지만, 거의 모두 개신교인이었던 방청석에서는 항의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10년이 지난 2015년 조사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다시 22.4% 급감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천주교 내부에서는 그 배경과 이유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설사 천주교인이 아닌 일반인 사이에서도 다른 종교보다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에 대한 신뢰가 높았던 것이 분명한데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유도 있겠지만 ‘내부의 비리와 갈등 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홍보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천주교의 뛰어난 ‘이미지 관리’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이상 이와 같은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어서 다시 신자 급감을 가져온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앞 연재에서는 일제강점기 말까지 한국 천주교와 바티칸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았지만, 그 일들 말고도 많은 것들이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어서 국민 대부분이 아직도 ‘깨끗하고 점잖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한국 천주교의 민낯’을 살펴보는 이번 연재의 마지막 글을 통해 민족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 그 이미지 감옥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을까.

친일 전력 덮어주고 반공을 명분으로 사상전을 주창한 천주교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계산동 성당.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계산동 성당.

일제 말 프랑스 출신 교구장들이 강제 사임된 뒤 부임한 대구교구의 하야사카(早坂久兵衛) 주교는 1946년 1월 사망 전까지 교구장직을 지켰다. “주교께서는…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되고(난 뒤에도)…끝까지 당신 성직에 머물러 계시다가 귀천(歸天)하셨다.” (‘경향잡지’) 
교왕청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종교들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친일파 처단 움직임이 거세게 벌어져 기존의 종권(宗權) 구도가 위협받거나 뒤집어졌고 교단이 분열되기도 하였는데, 노기남 등 명백한 친일 전력을 가진 천주교 지도자들을 둘러싼 시비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 안팎에서 주역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1948년 입법의원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 제정을 시도할 때 “인재 매장”  “민족단결 훼손”  “정략적 이용” 등을 이유로 공격하고 친일파를 비호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1947년 9월 이후 한국 천주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촉구하였으며, 1948년 초부터 ‘경향신문’ ‘가톨릭 청년’ 등 기관지를 통해 남북협상을 비난하고 5·10선거를 “4천년 조선 역사에 찬연히 빛날 획기적 성업(聖業)” 등으로 칭송하였다. 그 배경에는 소련을 침략한 히틀러가 승리할 것으로 보이자 나치에 기대어 동유럽 정교회 지역을 천주교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시도하고, 크로아티아의 천주교인들이 세르비아 정교도와 유대인 등을 대량 학살하는데도 이를 지지하였으며,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클라우스 바비(Klaus Barbie) 등 나치 전범들을 바티칸에 숨겨주고 아르헨티나·볼리비아 등으로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등 문제가 많았지만, 반공을 명분으로 미국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교왕 비오12세(Pius XII)와 교왕청이 있었다.

교왕 요한 바오로 2세. 1984년 방한 세계성체대회 주관.
교왕 요한 바오로 2세. 1984년 방한 세계성체대회 주관.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는 “선악의 싸움인 사상전”이라고 선언하였고, 미국 뉴욕대교구장 겸 군종교구장 스펠만 추기경은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 자유 수호의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하며 바티칸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랐다.

장면 정권의 배경이자 수혜자에서 군사 쿠데타 적극 지지로 돌변한 천주교

미군정 시절에 노기남 주교의 추천으로, 민주의원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내고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정부 수립 후 UN 총회 한국대표단 수석대표와 대통령 바티칸특사‧초대 주미대사 등 외교 분야에서 요직을 거친 뒤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장면이 정치 거물로 승승장구할 때까지 천주교와 이승만 정권이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이승만과 장면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서 반(反)이승만 쪽으로 기울었고, 그 과정에서 대구교구가 발행하는 ‘대구매일신문’이 테러를 당하고 서울 교구의 ‘경향신문’이 폐간 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교왕 요한 바오로 2세 1989년 방한, 세계성체대회 주관.
교왕 요한 바오로 2세 1989년 방한, 세계성체대회 주관.

그러나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의 장면 정권이 출범하자 기관지 ‘가톨릭시보’ 사설을 통해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나 교회 활동의 협조는 천주교회를 위하는 데만 국한된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헌법에서 정한 정교분리를 무시하라는 위험한 주장까지 펼쳤다. 장면도 이 기대에 부응하여 9개월 만에 실각할 때까지 장차관 등 주요 자리에 총인구 대비 신자 비율의 4.1배인 11.9%를 천주교인으로 등용하였다. 장면의 측근인사들 증언을 통해 장차관 등 정부 인사도 천주교가 운영하는 ‘경향신문사 고문실’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면이 천주교 지도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음에도, 1961년 5월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가톨릭시보’에서 “반공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켜도 좋다”고 주장하며 장면을 버린다. 

‘가톨릭시보’는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인데 공산 치하에서는 잘살 수 없으므로 군사혁명정부가 국시를 반공으로 삼은 것은 현명한 정책이다.…또 민주주의에 충실하기 위하여 언론 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천주교계의 태도 돌변 배경에는 쿠데타가 일어난 뒤 주한 교왕사절이 외교사절 가운데 가장 먼저 쿠데타 지지를 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내지 못해 고심하던 쿠데타 세력을 위해 메리놀회 선교사 에드워드 모펫(Edward Moffet)이 천주교 신자인 미국 대통령 케네디를 설득해 군사쿠데타를 수용‧승인하도록 상황을 유도한 것으로 보아 ‘바티칸의 세계 전략’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과 천주교의 밀착 관계는 1960년대 말까지 이어져서, 1969년에 박정희가 집권 연장을 위하여 삼선개헌을 추진하자 야당과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여당인 공화당 일부 의원들마저 반발했지만 천주교는 침묵을 지켰다. 1969년 7월1일에는 한국 주교단 전체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었고, 두달 뒤인 9월14일 새벽에는 장면을 이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정치인 이효상 국회의장이 삼선개헌안을 변칙 처리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천주교 파격 지원

1972~1979년 유신 시절과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정권과 천주교가 긴장과 갈등을 이어갔던 것으로 알고 있는 국민들이 많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1984년과 1989년 교왕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자 전두환‧노태우 정권은 ‘공영방송을 통한 행사 중계와 특집방송 편성’ ‘경찰을 동원한 행사장 질서 유지와 교왕 경호’ ‘대통령의 공항 영접과 청와대 정상회담’ ‘기념주화와 기념우표’ 발행 등 다양한 특전·특혜를 제공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2월에 한국 천주교 세 번째 신학교 ‘선목신학대학’ 설립을 허가한 데 이어 1983년 12월에는 네 번째 신학교 ‘수원가톨릭대학’ 설립 허가를 내주었으며, 노태우 정권은 1988년 12월 다섯 번째 신학대학 ‘부산가톨릭대학’의 설립을 인가해줘 천주교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었다.

1980년~2017년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이 수탁 운영한 대구 시립희망원. 2010년 1월~2016년 8월 사이 6년 7개월 동안 338명 사망(의문사 29명 포함).
1980년~2017년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이 수탁 운영한 대구 시립희망원. 2010년 1월~2016년 8월 사이 6년 7개월 동안 338명 사망(의문사 29명 포함).

대구대교구는 1980년 대구시에서 노숙인·장애인 집단거주시설 희망원을 수탁 받아 37년간 운영해오다가 입소자 수백명이 사망하는 인권유린과 자금 횡령 등 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비판여론에 밀려 2017년에 운영을 포기하였으나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전두환 정권의 특혜로 팔공산CC 설립을 허가받아 1987년에 개장,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천주교에 골프장 설립이라는 큰 선물을 주면서 정권이 되돌려 받은 선물이 무엇이었을까.

물론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절에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신부와 수녀, 많은 평신도들이 민주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 나서며 어려움을 겪는 등 큰 공적이 있었지만 지난 200여년 동안 저질러 온 다른 악행들을 덮어줄 정도는 아니다. 

313년 공인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가종교’가 된 뒤 이단 등을 이유로 ‘박해하는 교회’로 변하는 데 100년이 안 걸렸다고 하고, 그 뒤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 곳곳에서 숱한 사람을 죽이고 문화를 말살하는 데에 앞장섰던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순교’를 유난히 강조하며 성지화에 몰입, 민족과 이웃종교들의 역사를 멸시하는 한국 천주교가 ‘박해하는 교회’의 잘못된 유산을 계속 이어갈 것인지 묻고 싶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이 운영하는 팔공컨트리클럽.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이 운영하는 팔공컨트리클럽.

[1652호 / 2022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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