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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스님은 살아계셔도 이미 전설이 되신 분”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22.11.17 20:04
  • 수정 2022.11.17 20:11
  • 호수 1658
  • 댓글 0

기고-서울 심택사 주지 효탄 스님

1978년 10월 운문사서 처음 봬
평온하면서 흐트러짐 없는 자세
논강 끝나면 토씨 끼고 ‘호미질’
2007년엔 전강 받는 영광 누려
“스님은 모든 비구니들의 사표”

2007년 법계명성 스님과 전강 제자스님들.
2007년 법계명성 스님과 전강 제자스님들.

황금빛 단풍잎이 비처럼 내리는 운문사 은행나무, 학인들은 논강이 끝난 뒤 은행나무로 달려가 ‘잎비’를 발로 흩으며 가을을 만끽한다. 그 은행나무는 이맘때쯤이면 그 장관을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한다. 지금 운문사 도량에는 황금빛보다 더 빛나는 회주 법계명성스님이 계신다. 내가 회주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78년 만추의 계절, 은행나무가 찬란한 빛을 내뿜는 10월, 치문 방부생으로서였다. 당시 회주스님께서 1977년 최초로 학장과 주지를 겸직하시게 된 지 얼마 안 된 시기로 운문사 학인들 건사하랴, 도량보수 및 불사를 계획하고 추진하시랴, 많이 힘드신 시기였다. 사형 현욱 스님은 총무를 맡고 계셨다. 그때 회주스님께서는 금당에서 능엄반과 화엄반을 가르치셨고, 우리 치문반들은 금당 아랫목 따뜻한 곳을 골라서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치문 중강스님은 상호 스님이셨고 치문을 끝낸 뒤 우리는 흥륜 강사스님(당시는 중강)에게 ‘서장’을 배우게 됐다. 학장스님이신 스님께서는 항상 평온하시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꼿꼿한 자세,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다. 평소 말씀이 별로 없으셨으나 짧게 힘 있게 말씀하셨으며, 항상 학인들에게 공대를 쓰셨다. 지금까지 말썽부리는 학인 누구조차도 내치신 적이 없으시다. 그리고 논강이 끝나면 항상 팔에 토시를 끼시고 호미를 들고 앞장서시는 모습은 학인 누구도 불평할 수 없는 사표(師表)이셨다.

‘즉사이진(卽事而眞)’, 항상 모든 일에 진실하게 거짓 없는 참된 마음으로 하라는 말씀이시다. 그러한 스님의 마음 쓰임이 현재의 운문사를 비구니 대교육도량으로 일구어내신 원동력이시리라. 1970년 운문사에 첫 발을 디딘 이래 지금까지 ‘입지발원(立志發願)’, ‘정진불퇴(精進不退)’, ‘유통교해(流通敎海)’를 교육목표로 내거시고 50년 이상을 올곧게 한 곳을, 운문사를 최고의 한국 비구니 동량을 길러내는 산실로 만드는 일에 전 일생을 바치시고 계신다. 나는 지금도 극락교 건너 죽림헌(竹林軒)을 생각하면서 항상 어른의 모습을 몹시도 그리워한다.

나는 평생 나를 괴롭히는 허리 통증에 ‘서장(書狀)’을 끝내고 얼마 뒤 운문사를 나와 동학사로 옮겼으며 대교(大敎)를 그곳에서 마쳤다. 그러니 사실상 운문도량에서 회주스님께 경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어른의 위의, 말씀, 대중 섭수하시는 모습은 그 어느 것도 내게 깊은 감명을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른께 경을 배우게 된 일은 2006년도 이후 강사로 있을 때, 대학원생과 함께 ‘열반경’과 비구니계율을 논강할 때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고 내가 2007년 전강(傳講)을 받은 일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사실상 나는 졸업생도 아니고, 운문사 대중살이를 못 견디고 아프다고 제 발로 나갔으니 누구도 반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주스님께서는 멀리서나마 나를 보시고 아껴주시면서 “저 스님은 나보다 먼저 박사학위 받은 스님이야”하시며 칭찬하시었다. 내가 운문사를 떠난 것이 단순히 건강악화였고, 구도에 있어서 열심이었던 것을 감싸주시고 가상하게 보아주셨던 것이다. 어른께 전강을 받은 일은 어른이 아니시고는 누구도 마음 낼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출가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2006년 초봄부터 총무원 문화부장 직을 맡은 2009년 10월 말까지 운문사에서 수행하던 때였다. 이곳에서 나는 어른과 함께 운문사 도량에서 학인들과 충만한 행복 속에서 살았다. 넓은 수목원과 장군평을, 그리고 문수선원으로, 사리암으로 이어지는 포행은 지금도 늘 아스라한 추억이다.

2008년 효탄 스님(중간 왼쪽)이 가사장삼을 수하고 학인스님들과 함께 한 모습. 
2008년 효탄 스님(중간 왼쪽)이 가사장삼을 수하고 학인스님들과 함께 한 모습. 

내가 2006년부터 운문사에서 살게 된 기간은 어른스님께서 엄청난 원력으로 추진한 운문사 불사를 어느 정도 이루어놓으시고 전국비구니회장을 맡으시면서 종단 안팎으로 많은 일들을 해나가신 시기였다. 특히 어른과 함께 한 이때에 베트남 베삭데이 참석, 회주스님의 태국 마하출라롱컨 불교대학 명예박사학위의 수여, 전국비구니회 법룡사에서 32비구니 법사가 법상에 오르는 ‘법화경 산림법회’ 등등이었다. 이때 나는 송구스럽게도 ‘다라니품’ 법문을 하였다. 그리고 2006년 6월 한국비구니사(韓國比丘尼史)를 조명하는 포럼을 여셨고, ‘한국비구니의 수행과 삶1, 2’를 펴내셨다. 2007년 7월 한국비구니 대표스님들 일행과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달라이라마와 함께 비구니 계율과 계맥에 관한 논의를 했는데(기조연설을 하심), 이 모임은 티베트에서의 비구니 계단을 설립하기 위한 국제회의였다. 그때 티베트 교단으로 출가하였지만 비구니계를 수지할 수 없는 현실의 장벽 앞에 울던 티베트 여성출가자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국비구니의 위상을 확인하였으며 한국비구니 승가의 세계화를 실감하였다. 이것은 여기까지 그 많은 세월을 인고와 정진으로 단합된 모습으로 수행 정진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후 어른스님께서는 2007년 가을 명사(明師) 품계를 받으셨으며, 2008년 봄에는 태국에서 유엔이 정한 국제 여성의 날에 ‘탁월한 불교 여성상’을 수상하셨다.

회주스님께서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항상 앞에 달고 계시었으며 우리 모두에게 지표(指標)를 제시하셨던 분이다. 스님께서는 살아계셔서도 우리의 전설(傳說)이신 분이시다.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오셨고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을 다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그 시대적 소명을 이어갈 냉철한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어른께서는 2019년 12월 그동안 인생여정을 20여권의 책으로 펴내신 바 있다. 이 또한 누구도 해낼 수 없는 희유한 일이었다. 복·혜구족(福慧具足)은 어른을 두고 한 말이다. 회주스님께서 구순을 지내신지도 몇 해 전이다. 구순 생신 때 잠깐 내려가 뵙고 왔지만 그 이후 코로나로 인해 뵙지 못한 것이 3년이 훌쩍 넘었다.

효탄 스님
효탄 스님

그리고 나는 그동안 학계에 발표했던 30여편의 논문들과 약간의 기고문 등등을 정리하여 책을 펴내고자 준비하고 있다. 말하자면 학문적 성취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적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천사를 감히 회주스님께, 나의 법사이신 회주스님께 엎드려 청하였다. 스님! 내내 건강하시옵시고 저희들과 오래도록 함께 해 주시옵고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주시옵소서!

[1658호 / 2022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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