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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모든 생명에 공양 올리는 것”

기자명 채한기
  • 불서
  • 입력 2004.03.22 13:00
  • 댓글 0

‘2004 오늘의 시’ 선정 시인 불교방송 PD 문태준 씨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문태준 作 ‘맨발’


불교방송의 ‘차 한잔의 선율’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문태준 씨의 시 ‘맨발’이 130여명의 시인·평론가들에 의해 ‘2003년 가장 좋은 한국 시’로 선정됐다. 도서출판 ‘작가’는 문태준 시인의 작품을 비롯해 평론가들이 뽑은 시와 평론을 묶어 최근 단행본 ‘2004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로 출간했다.


시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

문태준 시인은 고려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 시심을 내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 여름 방학 때 집에서 시집 100여권을 탐독한 후 시의 매력에 한껏 이끌렸다고 한다. 그의 시심(詩心)은 대학시절 익어가 1995년 대학 졸업하기 전인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서 시 ’처서(處暑)‘외 9편이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1996년 불교방송에 입사해 ‘거룩한 만남’, ‘무명을 밝히고’ 등의 프로듀서를 맡으며 불자들에게 법음을 전했지만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시인으로 점차 불자들에게 각인 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 비평사)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시집에서 문 시인은 자신의 시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역력히 보였다. “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로 쓰고 싶었다”는 문 시인의 말처럼 첫 시집에는 농촌 현실과 농촌 사람들 이야기, 늙어간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서 보여주는 관능미, 그리고 샤머니즘이 시집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박형준 평론가는 그의 이러한 시적 성향에 대해 “신경림, 김용택, 고재종이 주로 농촌 풍경을 서사로 그리는 것과는 또 다른 시점에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 평한바 있다.


“살아온 이야기 쓰고 싶었다”

지난 해 ‘현대시학’에 발표한 ‘맨발’은 그의 시적 흐름이 이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개조개가 맨발로 걸어온 길을 보여주며 수행자의 구도길을 우리에게 보여준 이 시에서 불교적 사유 채색의 농도가 훨씬 짙어져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느림의 미학’이다. 그 느림 속에는 ‘찰나’가 농축돼 있고 그 찰나는 과거와 미래를 통시적으로 꿰뚫고 있다. 문 시인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시적 화두는 ‘무상과 생명’이라며 “연기법칙에 따른 ‘무상’을 진솔하게 말하고 싶다”고 전한다. 즉 찰나를 말하지만 그 속에 담긴 생명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찰나에 담긴 ‘생명’이 화두

지금 그가 써가고 있는 시에는 늙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의 생을 다하면서 다른 것들에 생을 불어넣어 주는 생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시는 올해 가을 선보일 두 번째 시집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창작과비평사)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불교방송에서 일하고 있기에 시심을 잃지 않는다는 그는 시란 “모든 생명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공양물을 기다려 보자.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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