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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서 시작한 탈북민 포교…“나에게 찾아온 운명같은 일”

  • 무진등
  • 입력 2022.10.24 15:52
  • 호수 1654
  • 댓글 0

할아버지 출가로 맺어진 불교와의 인연…불교대학 다니며 신심 깊어져 일반포교사 품수
불단·불상도 없는 하나원 불교반 참여자는 10명 남짓…“이웃종교에 뒤지고 싶지 않았다”
하나원 가정체험·쉼터·하나센터 등 불교계로…사찰여행·탈북민 거처 매입 위한 준비도

“탈북민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손수건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홍성란 상임포교사, 그의 탈북민 포교는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탈북민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손수건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홍성란 상임포교사, 그의 탈북민 포교는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걸망 하나 짊어지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속세의 인연들을 향해 돌아보지도 않는다.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홍성란(65. 보현화) 하나원 상임포교사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치 어제 일인양 생생하다.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무장공비를 잡아야 하는 임무가 떨어졌었다고 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사람을 차마 죽이지 못하셨죠. 그 뒤로 바로 면직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 같이 홀가분해 보이셨죠. 그러곤 스님이 되어야겠다며 떠나셨어요.”

할아버지의 출가 선언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했고, 소녀의 머리 속에 ‘불교가 무엇이길래 할아버지를 데려간 걸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불교와의 연은 쉬이 닿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를 따라 절에도 다녀봤지만 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천왕, 그 발 아래 깔린 이들, 목탁소리에 맞춰 무언가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외는 것도 무서웠다. 절은 아이에게 낯설었고,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이직으로 서울로 상경했고, 자연스레 불교는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10년이 흘렀다. 가족의 결혼 준비로 화계사에 들렀고, 그 곳에서 한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그후로 스님이 계신 암자에서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러던 중 신도 한 분이 젊은 아가씨가 일을 싹싹하게 잘한다며 “포교사가 잘어울린다”고 말했다. 다음날 암자를 찾은 불자도 자신이 능인선원을 다닌다며 가서 불교공부를 해볼 것을 권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바로 능인선원 불교대학에 접수했다.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었고, 거의 대입준비 수준으로 공부했다. 불교가 더욱 궁금해졌고 부처님에 대한 경외심이 솟았다. 법사대학원 2년을 또 다녔다. 배운 것을 회향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능인선원은 조계종 인가 불교대학이 아니었기에 그는 천안 각원사 불교대학에서 2년간 더 수학한 뒤 포교사 고시에 도전, 품수를 받았다.

13기 포교사로 첫 발을 뗐다. 처음 배치된 곳은 충청 군포교팀이었다. 경기도 본가와는 상당한 거리였다. 열정에 불타올랐기에 이대로 있다간 포교사 활동을 오래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포교사단에 연락해 지역단 변경을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그럼 하나원에서 포교활동 하시는 것은 어떠세요?”였다.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홍성란 포교사와 하나원의 16년간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3개의 소강당에 불교, 천주교, 개신교반이 나눠 들어가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탈북민의 숫자는 10명 남짓. 제대로된 불단, 불상도 없었다. 탱화 하나만이 걸려있었을 뿐이었다. 선배 포교사들은 탈북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을 읽고 있었고 탈북민 또한 흥미 없는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종교도 이런가 싶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수의 탈북민들이 강당에 가득했다. 종교활동은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가 종교활동시간을 선점한 터라 과연 다음 주에도 불교반에 사람들이 찾아올까 싶었다. 매주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는 타종교와 달린 불교는 한 달에 한 번 하나원을 찾아 활동하는 것이 끝이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포교는커녕 매주 새로운 사람만 보다가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일요일 불교반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탈북민 포교는 ‘맨땅에 헤딩’ 수준이었다. 무엇을 해야할지도 몰랐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 누군가가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활동에 드는 비용 또한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누가 빈 주머니를 채워주지도 않는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결국 홍 포교사와 몇 안되는 포교사만이 불교반을 지키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팀장으로서 신경 써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웃종교에 뒤쳐지고 싶지 않았다. 어렵고 복잡한 경전은 접었다. 대신 ‘부모은중경’을 선택했다. 탈북한 이들에게도 부모가 있고, 우리는 한민족이기에 효사상이 근본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해하기 쉬운 경전을 읽으니 긴장됐던 분위기도 서서히 풀려갔다. 탈북민 대다수는 특정 종교가 좋아 움직이는 게 아닌 분위기에 좌우되었다. 아무리 선물공세를 펼쳐도 갈사람은 가고 올사람은 오는 법. 그는 탈북민의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시켜 나갔다.

북한노래모음집을 만들어 이를 따라부르고,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에게는 연주를 맡겨 공연도 실시했다. 또 그림 그리기, 연꽃만들기, 북한음식만들기도 진행했다. 특히 옥수수가루로 속도전떡을 만들때면 고향 음식을 만든다는 행복, 다 같이 나눠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웃음이 넘쳐났다. 어느날은 북한음식 도시락을 준비해가기도 했다.
 

한복을 입고 진행한 하나원 수계식 현장.
한복을 입고 진행한 하나원 수계식 현장.

탈북민 포교에 있어 홍 포교사는 어느 것 하나도 대충이 없었다. 수계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수계식을 위해 지인들에게 한복을 구하러다녔다. 일반 옷을 입고 수계식을 진행하기엔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불교반을 선택한 이유는 다 달라도 지금은 같은 마음이었다. 부처님 제자가 되길 서원하는 이들에게 퇴소 전 행복한 추억 하나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모아도 10벌이었다. 수계자는 100명인데 어디 가서 어느 세월에 예쁜 한복을 다 구한단 말인가. 한복 보시가 간절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한복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친구가 자기가 한복집을 하는데 안 찾아간 한복 100벌 정도가 있다는 거예요. 친구가 한복을 기부해줘서 수계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죠. 뿐만 아니라 오래전 알던 사람이 갑자기 오징어 100마리를 주기도 하고, 한 스님은 아이들 장난감도 후원해주셨죠.”

탈북민 수가 증가하면서 종교실이 생겼다. 이제 복도를 가운데 두고 세 종교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펼쳐졌다. 그때 탈북민들이 한복을 입고 함박 웃음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한복을 입히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탈북민 몇몇에게 한복을 입히고 율무차, 녹차 등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나눠줬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불교반에 가면 우리도 한복을 입을 수 있나요?”라고 물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원 내에도 소문이 번졌다. 어느덧 불교반을 찾는 이들은 100명을 넘어섰다.

하나원 내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수술을 하고 입원까지 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일요일 법회는 절대로 빠질 수 없었다. 그는 ‘내 몸보다 탈북민 만나는게 더 중요하다. 내가 없으면 불교반은 한 주를 건너 뛰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만사 제치고 그들을 만나야만 했다. 이래야 불교 위상도 높아질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나원 가정체험에 동참한 불자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하고 있다.
하나원 가정체험에 동참한 불자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하고 있다.

하나원에서 진행하는 1박2일 가정체험이 불교계로 넘어온 건 홍 포교사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불교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불교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신도가 몇인데 그것도 못할리가요.”

하나원 내부 논의 끝에 불교에게로 공이 넘어왔다. 막상 하려니 앞이 막막했다.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찰이 없었다. 급한대로 연이 있었던 부산의 한 사찰로 내려갔다. 스님과 신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탈북민 포교와 가정체험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절규에 가까운 홍 포교사의 요청에 13개 사찰 신도들이 가정체험에 참여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직적으로 팀을 배치했고, 참여자들에게 탈북민과 생활 시 주의사항, 마음가짐 등을 교육했다. 짧은 시간안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일대일 가정체험이 불교계에서도 시작됐다. 그 이후로도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고, 수원사, 청계사, 봉녕사, 도선사, 용화사 등이 참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브로커를 통해 중국에 도착한 북한사람들은 대부분 팔려가요. 끓는 물에 손을 담근다거나 머리채가 잡히는 등 폭력은 일상이고, 협박에 굶주림에 북한과 다름없는 생활을 십수 년간 해요. 신분이 없어서 북송될까 병원도 못가고…. 그렇게 살다가 한국에 오면 몸은 완전히 망가져있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한 상태죠. 스치기만해도 흠칫 놀라 떨어지기도 해요.” 

몸에 새겨진 상처는 마음에도 생기기 마련. 탈북민들은 항상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향한 그리움, 나 혼자만 탈출했다는 자책과 죄책감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을 안고 살고 있다. 어떤 때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한 탈북민이 홍 포교사의 손을 잡고 “포교사님 나 어떡해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요”라며 오열한 경우도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탈북민의 손수건이 되어 눈물을 닦아주고, 이들을 자신의 가족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

이를 더 악물었다. 탈북민을 위한 삶에 몸을 던졌다. 매주 법회만 가는 것이 아닌 퇴소 후 탈북민들을 위해 불교계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매일 같이 통일부 사이트에 들어가 공모사업이나 지원 혜택 등이 있는 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해서 지역적응센터인 하나센터, 불교계 유일의 탈북민 쉼터인 ‘연꽃쉼터’를 따낼 수 있었다. 이후 수원사에서 탈북민 동포모임 법회를 구성했고, 불광사, 용화사 등에서도 탈북민 모임을 이어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상, 통일부장관장 2회, 남북하나재단상, 재단 이사장상, 불교활동가상 등  많은 상도 수상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하나원 활동 또한 비상불이 켜졌다. 당연히 탈북민 이는 감소했고, 불교반을 찾는 수도 덩달아 줄었다. 담당자 외에는 외부인 출입은 금지됐고, 탈북민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탈북민 포교는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부 활동은 그대로 진행하는 대신 하나원 밖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탈북민들과 함께하는 사찰여행’이다.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매달 사찰에 전화해 협조를 요청해야 했고, 탈북민의 눈높이에 맞춘 해설을 위해 사찰공부는 필수였다. 

사찰여행은 참여 대상도 인원수도 제한이 없었다. 불자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홍 포교사와 탈북민들은 함께 사찰을 누비며 공부도 하고, 현장체험도 했다. 자기 지역에만 모여 살던 탈북민들에게는 이 시간 만큼은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홍 포교사의 경비로 진행될 수 있었다.

최근에는 탈북민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쉴 거처를 매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돈이 많아서 탈북민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는 게 아니에요. 벌이도 없는데 몇 억이나 되는 큰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탈북민 포교를 하는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야 하니까 꼭 해야하는 일이기에 하는 거예요.”

이밖에도 무연고자로 사망한 탈북민 장례를 치러주고, 탈북 청소년들 장학금 연계, 취업 알선 등과 최근에는 안면도 없는 한 탈북민의 죽음을 애도하며 법당에 위패를 올리기도 했다. 탈북민과 관련된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그 어디라도 달려간다.

장례식장에서 한 탈북민이 그에게 “포교사님 아니면 누가 우리를 위해 울어주나요?”라고 말했다. 그 울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전히 탈북민들은 한국이 낯설고 두렵다. 혈혈단신 혼자 내려온 그들에게 홍 포교사는 가족 그 이상의 존재가 됐다.

탈북민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홍성란 상임포교사. 길 없는 길을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더없이 거룩하고 장엄하다.

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1654호 / 2022년 10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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