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품격 있는 녹차를 만나면 생각나는 감사한 인연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선배와 경복궁 동문 쪽에 있는 법련사(法蓮寺)에 간 적이 있다. 승보종찰 송광사의 서울 국제선원이었다. 절은 두 채로 이어져 있었다. 아래채는 대웅전으로, 돌계단을 몇 개 올라가는 위채는 관음전과 옆에 객방 등으로 이루어져 이곳에서 청년법회(法會)가 열렸다.
어느 여름날 위채 관음전 쪽에서 연세가 있어 보이는 어른 세 분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스님 한 분을 보게 되었다. 차를 마시는 그 스님의 모습은 먼발치에서도 내가 만난 사람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대문에 서서 스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 스님께서 “어이, 미운 오리 새끼 와서 차 한 잔 마셔봐” 하셨다. 그 소리에 내가 방해될 것 같아 되돌아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거기 너 말고 누가 서 있니?”라는 말씀에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설마 나 같은 보잘것없는 촌뜨기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그 순간 뭔가 모르는 강력한 끌림에 의하여 주저하는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스님은 강렬한 느낌과는 달리 “너는 얼굴은 맑게 생겼는데 왜 움츠리고 다녀? 젊은이가 어깨를 펴고 다녀야지” 차를 따라 주면서 “너는 세상에 주인공이야, 네 안에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너는 불자니까”라고 하셨다. 순간 스님이 내 영혼을 꿰뚫은 것 같았고 머리속에서 번개가 쳤다.
스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인사동으로 갔다. 주머니 속에 있던 4만5천 원으로, 고당이라고 쓰인 백자 다기(茶器) 한 벌을 샀다. 그 돈은 취직을 한다면 새 구두를 사야 할 나의 전 재산이었다.
스님을 만나기 전 나는 일찍 세상을 뜨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오빠들의 연이은 죽음과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 폐결핵 완치 후 또 위장병에 시달리면서 병약한 자신에 대한 원망 등으로 많이 그늘져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과 폐결핵으로 야간 여상도 또래보다 일 년을 늦게 졸업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 야간대학에 진학하려는 각오를 가졌으나 내 건강과 형편은 날이 갈수록 더 좋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오기로 버텨 갔지만, 점점 희망을 잃어갔다.
그 후로 절에서 스님을 몇 번 뵐 수 있었다. 많은 말씀을 하지는 않았지만, 차 향기에 실어 간간이 들려주신 말씀으로 더는 우울감이나 삶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게 되었다. 땡볕 더위 산사의 돌 틈에서 솟아오르는 청량한 샘물 같았다. 스님을 흉내 내다가 차 전문가가 된 지금 좋은 다기를 갖추고 최고급 차를 우려봐도 그때 스님께서 우려주신 그 차 맛에 이르지 못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님은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이셨다.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은 줄곧 내가 어디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자존감을 가지고 굳건하게 살아가게 했다.
“항상 이 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 같은 말씀들은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안데르센 동화에서처럼 뒷날 내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참으로 감사하게도, 20대 젊은 날은 법정 스님과의 인연으로 차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고단한 생활이었지만 가끔 차를 마시고 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세상 무엇도 부러워할 것 없는 자존감으로 살았다. 지금도 그 말씀은 차향과 함께 내 가슴 속에서 삶을 인도한다.
누군가가 차에 관해 물으면 나 자신은 경건해진다. 스님처럼 촌철살인은 아니어도 될 수 있는 대로 친절하게 답변하려 노력한다. 아마도 스님께서 주신 차 맛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수혜에 대한 무의식의 반작용 같다.
차를 심평(審評)할 때 잘 만들어진 녹차를 만나면 깊고 청정한 수행 끝에 사람들 앞에 선 수행자의 그윽한 향기를 만난 것과 같아 나를 더없이 맑게 해준다. 이런 녹차는 평소 사용하던 유리 머그잔에 몇 잎 넣고 끊인 물을 부어 조촐하게 마셔도 다시 내 인생을 지치지 않는 생기로 살아가게 한다.
김민선 김민선차문화연구소장
[1655호 / 2022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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